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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을 마치면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8. 4. 09:27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을 이제 마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이라고 저자인 사도 요한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요한복음을 읽고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한 부분 부분을 두고 그것이 어떤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요한복음을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대하여 쓴 글 중에 수 없이 많이 언급한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요셉의 아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게 평범했던 예수, 목수의 아들이고 흠모할 것이 없으며, 건축자가 볼 때 버린 돌이며, 멸시 받고 천대를 받는 예수,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동일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너무 평범해서 그 행실이나 신분이나 가진 것으로 볼 때 어느 것 하나 경쟁력이 세상의 최고인 것 없는 그런 인생들, 그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보이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면 요한복음 아니라 어떤 성경도 읽고서 그렇게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을 믿지 않는데 괜시리 인생을 허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은 너무 위대해졌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소위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이 세상의 경쟁력이 뛰어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 받고, 천대 받고,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는데, 지금은 세상의 경쟁방식에서 이긴 자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고 가르치고 그렇게 기도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과 가르침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의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사도와 동일한 목적으로 이 요한복음에 대하여 포스팅 해 왔습니다. 이는 지금도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반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바로 알고자 하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르침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은 상태로 접하실 수 있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시간, 달력의 시간으로 지금이 AD(주후)의 시간이고 그 시간대를 살고 있으니 마냥 지금이 신약의 시대 곧 복음의 시대이고, 4복음서와 신약의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그 기록한 목적이 이 세대에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AD 3,000를 살고 있어도 자기 안에 예수님이 오신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구약시대의 사람이고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사람입니다. 천지가 달리 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려야 천지가 창조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신약의 시대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대로 복음을 이야기해야할 이유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이나 또 신약의 성경이 오늘 자신의 육신이 AD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자신에게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그만한 낭패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인생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데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보다 더한 낭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시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인생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은 그것을 보는 모든 인생 역시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순종하고 믿게 하려 하심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추하고 연약하고 심지어 그 마음에서 늘 악한 것만 나오는 이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아들로 부르심을 받기 위한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과 같이 자신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모르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생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과 같은 생명을 가졌기에 그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오늘 이 땅에서 해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즉 인생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이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돌아보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문장력이기에 마음에 있는 것을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해서 스스로 약 올라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비단 요한복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포스팅시 느끼는 것입니다. 살펴보면 오탈자는 물론이고, 문맥을 흩트리는 조사나 접속사도 많습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고치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의 시대적 설명이나 단어 또 사건의 전말에 대한 해석이 부족하거나 심지어 틀렸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기준은 신학이라는 점에서 저는 자유합니다. 신학이라는 것 그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고백이지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한 의로움을 가지게 된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이지, 성경을 객관적으로 또 알고리즘 상 서로 상충되지 않게 해석하는 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청이가 빠진 바다가 인당수든 동해나 서해 바다든 심지어 그것이 갈릴리 바다라고 해서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청전을 기록한 이의 의와 뜻이 잘 전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효자가 되는 것, 그것이 고백이지 학문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객관적으로 또한 일반화된 이론에 기대어 풀어가는 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기에 때로 성경에 대하여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접근이 틀렸다고 해서 제가 쓴 글에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국어적으로 잘 풀어내지 못한 것은 제가 그 만큼 잘 알지 못하거나 또 잘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라는 점은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 자리를 빌어 양해를 구합니다.


저에게 요한복음은 아주 깊은 감명을 준 말씀입니다. 특히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이 한 마디로 그날까지 알고 있었던 신앙의 체계가 다니엘의 환상 속의 동상을 산산조각 낸 돌맹이 하나와 같이 다가와서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기에 그것을 전하시려고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셨고 나 같은 인생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살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나누고자 했는데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이어서, 쓰다 쉬고 또 그러고 있는 창세기를 비롯해서 로마서 그리고 십계명 등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욥기와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들도 포스팅 할 계획입니다. 그 중에서 로마서와 십계명은 제가 육성으로 녹음을 해서 보내드리고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메일을 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만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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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세 번의 질문과 대답 후에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신 내용이다.


이 말씀은 아쉽게도 원어적인 이해가 필요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셨는데 그 중에서 먼저 하신 두 번의 질문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Agape’이고, 마지막 세 번째에는 ‘Philia’라는 단어라고 한다. 반면에 베드로의 대답 속에 있는 사랑은 모두 ‘Philia’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두 번 먼저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 두 번의 질문에 자신은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을 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시고자 마지막에는 “네가 나를 필리아, 곧 친구처럼 사랑했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을 한 것이다.


