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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초반에는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지겠는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육신의 할례가 유대인의 증거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책망하듯 말씀한 다음 유대인들의 나음에 대하여 말씀한 다음에 나온 말씀입니다.


이를 요약해보면 유대인들이 자기 육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서, 그렇다면 유대인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서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향이 있겠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의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변환한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1.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나님의 정체성이 훼손되는가?

  2.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누구의 유익인가?


1번 질문은 바울 사도의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정체성이나 성품이나 경영에 변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것 아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의 의사 결정을 변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성경을 읽고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은 자기가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이 성경대로 사는 것을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파생된 질문이지만 두 번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누구에게 유익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는 100%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해 주시는 신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유익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그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어 누리는 유일한 유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 전부이기에 그것이 모든 것이고, 모든 유익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들은 다 자기 육신의 삶이 세상의 기준에서 잘 되는 것을 구합니다. 부자가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고, 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고, 자식이 잘 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뻔뻔하게 그런 것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그런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실까 생각을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지켜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생각한 그 생각대로 열심히 공로를 쌓습니다. 그것이 모두 율법에 관한 것이고, 형식이고 외식인 것을 망각합니다. 그리고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와 같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의 행동, 육신의 어떠함을 늘 단련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각기 하는데 그 <이렇게>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 다 다른 것입니다. 같은 것을 두고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이 언어가 달라진 것입니다.


세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침례’가 온전한 것이라면서 성경도 다 고쳐서 침례라고 기록하고, 어떤 이들은 ‘아니다 그저 물로 안수만 하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언어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사람이 자기 행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생각해낸 하나님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뜻과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도 신앙은 온전해집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은 그 안목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자기 육신의 일이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이나 하는 신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내용이고 본질이시고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은 그 형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변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방향은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사람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하나님이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겉을 바꾼다고 속이 바뀌지 않습니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 내용, 그 의(도)가 표현된 것입니다. 신앙적인 모든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생명으로 있으면 그 생명이 본성대로 행동하게 되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 성경의 모든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알면 성경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으려면 주일 성수해야 하고 십일조 해야 하고 성경 봐야 하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고 그렇게 행동 강령처럼 신앙을 규정하는 것은 모두 내용이 아니라 겉에 보이는 육신의 것, 형식을 본질로 아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들도 로마의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했고, 오늘날은 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If you believe Jesus, you have to do.)’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이렇다는 것에서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 큰일은 다른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삶에 불행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의 일, 형식에 관한 것을 본질로 여기시는 신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당시의 유대인들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동일한 믿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떠함에 흔들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라는 육신(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 관계고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육신의 혈통이나, 육신의 할례나, 또 십일조를 내는 행위나, 주일날 대예배에 꼭 가야한다고 하는 것이나,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 믿는 신앙을 규정하는 기준을 삼으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만 전하면 행동은 알아서 바뀝니다. 생명이 거듭나면 당연히 거듭난 생명의 유전자와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이 행동으로 어떻게 속을 바꾸거나 하나님의 뜻과 의롭게 여기심을 바꾸려 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그리스도의 성품만 있으면 성경은 다 지켜지게 됩니다.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그 마음에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그 본성대로 사는데 어떻게 성경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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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에서 3장 8절까지는 유대인과 율법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복음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 생각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복음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시대의 그런 생각과 평생을 다투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런 생각을 심히 경계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을까요? 지금도 그런 생각은 넘쳐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좀 다녀볼까 생각을 하다가도, 십일조, 주일 성수, 제사, 교회 봉사 등등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교회에 다니는 증거로 삼는 많은 행위들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만두기 일쑤입니다. 또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그런 것들을 누가 더 잘하느냐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자신이 형편이 되어서 잘 따라갈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그것이 아니면 그런 것들은 아주 힘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당시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신앙을 가지려 할 때 너무나 큰 장벽이었듯, 지금도 교회에 다니려면 이런 저런 것을 해야 한다(have to do)는 것들이 또한 큰 장벽입니다. 그리고 이런 장벽들은 모두 사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고, 육신을 가진 사람의 형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모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단순히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당시의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책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외모와 행위와 그 공로에 관한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자꾸 자신들의 행위와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것과 논쟁하고 그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바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볼 때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이 있기만 하면 육신이라는 형식은 그 생명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표현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은 외면하고 자꾸 육신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니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어려워하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방향이 반대라서 그렇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요, 자신의 존재 이유요, 삶의 목적이 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나타날 텐데 그와 반대로 자기 육신을 다스리고 바꾸고 또 노력하고 힘써서 그 마음과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들과 또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릇된 신앙으로 가고 있는 것이 또한 그것입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자꾸 행함과 육신이라는 형식을 바꾸어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유대인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그것이 표현되는 모습, 곧 사람의 삶이 어떠한지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그것을 행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해 본다면, 먼저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서 나타난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표현한 것이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법이 있습니다. 사람 마음 안에(속사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농부가 뿌린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생명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자기 운명이고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으로 생명이 되어 사는데 그 삶이 예수님을 설명하는 성경과 같아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하나님의 법을 반대로 접근하니 힘든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되는데, 그 나라와 그 의가 표현된 형식과 행동을 몸으로 지켜내어 의에 이르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이 유대인들과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 힘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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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늘 신앙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신앙이 학문이 되어 신학이라는 것이 생겼겠습니까? 제가 늘 “신앙이 왜 학문이 되었느냐?”며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신앙은 의문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主)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명에 관한 것이기에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자기 본성으로 사는 것을 학습하거나 의문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함이라(롬 2:29 상)

