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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니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에게 여자의 운명을 바꿀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난 다음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 특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시니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과 우슬초에 적셔서 예수님의 입에 대니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다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의 마지막 마침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신포도주를 받으시고는 이미 다 이루었음을 아시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포도주는 로마 군인들이 마시는 포도주라고 한다. 이 신포도주는 포도주에 물과 계란을 섞어서 만든 것이고 포스카(posca)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 포도주는 유대인들의 제사에 사용되지 않는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마시는 포도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늬만 하나님의 아들이었듯 포도주도 무늬만 포도주인 것을 예수님께 드린 것이다. 한 마디로 격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외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군병들이 신 포도주를 장면에 대하여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의 일환으로 기록되어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신포도주를 주었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께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군병들이 마시는 포도주로 대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 와 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목마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순종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도 그것이고, 또 목마르신 것도 그것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에 있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다 하셨음이고, 목이 마르다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남았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러 오신 예수님 사역의 총화다. 화룡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다 이루신 것이다. 광야에서 높이 들린 놋뱀의 역할은 들리는 것으로 다 이룬 것이고, 높이 들린 목적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병이 나을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예수님으로 하실 일을 다 이루신 것이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예수님 사역의 목적까지 다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대접한 전후 순간에 밑에 있는 이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고백이 나왔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심을 조롱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하고, 또 정하지 않은 포도주로 대접함으로 예수님을 그저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치부했지만 사람들의 그런 관점과 대접이 오히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는 온전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대한 유대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고상해지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조롱을 받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됨이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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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그때 밑에는 요한사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엠마오로 가던 제자)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라고 말씀을 하셨다. 자기 모친을 보고서 죽어가는 마당에 “여자여”라니. 상식적인 표현은 아니다.


이 말씀은 다소 알레고리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한정되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여자는 육신으로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모든 인생을 향하신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은 여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랑되시는 주님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잉태하여 내는 거듭난 존재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인데, 그 정체성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또 여자의 삶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남존여비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면 성경을 글자대로 읽은 외식하는 사람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한 사람에게 특정하게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우리 모든 인류를 향하신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역시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여성의 격을 가진 인생이 낳아야 하는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아 내가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낳아야 하는, 사람의 생명이 거듭나야 하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모든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새 생명을 자기 안에서 낳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볼 때는 사형수와 같은 죄인인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한다. 아니 교회에 다니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마음만 먹고 신념을 가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그 생명의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거위 아버지에 펜더 곰 아들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된 예수님을 아들이라 칭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가지신 뜻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연상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셨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연상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함을 모친 마리아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받아 주시는 존재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시인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가서 육신이 세상을 살 동안 필요로 하는 것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들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지금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대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의인이 되는 사람을 아들로 삼으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본질이 아니고,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뜻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인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필요하면 먹고 마시게 하실 것이고, 그 일에 대한 수고가 끝나면 하나님의 의(義)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 되는 유일한 법이고 의다.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면서 모든 인생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아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심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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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군병, 곧 군인은 누구인가? 군인은 나라 권력의 상징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가 추구하는 의를 집행하고 표현하고 나타내는 존재가 군인이다. 그런 군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세상의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의로움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거나 세상의 왕이 되려면 육신으로 이룬 공적이 있고 또 그 지위에 걸 맞는 소유-혈통이나 재물이나 배경이나 신분-가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의로움이다. 즉 소유와 공로, Do와 Have에 관하여 이룬 것이 있어야 의로워지는 세계가 바로 세상의 가치관이다. 그 세상의 군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세상의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신분을 상징하기도 하고 광야에서 사는 그들에게 옷 이상으로 이불과 같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형편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으셨던 겉옷은 붉은 옷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것을 입혔다. 예수님께서 왕이라고 하는 것을 조롱하기 위하여 홍포를 입힌 것이다. 그 옷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신분을 나타내고, 또 나름의 기능을 가진 옷인데 그것을 찢어 버리면 소용이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비웃고자 붉은 옷을 입혔다가 그것을 찢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예수님을 그렇게 조롱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붉은 색의 옷이다. 성경에서 붉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의미한다. 아담이라는 말의 의도 ‘붉다.’, ‘사람’이라는 의미다. 붉은 옷을 입히고 그것을 찢어버린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고서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하는 조롱의 표현이다. 왕이라 하니 붉은 옷을 입혔다.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어떻게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찢은 것은 그런 꼴로는 왕이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이 사람의 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려 하면 그것을 죄로 삼는다. 교양 없고 무식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겉옷, 곧 사회적인 신분이 잘 갖추어질수록 사람답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면 감출수록 의롭게 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이 부끄러워 입었던 무화과, 곧 율법-사람이 행동으로 지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모든 법-으로 가리려 해도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아담의 옷을 삼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사람이 덧입어야 부끄러운 것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것이 가려진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는 안목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존재 정체성을 가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기는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짓는 유일하고 가장 큰 죄이기 때문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유대인들과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찢은 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의 육신을 찢는 것과 같다. 즉 십자가에 못 박는 가치관이나 예수님의 겉옷을 찢는 것은 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마음에 가진 의가 같으면 여러 가지 행동으로 나타나도 결국은 그 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속옷은 찢어지지 않았다. 겉옷이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면 속옷은 사람 안에 있는 의를 나타낸다. 겉옷이 형식이라면 속옷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 상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예수님의 의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의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이 우리 사람에게 복음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든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고 표현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인)로서 살아가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은 찢어지듯이 헌신되어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소비되고 소진되는 것이나, 우리의 의는 찢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우리 삶의 본질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육신의 삶은 겉옷이 찢어지듯 상하고 훼손되듯 소비되어질 때 비로소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육신이 상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것은 자기 육신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고 사용하며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믿음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로 아는 사람이 그 육신을 타락한 것에 소비할 이유도 여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만 있으면 성경은 어길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십자가가 뭔지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를 아는데 삶을 방탕하게 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기 육신이 어떤 목적 아래 있는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이 생명의 유전자와 같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부인데 삶과 육신의 어떤 부분이 타락한 삶을 살고 성경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법도, 그럴 존재도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겉옷이 찢기시듯 육신은 찢기셨다. 우리 삶도 그렇다. 이 육신이 주를 위하여 사는 것에 귀찮을 이유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다.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목적은 보내신 이에게 있는데 누구 맘대로 아까워하고, 누구 맘대로 자기 육신이 찢어지듯 주를 위하여 소비되는 것을 귀찮아한단 말인가? 우리 삶도 예수님과 같이 찢기듯 소비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비록 겉옷은 찢기듯 하여도 그 안에 있는 의는 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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