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요한복음 20:19-23) 죄를 사하는 권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5. 12:24 Writer : 김홍덕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모여서는 문을 닫은 채로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그런 일을 행하리라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죽었는데 부활하신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강은 ‘에이레네(Eirene)’ 라는 말이다. 이는 ‘가까이 부르다.’는 뜻이다. 즉 옆에 불러서 부르신 이와 함께 부르신 이와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자리(정체성)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신 분이시니 그 예수님과 같은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평강이 있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해를 당할까 하여 문들 닫고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닫힌 문 가운데로 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숨을 내 쉬시며 영이 아니라 육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성령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신비한 영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령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심 같이 성령이 사람의 심령에 오시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어 예수님과 같은 안목,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 가까이,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또 같은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에 가까이 부르셔서 평강이 있으라 하시고 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죄라도 사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는 지와 같은 법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시므로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보면 그 예수님의 이미지와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안에 땅에 씨가 뿌려짐과 같이 들어오게 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이시고 또 사람 마음 안에 들어온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는 법으로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님의 육신이 되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 모습이 자기 안에 들어온 사람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다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이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 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듯이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사람의 정체성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알게 된 사람이 육신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 아들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저것이 내 삶의 존재 목적이고, 인생의 정체성이다!’라고 깨닫게 되는 사람은 그 마음 안에 성령의 감동이 있게 되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심과 같이 그 감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죄가 사하여 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가 사하여 지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삼일 째 되는 날에 제자들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는데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는 잘 개어져 있을 뿐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때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안을 보니 천사 둘이 서 있었는데 그 천사들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함입니다.”라고 답하고 돌아서 보니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예수님이 살아나실 것이란 기대를 가졌을 정도로 사모한 예수님께서 옆에 서 계신데도 몰라 봤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모하면 꿈에서도 보이건만, 직접 마주하고 있는데도 몰라봤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답하기를 랍오니 곧 “선생이여”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 까지 하시고 또 부활까지 하셨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일이 덜 끝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이제 곧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 하신 것을 보면 이제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아직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과 이제 올라간다는 사이에 있는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시는 제자들이 아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에 조건이 있다면, 아니 올라가시기 전에 있어야 할 일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 역시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직 그 제자들의 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신 모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이 되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컬어 “형제”라고 하신 것은 주목해야 한다. 예수 안에 한 형제자매라는 상용구에 현혹되어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형제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듯 제자들도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가서 “형제들에게”라고 하신 것은 이제 그들이 형제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로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그들의 아버지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것을 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다르다고 해서 본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휴지보다 못하다. 휴지는 흘린 국물 닦는 것에라도 쓰지만 내 돈 아닌 돈은 쓰면 쓸수록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나, 그리스도이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모든 일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있으니 그 능력을 내게 베푸실 것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으려면 예수님의 능력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음이고 성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의 그런 능력을 내가 혜택으로 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없고, 내가 예수님과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먹일 수 없는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은 21세기 과학이 우주선을 우주로 보낸다는 것에 환호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것에 아무리 환호해도 내가 우주선을 타고 올라갈 수 없다면 별반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런 뉴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우주선을 쏘는 비용을 간접적으로 대고 있을 뿐이지.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고 하나님이었다면 우리의 아버지와 하나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잘 주실 것인지를 신앙하는 것은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 믿어지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엠마오로 떠나기도 했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아직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된 것은 성령이 오신 이후의 일이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또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고, 또 예수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시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아니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결국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께로 가셔도 이 땅에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살도록 하시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생이란 그러라고 사는 것이니 삶의 의미와 목적이 회복되었는데 인생에게 있어 그보다 더한 유익은 없는 것이다.


