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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0. 21. 18:15 Writer : 김홍덕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유혹을 물리친 요셉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요셉은 여호와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전옥(감옥의 장)이 감옥의 모든 일을 요셉이 맡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에 바로의 신하 중에서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과 떡을 굽는 관원장이 요셉이 있는 감옥(보디발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 두 사람을 시중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의 꿈을 꾸었는데 해석을 할 수 없어 근심하고 있을 때에 요셉이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재밌는 말입니다. 꿈의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해석이 하나님께 있으면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인데 그것을 자신에게 말하라고 한다는 것은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요셉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말씀들은 단지 요셉과 예수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요셉이 하나님께 있는 해석을 들으려면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요셉의 일을 읽고 묵상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두 관원장에 대한 말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꿈을 이야기하기를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고 포도가 열렸는데 자기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에 포도를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꿈에 대하여 요셉은 포도나무의 세 가지는 사흘이니 이후 사흘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될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먼저 꿈을 이야기 한 술 맡은 관원장의 해석이 좋기로 떡 굽는 관원장도 자기 꿈을 이야기 하였는데, 흰 떡 세 광주리가 자기 머리위에 있고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었노라 하니, 요셉이 해석하기를 세 광주리는 역시 사흘이나 당신은 사흘 안에 목이 잘릴 것이고 새들이 잘린 머리에 앉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날이 바로의 생일이라 잔치를 베풀었는데 요셉의 해석과 같이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목이 잘렸습니다.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이 꿈 이야기를 대하노라면 우리는 “왜 술 맡은 자는 살고, 떡 굽는 자는 죽었는가?”하는 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옥에 갇혔는지가 없기에 단지 꿈 내용으로만 그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바로가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바로의 뜻을 거역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듯이.


이 두 개의 꿈은 모두 “맡은 자”의 꿈입니다. 그리고 또 주인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 바로를 섬기는 관원, 즉 바로가 자기들의 주인인 사람으로서 바로의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먼저 삼일 만에 복직된 술 맡은 자는 꿈속에서 포도나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를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 바로에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과실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주를 빈 잔에 채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빈 잔은 우리 인생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빈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잔은 바로의 것, 곧 술 맡은 자의 주인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빈 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잔에는 포도나무에 짠 포도주를 담았다고 하는 것에서 우리 인생의 내용을, 빈 그릇과 같이 허망한 우리 삶의 속을 그리스도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빈 그릇과 같은 자기 인생에 채워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로서 사는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일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래서 삼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세월이 지나면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슷하지만 떡 굽는 자는 삼일 뒤에 목이 잘리게 됩니다. 머리를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죽었다는 것이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술 맡은 자는 주인의 빈 잔을 가지고 있었지만 떡 맡은 자는 이미 바로를 위하여 구운 떡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을 위하여 구웠지만 주인이 아닌 새들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구운 것이 주인의 음식이 아니라 짐승들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새가 먹었으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인생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빈 그릇입니다. 주인이 있는 그릇이 비었다는 것은 곧 주인을 위하여 채워지기 위하여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로 이 그릇에는 주인이 원하는 것, 주인을 위한 것을 담아야 합니다. 이 잔, 이 그릇은 주인을 위한 것을 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담을 때 온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떡을 굽듯, 자기 인생을 연단하여 드리려고도 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벽돌을 만든 것처럼. 하지만 빈 그릇인 우리 인생들은 그 빈 잔, 빈 그릇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채워야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원하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 그릇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그릇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대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사람이 되면 그 인생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관원과 같이 우리는 다 우리 주인의 뜻을 어겨 옥에 갇힌 자와 같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을 위한 것을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 하나님의 성품을 채우는 것, 포도를 짜서 나오는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채울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듯 이 두 관원장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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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9-31) 값없는 은혜의 시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19. 11:38 Writer : 김홍덕

