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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꿈과 그리스도의 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0. 28. 14:36 Writer : 김홍덕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되었지만 복권이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한 요셉을 까맣게 잊고 살던 어느 날, 바로 왕이 연이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근심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일을 바로에게 고하매 바로가 요셉을 불러 자신의 꿈을 해석해 달라고 명하게 됩니다.


바로의 꿈은 이러했습니다. 하숫가(나일 강)에서 살지고 아름다운 암소 일곱 마리가 나와서 풀을 뜯고 있는데 잠시 후에 파리하고 흉악한 암소 일곱이 나와서 살지고 아름다운 소를 먹었지만 그 파리하고 흉악한 모습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과, 한 줄기에 무성하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나고 잠시 후에는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이삭 일곱이 나와 무성하고 풍성한 이삭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어릴 적 교회학교를 좀 다녔다면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냥 성경을, 교회를 좀 접했다면 그 스토리는 다 아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꿈의 해석은 앞으로 칠년간은 애굽에 풍년이 들었다가 그 이후에 흉년이 들 텐데 이전 풍년의 풍성함이 이후 흉년으로 인하여 무색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요셉은 바로에게 지혜로운 자를 뽑아 온 칠년간의 풍년 때에 그 소출의 1/5를 거두어 온 애굽에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를 하게 되고, 그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 요셉이 임명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 말씀은 인생역전의 사건으로 회자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 안에서 도덕적이고 바른 삶과 신앙적 규례를 지키면 언젠가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설교를 할 때 이만한 본문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요셉과 같이 신앙과 행실에 지조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그 도우심은 결국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듯 인생에서 꿈꾸던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쓴 사건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관 안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실 지를 요셉에게 배우라고 쓴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요셉의 이야기 뿐 아니라 성경말씀 전체에 흐르는 말씀의 주제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인생역전에 관한 말씀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경의 안목과 다른 안목으로 성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셉은 지속적으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므로 그 아비와 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그 아비 이스라엘(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큰 민족 곧 하나님 백성의 나라가 되는 연결고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과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곧 교회로 이어지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가진 의미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왜 성경에 있으며,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로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생각해 보려면 지금 이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속한 말씀이고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본질적 주제는 하나님 나라, 곧 이 시대로 본다면 온전한 교회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꿈은 애굽 왕 바로의 꿈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꿈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로 삼는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이 해몽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법칙은 이런 것입니다. 육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이긴 자 일수록 피라미드의 꼭대로 향하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이긴 자가 선하고 의로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생이란 바로 이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고 패배한 자라는 것을 인정할 때 의로워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라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 교회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기준으로 성공해 보려고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서게 되고 그때 답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애굽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에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질문에 서는 것조차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아니 자기 의에 빠져거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애굽의 강 나일에서 올라온 살지고 아름다운 암소들의 풍성함과 같은 세월을 보내다가 그 모든 풍성함을 다 삼키고도 모자랄 정도의 시련을 겪게 되면 이는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 해몽하기를 그런 흉년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 애굽의 힘, 애굽 안에 있는 것, 즉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가난함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그것이 아니라도 사람은 늘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사람이 달리 빈 그릇이 아닙니다. 그런데 애굽의 젓줄인 나일에서 올라오는 것들이 결국 채워주지 못하는 배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배고픔을 이기려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요셉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세계에서 채우지 못하는 사람의 심령의 가난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교회에 가서 구하는 것이 다 세상의 것을 구합니다.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구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 때 누가 이익인가를 살피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 이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하나님을 믿으면 저렇게 삶이 윤택하여 지는구나!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하나님을 속이려 합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러오고 모여든 사람들도 역시 육신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동일한 이유로 구합니다. 심지어 멀리 외국에 가서 선교한다고 전하는 것도 같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전도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서 잘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니 모두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애굽의 세계에서 의로운 것입니다. 다산과 풍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일에서 올라온 살지고 아름다운 소와 같이 애굽의 세계에 대하여 풍요한 삶을 누림으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그것에 있는 것과 같아 보여도 역시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곤고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하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말씀만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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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십자가의 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7. 00:10 Writer : 김홍덕

