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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예수님께 죄를 찾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비록 반역에 해당하는 말을 하시긴 했지만 빌라도가 볼 때는 그 꼴로는 왕은 고사하고 동장도 힘들다고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린 배신자였다.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에 유대인들은 ‘이제 우리가 로마의 속국을 벗어나고, 또 가난도 벗고 많은 사회 문제도 해결되겠구나!’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해방의 상징인 유월절에 그들의 심장인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며 한껏 찬양했건만 왕은 고사하고 스스로 십자가를 진다고 하고 제자가 팔아버린 초라한 꼴로 잡혀 있는 예수님은 진정 배신의 아이콘이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에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인식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목적을 본 것이 아니라 현상을 본질로 보았다. 그들이 율법을 지켜 의로워진다고 생각한 것과 같이.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이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여겼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으로 오신 것이라 믿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아래까지 이어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을 하신 이후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같은 단서가 붙어 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리고는 돌로 쩍을 만들라고 했고,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 했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이 본질인지도 시험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지금, 한편으로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유대인들을 비난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그때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 입을 것에 속한 세상에서의 재물과 경제적인 문제, 시험이나 결혼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구하고 기도하며 그런 육신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서 찾고 있다. 2,00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이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면 속이 바뀌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 늘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신앙이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신앙이다.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나 도적이 아니라 열심당원의 지도자로서 폭동을 도모했거나 일으킨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신자로 여긴 것과는 반대로 바라바라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할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바라바를 원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선택이 그랬듯,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해결을 의지할 메시아로 믿는 것은 바라바를 선택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 아니 어느 민족이라도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속국으로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고, 그 꿈을 이루어줄 구원자,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런 기대를 가지게 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보게 한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을 보면서 ‘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바라 본 것이다. 오늘 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내용처럼.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착각이고 유대인들의 가치관이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맘대로 육신의 문제나 해결하는 신으로 망령되이 일컬은 것이다. 마치 공산국가들도 나라 이름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면 민주주의를 붙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그 말씀과 의를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신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가진 기대, 자기가 스스로 예수님께서 정치적 독립과 육신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정의한 예수님을 정의 내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힘없이 끌려가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죽어가고 있으니 그 마음이 사기 당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는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와 같다.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사는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어놓고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바라바와 예수님 둘 중에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소리치며 바라바를 선택했던 것이다. 육신으로 민중해발 운동을 하는 것이 자기들의 생각과 기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유대인들의 선택은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간택되고 있다. 그렇게 비난하는 바라바를 늘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교회를 찾았다가도 결국은 인생은 먹고 사는 문제가 잘 풀려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인생의 풍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그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인생의 먹을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 표현할 분량이 크면 삶이 풍요해질 수 있는 것이지, 가난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늘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는 증거는 아주 간단한 곳에 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지를 보면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육신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존재로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나,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나 마음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는 것, 마시는 것, 또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런 모든 문제의 근원에 대한 답 곧 빛을 비추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바로 왜 사는지 모르는 어두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두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두움을 밝히시려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바라바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 같은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우리 모든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인생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의미를 알게 하시고 왜 사는지도 모르는 흑암에 비취신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서 돈 주세요 밥 주세요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기도다. 하나님이란 창고지기에게 잘 보여서 자기 필요한 것 얻어가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신앙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다. 믿음이란 관계가 성립되어 시작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라바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또 지금 왜 사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육신의 문제 해결에 매몰된 안목을 물리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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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파일 발송 안내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7. 10. 13:00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김홍덕입니다.


어제 있었던 대전 모임에서 전한 십계명 말씀을 녹음을 했습니다.

전문적인 장비는 아니고 스마트폰을 이용한 녹음이지만 

듣기에 영 불편한 음질은 아닙니다.