율법은 가만히 두고 있으면 그 의미를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율법이란 하나님의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그것을 지키고자 시도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 이것은 사람이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지키는 것은 정말로 힘들구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내가 부족하여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사람과 ‘이걸 정말로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지킬 수 있을까?’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으니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이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보고 듣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으면 의심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과연 사람의 역량으로 이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은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외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하라고 계명을 주셨는데 사람이 해 보니 잘 안 된다? 그러면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것은 다른 어떤 간절함이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육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육신의 삶에 어떤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간절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하나님이 자기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알기에 하나님께 잘못하면, 하나님이 지키라고 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벌이 육신의 삶에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죽어서 지옥 간다는 대명제가 있지만 지옥에 가는 이유도 행위가 잘못되어 간다고 하니 같은 범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소유의 인생이 복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 때문에 율법을 육신으로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듯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면 사람의 역량을 잘 아실 텐데 이 율법을 행위로 지켜낼 수 있다고 여기시고 우리에게 주셨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은혜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에게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는데 해 보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다? 그러면 어딘가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컴퓨터를 조립해서 만든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터넷을 찾아서 조립법을 인쇄해서 옆에 두고 알려준 대로 각 부품을 주문하여 받아서 조립을 했는데 잘 안 된다면 사람들은 필시 ‘어디가 잘못됐지?’라고 돌아봅니다. 잘 안 되니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자기 고집대로 계속 밀어 붙이면 필시 다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잘 되지 않으면, 매뉴얼이 잘못되었거나 뭔가 부품이 맞지 않거나, 어떤 것이 불량이거나 한 것이니 그것을 찾으려고 해야지, 자기 가진 것대로 해 놓고 정상 작동될 때까지 계속 전원만 넣었다 뺐다가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과 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고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지켜낼 것인가 자기 생각대로 방법을 찾아서 열심히 했는데 잘 되지 않으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뭔가를 해 보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어 죄를 깨닫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정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한 가지 하나님은 그런 짓궂은 신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들고서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생각해보니 사람이란 존재가 너무 부끄럽고 연약해서 그냥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으니 행동으로 지켜내기 위한 각종 규칙과 법을 정하여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계명이 잘못되었거나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여기서 하나님을 온전한 신으로 믿는 믿음이 있으면 답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율법은 몸으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생각과 기준과 의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성경과 말씀을 보았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보았다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있는 사람의 삶의 모습인데 그것을 흉내 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정한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를 벗어난 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을 알았을 때 그러면 어느 자리가, 어떤 정체성과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의 자리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율법 앞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수고한 사람 앞에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는 위로가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자기가 세운 의에 기준에 맞는 행동으로 그렇게 노력했건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인생 앞에 사람이 수고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하여 그렇게 자기를 쥐어짜듯 수고한 것을 값으로 내어 놓았지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만 드러난 인생에게 이제는 사람이 수고하지도 않고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의 의로 그것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애쓴 삶이 하나님 앞에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값없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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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하나의 종파(그것이 이단이냐 정통이냐를 떠나서)가 생길만큼 민감한 문제기도 하고, 또 기독교의 많은 교단들의 특징에서 주일(안식일이라고 주장)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제 4계명이 말씀하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지키는 것일까요? 그리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또 어떤 것이고,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을 도출한다면 ‘왜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1. 무엇이 안식인가?

2.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인가?

3.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4.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무엇이 안식인가?



안식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이 안식한다는 것은 안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주일날 예배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서두르다가 가스를 잠그지 않고 렌지에 뭔가를 올려놓고 왔다고 한다면 안식이 되겠습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비록 몸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혹은 주일을 지킨다고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다고 안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황은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사람의 몸이 교회에 혹은 쉬는 장소에 있다고 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안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을 누리려면 안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람이 안식에 적합한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가 될 때 안식일까요? 그것에 답을 얻고자 한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 그러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니면 건강? 아니면 자식이나 가족 문제? 물론 그런 것은 상황에 따라 큰 걱정이기는 하지만 인류, 인생이라는 존재, the Man이 공통적으로 가진 근심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a problem입니다.


모든 인생,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가지게 되는 공통된 문제며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쉴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혹은 ‘왜 사는가?’하는 존재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평생을 들여 수고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이 인생의 목표, 즉 자신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겨 돈 버는 것에 집착하고, 그와 같이 어떤 이는 명예, 어떤 이는 자녀 특히 아들에게서 그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끊임없는 수고가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목적으로 또 삶의 의미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인생은 무(無)다.’라고 푸념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생을 산 사람은 안식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자기가 삶의 의미라고 여긴 것이 일순간 채워져서 만족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은 안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다시 문제에 빠지거나 돌아가지 않는 온전한 안식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라는 개념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칠일 째에 안식하신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존재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실 수 있게 한 창조는 다름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묘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은 바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은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이라 인정하는 존재가 나왔기 때문에 목적이 달성되었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안식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뜻을 세상이라는 형식을 표현하시겠다는 계획이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겠다는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곧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나올 때 비로소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말씀(계획)이 육신(형식)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안식하셨는데 그 일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기억하고 그 창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안식하심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안식할 수 있는 존재, 누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쉬신다면 그 존재도 당연히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어야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 아니 사람에게 어떤 근심이 해결되어야 안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자기 안에 분명해진 사람이어야 안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분명하게 밝아져서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바로 안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안식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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