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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신앙인들이 적어도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대한민국) 조선시대 때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전해주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다시 말해서 살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듣거나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에 먼저 반문이 있습니다. “그게 당신의 문제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니 일단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남의 상태를 보살필 여유도 없는 문제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있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본성처럼 자기 안에서 자기 삶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도 모르게 남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조선시대 사람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답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18-20)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불의>



앞에서 우리는 <의>에 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 그리고 의인이라는 것에 있어 의로움은 일반 사회가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그 안에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께서 의도한 삶을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여기시는 것은 횡영을 했거나 사회정의를 역 역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불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것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이 하나님의 의(의도하심)는 창세로부터 항상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공평하거나 공의롭지 못한 것과 같이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거나 들린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어째서 하나님의 행사가 의문스럽겠습니까? 사람이 하는 행동이 때로 이상해도 잘 아는 친구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의가 창세로부터 세상에 표현되었는가?”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드는 공산품도 그 제조사의 제조철학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애플사의 제품에는 애플사의 철학이 들어 있고, 삼성의 제품에는 삼성의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아는 존재



사람이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것에 대하여 대단히 강조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8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은 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표현을 봐야 하기 때문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관객 없는 공연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신 것은 그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어 역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앞에서 말한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 그 제작자의 의도가 자기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관찰하고 온전히 살고 있다면, 모든 것은 존재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기에 행동이 있고 소유가 있으며 관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존재의 의미이고 그 의미가 있어야 어떤 행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의미 있는 관계가 되면 그 의미에 맞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법, 이런 습성은 이미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결혼을 할 때 배우자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이성이기에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남자니까 여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 세상에 아이들이 많아도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이고 그 아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가끔 자기가 낳았어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학대를 하고, 반대로 양자를 들여도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아이면 그것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뭔가를 하려 합니다.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또 자기 소유를 드려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로 의로움을 삼으시는 분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나 남편, 부모와 자식에게 수고하고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상대가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고, 또 건축물이 본질이 아니라 건축물을 짓고자 한 주인의 의도가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공사한 사람이 아니라 지으려고 한 사람이 건물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지신의 관계는 그렇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자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법아래 있고 심지어 자신도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세계 안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와 같은 의문이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법이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질문을 한다는 것, 그것이 의문스럽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직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자기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세상이 처음부터 항상 하나님이 표현되고 있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도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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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18-23)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할 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비단 바울 사도의 로마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사람이 글이나 어떤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그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로마서도 그렇습니다. 큰 시야로 보면 복음에 대하여 전하는 것입니다만 그렇게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복음의 어떤 면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경건치 않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보편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로마서를 쓰게 된 계기와 다른 사도와는 달리 바울 사도가 가진 사도로서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더 좋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다 갔다 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그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 복음을 나눔으로서 세워진 교회이지만 그렇다보니 유대인이라는 선민사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로마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부딪힌 문제였습니다.


물론 골로새교회와 같이 세상의 학문이나 사상과 복음이 결탁하는 문제, 고린도 교회에 같이 복음을 받고서 타락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끊임없이 겪었던 문제는 바로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반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반한다는 것은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나,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듯이 기왕이면 세상적인 학문을 잘 아는 사람이면 더 좋은 복음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것이 바울 사도 일생의 일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혈통이나 공로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일 복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당시에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행위가 믿음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참 의미가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정의하기 일쑤입니다.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기왕이면 교회에서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모두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믿는지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소 비판적이겠지만 이야기 해 본다면, 우선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목사’라는 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목사가 됩니다. 우선 신앙이 학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안에 있는 고백인데 공부라는 공로를 쌓아야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는 취업을 위하여 Spec.을 쌓듯 경력을 쌓아서 목사를 청빙한다는 교회에 놀랍게도 <이력서>를 냅니다. 그러면 교회는 먼저 서류 전형을 합니다. 지원자의 스펙, 곧 공로를 얼마나 쌓았는지 봅니다. 그리고 불러서 설교를 시켜 봅니다. 말은 잘하는지, 성품은 어떤지 잠깐의 설교로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그렇게 목사를 뽑습니다. 이 전 과정은 신앙이라는 탈을 쓰고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방법 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하는 것입니다.


장로도 마찬가집니다. 교회 안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가장 우선은 재력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어떤 공로가 있는지를 평가합니다. 거의 인기투표 수준인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신앙이라는 허울만 있을 뿐 모든 가치관과 법과 생각과 의가 세상의 법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신들이 청빙한 목사에게 또 장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세상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도덕적이냐, 다른 목사나 장로에 비하여 얼마나 고상하고 수고하느냐와 같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는 다툽니다.