파일을 원하시는 분은 저에게 메일로 연락을 주시면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블로그에서 사용하는 gmail은 파일 첨부가 용이하지 않아, 네이버에서 발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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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12-40) 이 세상과 내 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9. 09:06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사형을 받으시는 죄목은 크게 두 가지다. 아니 그것이 전부다. 하나는 신성모독이고 또 하나는 반역죄다. 이 세상에 임금이 버젓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나라인 유대의 왕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대신한 총독이 와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라고 하시니 이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목수의 아들, 초라한 몰골로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지내고 밥을 먹던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는 물론이고 웬만한 중산층과 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 용납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인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는 사회의 문제아였고 죄인이었다. 그런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신성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것이 첫 번째 죄목이었다. 바로 신성모독이었다. 그런데 이 죄목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죽어야 할 죄지 로마의 법으로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아니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인 상태에서 사람을 죽일 권한조차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보낸 것이다. 빌라도가 아니면 예수님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과는 질문 자체가 달랐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은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까 아니었다. 그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이 “네 안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냐?”고 물으신다. 이는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와 같은 질문이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보냈으니 묻는 말이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면 “네가 왕이냐?”는 빌라도의 말에 다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니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답하지 않으신다. 진리는 예수님이 의미가 없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이 같고 생명이 같은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예수님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말로만 바라보는 빌라도에게 있어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핵심은 나라에 관한 것이다. 빌라도는 자기가 본질로 보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으로서 예수가 반란을 꾀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빌라도가 보고 있는 세상이 예수님이 왕이신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하셨다는 죄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생각한다. 그 죄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 누구나 죄로 여기는 것들이다. 화를 내는 것, 욕하는 것, 사람을 미워하는 것, 심지어 때리고 죽이는 것,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나 훔치는 것, 음란한 마음과 때로 그 마음을 실천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에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지 못한 것을 약간 더한다. 예수님께서 사하신 죄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먼저 이것을 생각해 보자. 죄가 성립하려면 가장 먼저 법이 있어야 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 그리고 법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존재하려면 나라와 사회가 먼저 있어야 한다. 나라가 가진 의로움을 기준으로 법이 생기고, 사회와 세상이 가진 의로움을 바탕으로 법이 생긴다. 그 법이 앞에서 열거한 것을 모두 법으로 규정하고 있고, 사람들이 그 법 아래에 있으므로 그 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 법을 어길 때 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고 도적질하고 음란한 것과 같은 것은 어디에 속한 법을 어긴 죄인가? 그것은 세상에 속한 법이다. 물론 하나님의 법도 그런 것을 죄로 여기시지만 하나님은 그 행위 자체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런 범죄를 죄로 보시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에 죄로 보시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대로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을 욕하거나 미워하고 심지어 때리고 죽이는 이유는 사람 안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은데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각이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자신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에 대하여 자기 맘대로 선하고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된 마음이다. 그 기준이 설사 성경에 있는 것이라 해도 다를 게 없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 하는 이를 책망하셨다. 선은 오직 하나님 그 분 자체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은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다. ‘그건 당연하지!’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다르면 법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의 죄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법에 속했으니 당연히 그의 세상도 이 세상이다. 즉 빌라도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회개를 한답시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에서 죄로 여기는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는 것이다. 행동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행동을 죄로 여겨 그 죄를 예수님께 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나라, 유대는 이스라엘이라는 육신의 혈통을 따른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다는 ‘찬송’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유대고 이스라엘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은 이 땅의 법에 의하여 죄를 심판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나라,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의가 그 사람을 다스리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는 빌라도의 법, 애굽의 법, 사람의 행동을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그 나라는 행동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존재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나라다. 행동은 어디까지나 존재의 표현일 뿐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도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자동차의 본질은 차체가 아니라 이동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사함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 곧 가이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범칙금을 내야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교회에 대신 헌금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육신의 행동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가 되는 것을 죄의 본질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세계, 애굽의 세계d에 속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즉 사람의 행동 자체가 법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가 모든 의의 핵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나를 왕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의 말이냐?’고 물으신 것이 그것이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왕인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행위는 관계가 정해지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존재가 정해지면 모든 용법도 정해진다. 그것이 존재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만 정해지면 모든 것이 다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거나 이야기할 죄는 오직 그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인,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존재 정체성, 그것 하나만 정해지면 된다. 그것 외에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 


그것 하나가 잘못되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니 육신이 속한 세계가 죄로 여기는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며, 내가 선하게 여기는 대로 해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 그 선악과를 먹은 것 하나가 인류의 모든 죄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해결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 육신이 지은 죄는 그냥 세상의 법에 따라 살면 된다. 법규 어기면 범칙금 내고, 행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법에 따라 벌을 받거나 배상하면 된다.(물론 그 속사람이 선악의 기준이 없는 상태라면 그러기 힘들겠지만)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의 백성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육신이 범한 죄를 하나님께 회개한 근본적인 죄로 볼 것이 아니다.


어쩌면 빌라도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법에 관해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놓아주려 노력한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법은 예수님을 기어코 죄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세상이 의롭게 여기는 기준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가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모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법으로 심판하고 죽일 때 왕성해지는 나라라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서 죽으면 풍성해지는 생명의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노라하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하나님이 내용이 되시고 육신을 가진 자기 인생은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라는 아는 것만 해결되면 된다. 그것이 해결 되지 않은 상태 그 하나만 하나님 앞에 죄다. 그것이 유일한 죄다. 그러나 그것 하나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죄를 낳는다. 세상은 늘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요란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살인이 일어나지, ‘내가 죄인이요!’라는 사람 때문에 소란스러워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행동으로 지은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육신이 속한 세계의 법에 따른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하나님을 믿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아니지만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으셨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법에서도 무관하고 사함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법이 자기 의의 본질인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이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의인이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으면 죄인이다. 이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와 본성의 문제고 그 사람의 존재 정체성의 문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 육신이 이 세상에 속하므로 세상의 법으로 육신이 죄인이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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