그 제자들도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시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의 왕이 되리라 생각했고, 예수님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질 수 없었다.(만진다는 것은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사 때 제물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는 것과 같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오심이고, 이 모든 것은 제자들에게 유익인 일인 것이고,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무엇보다 이것은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며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들도 예수님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하나님,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존재의 신 여호와가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과 아버지가 같은 형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복음 20:1-10)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2. 14:4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차별성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둘 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가 더 우월하여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는 차별성과 경쟁력으로 해석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도 너무 놀랍고 중요한 것이지만, 더 핵심적은 것은 부활의 원인과 과정이다. 어떤 죽음을 당한 사람이 어떤 이유로 부활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핵심이다.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그 믿음의 목적과 정체성에 무관하게 다 부활 신앙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믿음의 목적이 어떻게 다르겠는가? 다 구원이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믿음의 목적이 같다면 교회가 왜 나누어지고, 교단은 왜 여러 개며 한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왜 다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목적이 같은데 다툴 이유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부활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아무 죽음이나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어야 부활을 맛보는 것이지, 믿음의 목적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사람에게 부활은 없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치고,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랜드 마크에 해당하는 큰 교회를 일구었거나, 또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해도 미안하지만 부활은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을 제대로 보면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시는 것은 죽기 전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심으로 다시 살리시는 것이 아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기 전이나 가진 다음이나 믿음의 정체성이 같다면 굳이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부활 신앙 이전에도 하나님께 먹을 것 마실 것을 구했는데 부활한 다음에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사람은 다시 살아났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것이지, 교회에 가서 세상사는 문제를 구하는 것에 있어 부활 신앙을 믿으면 더 잘 이루어주신다는 생각으로 레벨 업 하듯 부활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을 당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전의 어떤 죽음 하나와도 같지 않은 전혀 다른 죽음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장사된 바 없는 묘실에 장사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살다가 죽은 죽음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는 없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라고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었더니 그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고 소유와 공로에 대하여 소망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다 죽은 사람, 하나님의 의를 나누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주셨는데 세상의 가치관대로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가 있는 삶도 죽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죽음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을 이유가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진정으로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모습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 죽음 가운데 행여 있으려 해도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순리대로 살리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산 것으로 보시고 또 무엇을 죽은 것으로 보시는 지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이면 자신의 육신이 살았다고 해도 죽은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이 죽여도 하나님은 살리시고 생명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고, 살아서 믿는다면 영원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 안에서 사람이 살면 그 사람이 어떤 죽음을 당하든지 산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벗어났다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목숨을 드려서 지켰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그 삶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살았다고 하나 오히려 죽은 것이고, 예수님은 죽였지만 살아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 죽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볼 때는 죽어야 하는 것이고, 또 그들 눈에 예수님은 죽은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이 바로 회칠한 무덤과 같이 몸은 살았으나 죽은 자들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진정으로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숙명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죽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산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죽음은 살아야 하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임을 표현하시니 육신이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아무 죽음이나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당한 사람이어야 누리는 은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앞에서 너무나 많이 이야기했듯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죽여 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저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심판에 의하여 죽으신 것이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아들이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며, 그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죽게 되는 사람이다. 바로 그런 죽음,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생명으로 있는 사람인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죽을 죄인이 되어 죽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바로 그런 죽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난 하나님 아들의 삶을 사는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패자가 되고 죄인이 된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죽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고 성품이기에 그 사람을 살리시는 것,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부끄럽고 하찮은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연단하고 절제하고 금욕해야 하나님의 의에 이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 하찮은 인생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너무 좋은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좋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니 너무 쉽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본다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 아들로서 드러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니 당연히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고 부끄럽고 연약한 이 모습은 언제나 세상 앞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하신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이 나타나는 조건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죄인이 되는 상황ㅇ이 조성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 사람이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사람인 자신도 그것이 자기의 운명이고 존재하는 목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획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자신을 붙잡으러 온 군사를 물리칠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듯,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고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 가려는 사람도 그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는 죽음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살았다고 하시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이 아닌 다른 죽음을 당한 이는 하나님의 부활을 맛볼 수 없다.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을 심판할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다’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식의 반응을 하고, 영화 <밀양>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니 세상에 사과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세상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죽음을 당한 자는 십자가의 부활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닌데 어떻게 십자가의 부활이 있겠는가?


부활은 모든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어떤 죽음에 있어 다시 사는 것이다.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심판할 때에 그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이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때 맞서는 것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니 부활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신념을 다해서 믿으려 애써도 헛힘 쓰는 것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하나님 아들을 살리시는 일이다. 살리심도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지셨기에 하늘의 군사로 십자가를 물리치시지 않음과 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과 의 안에서는 십자가의 죽음만이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바로 십자가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이 선히 여기신 창조물인 사람을 심판할 때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이 나타나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만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사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