교회가 이런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이 이렇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신학을 얼마나 했느냐?’ 라든가 ‘공로가 얼마나 있느냐?’ 라든가 ‘세상적인 역량을 얼마나 갖추었느냐?’와 같은 것이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을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대인이냐?’, ‘할례는 받았느냐?’, ‘방언을 받았느냐?’, ‘신앙이 좋으냐?’와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이 나를 버렸다고 했고, 이방신을 섬긴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에 이방신상을 들여 놓은 적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긴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이 신앙과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사람을 볼 때 혈통을 보고 가늠하고, 또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재력과 고상함의 정도를 보고 사람을 가늠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같은 신앙의 모습을 보여줘도 세상적인 것이 더 갖춰져 있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아무래도 성격 좋고 착한 사람이 신앙생활도 잘해!”와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 이방신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신앙과 결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의로 여기시는 잡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심히 경계하는 것,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도 그것과 같은 것이기에 바울 사도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버리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보여 주기 위하여 로마에 가고자 하고, 가서 보여주고자 하는 은사 또한 그것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로마서를 읽고 진정으로 이것이 오늘 나의 말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오늘 우리도 신앙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이 더해지면 좋다고 여기는 것,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세상의 어떤 것을 사람을 판단하는 조건과 기준으로 삼고, 또 좋은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뜻을 알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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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9. 3. 07:07 Writer : 김홍덕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팔려갔고, 그 종착지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요셉은 출중함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인인 보디발은 그의 집의 모든 행사를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준수한 요셉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동침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에 응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다시 동침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요셉이 이를 뿌리치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요셉의 옷을 보디발의 아내가 취하게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는 이를 가지고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남편에게 고하므로 요셉은 모함을 받아서 왕의 죄수들이 거하는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참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살피셨으면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면 좋을 텐데 평소에는 잘 보살피시다가 결정적일 때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신 것이 그렇고, 또 요셉이라는 사람의 삶이 요즈음 말로 왜 그리도 꼬이는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을 해서 그 일로 인하여 옥에 갇히면 또 이해가 될 법도 한데, 그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살피시고 그 보살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언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요셉의 일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의 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겪는 일들을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든 어떤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면서 어떤 불행한 일을 겪으면 반사적이다시피 자기가 믿는 신께 자신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농담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행운이니 불운이라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반응하시는 분이신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앙관 자체가 모두 행위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이든 사람의 행위가 신 앞에서 의로운지 아닌지가 신이 반응하는 원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공로와 소유의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 그런 믿음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믿는 신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산신령이든 다 같은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에 반응하시는 수동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고 또 거룩(구분)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의 행동에 하나님이 반응을 하시는 관계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제사는 신의 반응을 도모하는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일이나 욥의 일이나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인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보응하시는 것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에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나 반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뜻을 세우시고 그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 있어야 비로소 순종의 개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을 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가고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으니 그 의와 뜻을 육신으로 표현해 내어야 하는 인생인 요셉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특히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진하게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당하는 이 일이 예수님의 일생과 매우 흡사합니다. 왜 특별히 요셉이라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생겼듯, 요셉의 일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나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그 꿈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꿈은 사람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야기했더니 형제들이 미워했습니다. 예수님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형제들도 같은 백성들도 또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땅에 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전하였더니 사람들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면 자기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그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일도 마찬가집니다. 아내란 여자입니다. 여자는 성경에서 형식에 관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하여 하나가 되고자 했다는 것은 요셉에게 눈에 보이는 형식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라는 유혹인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같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돌은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몸으로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의 생명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능력 이상의 기적을 일으키면 하나님의 아들이고 좋은 신앙이라고 유혹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죽게 되는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에 육신의 능력을 뛰어 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테니 마귀 자신을 경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니 이것을 얻기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목적과 뜻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은 율법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육신의 한계를 넘어야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고 그 세계의 영광을 취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즈음 말로 바꾸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애굽(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 시위대장의 아내입니다. 그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의 아내 곧 형식을 요셉이 자신의 것으로 취하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 같이 이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리친 그 유혹의 기준을 가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마귀가 유혹할 때 내세운 하나님 아들의 기준 예수님은 맞지 않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요셉 역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 아내가 요셉을 모함한 것입니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의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관으로 유혹합니다. 그 가치관 안에서 이겨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 육신의 것이 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좋은 믿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또 복을 받기 위하여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몸으로 그 공로를 쌓아 영광을 돌리고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일을 보면서 성적인 문란 행위에서 자신을 지키면 처음엔 곤혹스러워도 나중에는 총리가 되듯 세상에서 성공하는 복을 받는다는 교훈으로 삼으면 껍데기만 보는 안목입니다. 요셉의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일입니다. 세상 권력자의 아내(형식)의 유혹,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는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 받아 죄인이 되는 정체성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인 된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요셉의 일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곤고한 일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 혹은 자기가 믿는 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곤고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런 신앙관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쉬운 말로 구원받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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