이 대화는 아주 묘하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라 여길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물으신 아가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느냐는 물음에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너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 안에서 나를 보고 사랑했느냐?”라고 물으시니 베드로는 “그것이 아니라 세상의 안목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라고 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그 관계와 의미로서 예수님을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모습을 보면 ‘저 예수님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계집종이 물을 때에 그렇게 답을 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어부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그런 안목과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자기 죄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어떤 안목으로 봤는지를 고백하고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 예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잔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베드로가 알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이것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마지막 교정? 아니면 화룡점정, 그것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나다나엘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믿었고,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그런 생각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변화 없는 그들의 마음이 이끈 대로 자기 육신이 먹고 사는 일로 돌아가 버린 그들에게 찾아 오셔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한 마디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의 버전으로 하면, “너희 몸은 산제사로 드려라”가 될 것이다. “너의 삶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것이다. 인생에게 가장 바른 것,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그 뜻 안으로 너의 삶을 던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가페의 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는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사랑이니 그 사랑 안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 관계가 바로 바다 같은 세상에 떠 있는 배와 같은 인생에게 가장 바른 것(오른편)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 앞에 제자들은 “주님이시다”고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주 앉아서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다. “네가 나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관계있는 존재로 여겼느냐?”고, 그랬더니 베드로는(사실 모든 제자들은) “주님 그것이 아니라 저는 예수님을 인생의 안목으로 봤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인생의 안목과 하나님의 안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이제 베드로는 이전에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왜 저러고 계시는가?” 의문에 빠졌던 베드로가 아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 존재인지,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지(어떤 사랑과 안목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바라던 것, 제자들이 하나님의 안목을 알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를 바라신 예수님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상호 간에 온전해 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뜻 하신대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대신하는 그리스도가 되었고,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로 갈 수 있고 제자들이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부활 바로 이후에는 이런 관계가 아니어서 만지지 말라고 하심)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면서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어야 실체로 보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존재로서 또 사실과 진리로 여겼던 안목을 가졌기에 그런 물질세계가 풍성해지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던 안목을 가졌기에 예수님조차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필리아(친구간의 사랑)로 보던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이 어떤 차이인지를 알게 되는 것, 여기서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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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부 알아보지 못했다.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세 번째라고 하고 있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알지 못해서 자기 생업을 찾아 떠났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오셨다.


요한복음 뿐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 21장에서도 고기 잡는 제자들이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거리상의 문제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는 단순히 거리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무덤에서는 아예 몰라 봤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금방 알아볼 수 없게 한 제자들의 안목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일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품속에 있는 의가 형상을 가진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 나타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아직도 땅에 계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 살 길을 찾아 갔다. 육신의 안목,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고 기대했던 그들의 안목과 가치관이 아직 남아 있기에 육신의 문제에 자기 삶이 회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볼까 생각했다.


신앙이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이 육신을 사용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존재로서 인생을 살 것인가?’하는 것이다. How는 What이 정해지면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며 어떤 존재인지만 정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는 자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혈연관계도 서로가 원수로 관계를 정리하고 나면 천하에 그런 싸움이 없다 싶은 싸움과 다툼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설명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 보이신 내용인즉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육신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즉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같이 육신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지 보이신 것이다. 육신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육신을 사용하는 법이고 육신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종과 같이 섬기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섬기는 자리에 처했다는 것은 어떤 세계에 있어 패자가 되었거나 빚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종이 되어 어떤 가치, 어떤 법에 있어 주인인 존재나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셨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인생들, 그리고 그 가치관을 가진 자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가치관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신 것이다. 육신이란 그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즉 나의 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을 물리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세상의 가치관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또 종이 되어 그들 앞에서 종과 같이 섬기고 심지어 나의 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오직 그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을 향한 뜻이 나타나게 하시기 위함이고, 그렇게 될 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못 박았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이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 되는 법아래서 살면 그 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목적이고 뜻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도 육신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육신의 먹거리를 해결하고자 생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고기를 잡고 있으니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기를 잡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하지만 고기는 없었다. 즉 그 삶에는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육신을 소비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부에게 고기는 그 삶의 결실이다. 그들은 어부지만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은 그 직업이 무엇이라도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소득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결실이란 얼마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와 생업이 어부였던 제자들이 육신의 삶을 떡으로 사는 것에 투자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을 하셨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그랬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 오른편은 바른 편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오른손으로 붙든다는 말씀은 하셔도 왼손은 언급도 않으셨다. 오른손은 바른 손이고, 오른편은 바른 곳에 던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여겨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바른 것으로 알고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먹을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봤다는 것이다. 일어난 일은 육신이 먹고 사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일인데, 어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업이 풍성해진 것일 뿐인데, 제자들은 이 일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택함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일이 나타났을 때에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것, 그것이다.


제자들이 그들의 경험에 의거하여 던진 그물에 잡히지 않았던 고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던졌더니 잡힌 것이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것이다. 바르다는 것은 존재가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바른 것이다. 세상의 물건을 보고 바르게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만든 이의 용도, 그것을 사용하고자 기획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 사용될 때 바르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또 소득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늘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라고 사람을 도우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도우시겠다는 것이다. 그 결정체가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봤다. 이것은 성경을 행위로 지키면 생업이 풍성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주시다!”라고 했다. 우리 모든 일에 있어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가지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로 사용하는 이가 바로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도구가 주인을 알아본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생업이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약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날 이후에 고기 잡을 때 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면서 죽을 때까지 어부로 살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이렇게 생업이 잘 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보는 대로 성경을 보는 병폐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떡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찾아와서 그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은 인생이 바뀐다. 자기 육신을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비하게 된다. 진정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아니 오른편의 삶, 바른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이 창조된 목적대로 살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묵상하는 것의 결국도 이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떡으로 살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육신을 오직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와 본질을 예수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이시고 주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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