진정한 유대인은 육신에 할례를 받았지만 늘 신앙에 의문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 곧 속사람에 유대인이라는 증거인 신령한 영이 있어 의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가기 전에는 ‘군에 가면 하루 종일 뭐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이라는 세계가 제게는 없는 것이기에 그런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에 다녀 온 이후에는 그런 의문은 없어졌습니다. 제 안에 군대라는 할례, 곧 군인이라는 정체성이 증거로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가지려해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포경수술입니다. 남성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시간만 끌다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다음에 얻은 아들 이삭의 후손이어야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께서 약속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껍질 곧 외모와 육신의 어떠함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심입니다. 그것이 할례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서 그것이 아들로 나타나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의 증거가 바로 할례인데, 유대인들은 반대로 할례라는 형식의 증거가 하나님 앞에 의로움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마음에 눈에 보이는 형식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이면적 곧 본질적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육신에 할례를 받음이 곧 의로움이라는 착각에 빠졌고,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의를 할례를 표현하셨는데, 오히려 외모가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속에서 밖으로 향하는 믿음이 아니라, 겉을 바꾸어 속으로 향하고 본질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너무 의문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모든 본질은 속사람에게 있는데 속은 어떤지 모르면서 겉만 어떻게 하면 속이 바뀐다고 여기니 얼마나 의문스러운 것이 많겠습니까?


자꾸 군대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내무반에 갓 들어온 신병이 처음 휴가 갈 때면 고참들이 군복을 2,3일씩 반복적으로 다려주고, 군화도 정말 공들여서 광을 내어서 입히고 신겨서 휴가를 내보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참들이 며칠씩 수고해서 입히고 신겨도 별로 멋이 없습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말년 병장은 대충 군복 빨아서 뚝뚝 털어서 단추 풀어헤치고 입고 있어도 군인의 멋이 납니다. 그게 정말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군복 속에 있는 몸이 군인으로 내공이 쌓여서 그렇습니다. 속이 늘 겉보다는 우선입니다.


그렇듯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수고도 필요 없고 의문스럽지 않습니다. 어린 병아리가 마당에 놀다가 꿩이 날아가면 놀라기는 해도 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가 날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숨습니다. 왜 숨어야하는지, 아니면 엄마 닭으로부터 위험한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책으로 배워서가 아닙니다. 자기 본성이 그래서 그냥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병아리를 볼 때 왜 그러는지를 알려면 의문이 있고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는 병아리의 유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율법과 성경의 모든 말씀과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 그 어느 것도 절대로 행동강령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대로 행동하면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이루어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본성적 행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에 성령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에 의문이 있습니까? 공부가 필요합니까? 그냥 사과나무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도 배가 열리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음과 같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무한히 말씀하시는 그 의가 있으면 그 모든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과나무가 배를 맺을 수 없듯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것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의문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의문이 있다면 단 한 가지만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왜 생명의 세계에 이런 의문이 있는가?’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하물며 학문이 필요하겠습니까?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에는 의문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할례 곧 율법의 목적이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한 의문이 없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데 어디서 의문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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