여기서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아주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오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율법으로 심판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실질적인 예수님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왜 그것이 죽을죄가 되었을까? 이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율법이란 행위로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나 의 그리고 본질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생이 부정하다 여겼기에 이 부정한 인생을 구원할 것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무엇보다 주장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심령에 율법을 주신 목적이 생명이 되어(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율법의 존재 목적의 본체로서 그 생명의 본성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예수님의 삶은 그들의 안목으로 볼 때 도무지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은 미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인생을 부정하다 여긴 그들의 안목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인간이라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려야만 했던 안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그 안목이 결국은 어린양을 죽게 했듯 유대인들의 안목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되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이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는 사람의 죄를 어린양이 피 흘리고 대속하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덮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담(사람)이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긴 것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의 정체성이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음 중에 두실 수 없는 온전한 생명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신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의에 이를 만한 것을 육신으로 나타내지 못하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기고 십자가에 발가벗겨 매달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육신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는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한 것도 없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십자가에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모습으로 매달아 ‘이런 꼴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쓸모없고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 집 밖에 나가면 감추고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연약함 그것이 숨길 것이 아니라 드러나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십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지 않고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반대로 보고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욕보이는 것임에도 오히려 그것이 좋은 신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로 하신 모습이라는 것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데 지금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으로 달리신 예수님은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에 그것을 드러내시므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목적 안에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도 포함된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율법이라는 각도에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사람들이 거꾸로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작정하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반대로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인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람, 보시기에 심히 만족하신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 하심이지 그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을 담보하여 주시려 함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어두움, 이렇게 율법도 십자가도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는 것의 근본 원인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을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부끄럽고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안목만 바꾸면 되는데 오히려 사람의 육신의 행동을 바꾸려 한 것이 율법을 잘못 대한 모습인 것입니다. 안목은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율법은 행동을 바꾸는 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표현되는 법이니 결국 사람이 자기 안목만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신 인생의 정체성을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안목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안목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려고 한 자신의 안목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죄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그 시인이 있으면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심겨져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러면 율법은 그냥 지켜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는 생명의 법칙이 바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이것이 십자가며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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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 이루었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5. 23:54 Writer : 김홍덕

법(法)에는 법리(法理)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도로교통법에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범칙금을 낸다는 조항의 목적, 곧 법리는 범칙금 부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고 처벌한다고 하는 것은 재산 압류가 목적이 아니라, 세금을 잘 내게 하여 그 세금으로 나라 살림을 윤택케 하겠다는 것이 세법의 법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법의 법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명시된 조항들, 이것을 행하고 지키라는 그 조항들은 그 조항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근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신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 안에 도적질할 이유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삶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 보다 존재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한 만족과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도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는 마음과 가치관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근원된 법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 ‘어떻게 하라’와 ‘지키라’는 말씀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난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법리인 것입니다.


이는 도로교통법에서 범칙금의 부관에 대하여 규정한 것이 범칙금이 목적이 아니라 교통안전이듯, 십계명과 같은 하나님의 율법이 보기에는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 같으나 그 본질, 그 법리는 성경이 전하는 모든 말씀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니,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 저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지켜내는 존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되면 모든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준법정신이라는 법을 지키려는 마음만 있으면 도로교통법이든 세법이든 다 지키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또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그런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마치 범칙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 곧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 본성이 행동과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가공품과 제조물은 생명이 표현한 모양과 형태를 따라 만들기만 합니다. 그것은 그런 모양과 형태를 이룬 생명의 본성이 없습니다. 법으로 치면 법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도 법리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성 없이 몸으로 지켜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이라 책망하시고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법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면 율법은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예수님의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의 삶의 모양과 행동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행동양식을 가진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삶의 모든 것, 행동양식과 삶의 모양과 의식은 율법을 지키는 삶, 아주 정확하게 말해서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기지도 못하게 지키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면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되느냐를 알게 되면 율법의 행위, 절기와 규례는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의 도를 보이시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땅에 씨가 심기듯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도가 심기고 그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가 되어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이 육신으로 나타나서 어떤 행동과 삶의 모양과 양식과 규례와 절기를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성에 따라. 바로 그 본성에 따른 행동양식이 성경이고 율법이고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된 삶, 곧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의 법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십자가 바로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한 사람(백부장)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 인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백부장이 눈으로 본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심령 안에 심겨졌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생명의 안목이 열렸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제사장의 복식(옷)과 절기와 규례를 거쳐야만 만날 수 있던 하나님의 지성소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말씀)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보고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아니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빛이 비췬 것입니다.)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율법의 모든 것을 육신으로 나타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것으로 깨달아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산다면 그것이 모든 율법을 일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다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이 율법과 복음을 시작할 때에 목차는 <7. 다 이루었다>까지 였는데 예상대로 추가가 되어 다음 회에 <8. 십자가의 도>를 이어가겠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십자가와 연결되는지 같이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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