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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17-27) 나사렛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14. 13:02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가지신 육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칭>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왕은 가이사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그들을 다스리는 왕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그 안에서 세상이 가진 가치 기준에 의하여 누가 더 의롭게 되는지를 의로 가진 왕이 자신들의 왕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그 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이는 명패에 ‘자칭’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런 자신의 결단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더욱이 예수님의 명패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어로 기록했다. 그것은 그 당시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언어로 썼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유대인의 왕,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사람의 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가 유대인의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것이다. 나사렛은 당시 천한 사람들의 대명사였다. 천한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죄인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엄두도 내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조롱 받는 이들의 고향이요 거주하는 땅이 나사렛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철저하게 죄인이 된 사람들의 땅이고 그런 사람들의 대명사가 바로 나사렛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의인이고 고상하며 거룩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정체성은 죄인 중의 죄인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괴리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해서도 의인이라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관, 애굽의 가치관, 육신의 공로와 소유로 의인과 죄인이 결정되는 가치관으로는 철저하게 죄인이신 분이다. 그 죄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예수님의 이미지와 같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의인이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의인이 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이 의인이라면 왜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 세상에서 옳다 여기는 대로 군대를 불러 빌라도를 물리치고, 그 때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내려오시면 되는데. 그게 세상에서 성공이고 의로움인데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면 왜 십자가에서 죽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는 절대로 의인이 아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 나사렛 예수를 믿노라 한다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그것으로 먹고 살고 있는 지경이니 오늘날의 교회가 바라바를 선택하고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더한 지경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다. 같은 분이고 같은 정체성을 가졌는데 그게 분리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그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육신의 문제 해결은커녕 오히려 육신이 속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면 누구나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철저하게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신분도 보잘 것 없고, 행동도 보잘 것 없으며, 그 생각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가벗겨졌고, 손과 발에 못 박혔고, 머리에 가시관 쓰신 것이다. 세상에서는 신분이 제사장이거나 왕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하고, 왕이 될 수 있는데 고작 목수의 아들로 나서 하는 행실이라고는 율법을 어기고 다니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세상의 가치관은 가차 없이 죄인으로 규정하고 처형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모습이 바로 모든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늘 죄인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의인이 되려고 사회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이르려하고, 더 고상해지려고 하는 삶을 산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 이유인 것이다.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은 사람 본연의 정체성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인생을 드려서 수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는 사회적으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나도 남들처럼~’이다. ‘나도 남들처럼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의로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누가 너에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잘 사는 것이 너의 의로움이라고 가르쳤느냐?”고. 누가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가르쳤다. 하나님만 의로우신데 자기가 의로움에 대한 기준을 가졌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자신의 벗은 모습,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감추어 의롭게 되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며 그리스도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정의내리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아니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죄인 삼아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달렸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는 것,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즉 나사렛 예수이기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듯, 오늘 우리도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늘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다. 이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의인이 되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도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 그것이 자기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본 마음 안에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되는 일이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구원? 어림도 없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유일한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이름, 곧 우리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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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17-22) 유대인의 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13. 13:4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언도 받았다. 빌라도가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죄패, 곧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붙이는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지시를 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자고 하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잘라 말하고 거절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있어 절대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 사건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이 세상의 삶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이 존재로서 존재했다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창세전부터 영원에 이르는 일이다. 십자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냐 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로서의 시작과 끝이고 영원한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뱀파이어를 물리치는 부적과 같이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액운을 방지하는 상징이고, 어떤 이는 자기가 삶으로 살면서 지었고 또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대속이자 미래의 보험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당연한 일이거나 자신과 무관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있어 각자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가 가진 삶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대하여 대표로서 그것을 보이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표로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인 것이다.(벌을 대신 받는다는 식의 초등적인 교리를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십자가는 인생의 운명이다. 인생의 틀(Mold)이다.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의 대속인 것이다. 이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보이시는 것이다. 사람의 정체성을 그렇게까지 보이셨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높이 달리셔서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대속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으로 죄를 범하고 벌을 예수님께서 받았다는 식의 대속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보 천치들의 이야기다. 그런 개념으로 십자가를 보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어떻게 대속하느냐?”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되고 또 그 질문에 “그것이 십자가”라고 답하는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한 어리석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죄의 본질이 행동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사람 안에 있는 의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행동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을 볼 때 그 행위 자체만 보는 것이다. 즉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죄는 사람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죄가 사람 안에 하나님과 다른 의가 있어서 그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정체성을 보이신 사건인데,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의 대속하여 벌을 대신 받으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행위만 보았지 예수님의 정체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외모를 보니 왕으로 삼기에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에도 터무니없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판단된 것이다. 그들의 모든 가치 기준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안목을 가졌기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셨기에 명패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유대인들의 요구한 것처럼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이다.


유대인, 곧 유다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통치이념인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의 최소한이자 기본적인 시작은 하나님의 정체성에 동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존재에서 비롯된 행위와 소유를 하나님의 본질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는 신앙과 믿음과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무리 훌륭해도 의미 없고, 자기 목숨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친다고 뛰어 들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이는 죽을 때까지 뇌까려도 좋은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행위에 대한 언급은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보이는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다. 항상 기도하려고 노력해서 항상 기도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기도인 사람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기도고 찬양이며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인데 성경에 나오는 무슨 행동인들 지키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지 못하며, 자기 행동을 아직도 다스려야 할 부분이 많기에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은 가상하나 길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위 규범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면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 믿음이 아니면 애쓰는 것은 가상하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존재의 하나님께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그러니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노력’하라는 말을 그만하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 되려 노력하나 적 있는가?


그렇게 사람의 행위를 사람의 본질로 보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행위로 왕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에서 세운 공이나 식량 문제를 해결해서 왕이 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나라다.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의이기에 그것이 다스리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살다가 좋지 않은 일 생기면 하나님께 뭐 잘못했나? 분석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 같은 종족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인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만 그 안목에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것 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정체성)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은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 유대인의 왕이 나와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국적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가 되어 그 의로 인하여 삶의 모든 행위가 나오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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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면 빌라도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게 되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서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묻자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 왕이 없나이다.”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요 19:15)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왕 같지도 않고 하나님의 아들 같지도 않아서였다. 유대인들이 볼 때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또 밀밭에서 밀을 까먹고, 성전에서 상을 엎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어기고, 하나님의 전에서 난동을 피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을 보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런 능력이 나올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자기 육신의 문제, 정치적 속국인 상황, 가난한 사람들이 넘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도 구하지 못하는 분이라는 것에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마저 외면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그 또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진 생각이었고,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가진 생각이며,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안목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앙이란 그 안목을 가진 세계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왕으로 또 그리스도로 보이는 세계로 전환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구속의 절기인 유월절에 하나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정말로 이 땅 위에서 왕이 되시리라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백성들도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시고 십자가를 진다고 하시니 그들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안목의 괴리를 보는 것이 세상과는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안목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발을 씻기실 때와 또 기도하실 때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가 기대한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틀린 것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자기가 저러고 있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드로의 부인이다.


어쩌면 신앙의 여정에서 그런 절대 절명의 갈등과 선택은 필연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신앙의 여정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한번쯤은 자기가 알던 예수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서 선악의 가치관을 가친채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그 차이를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갈등을 맞이한다면 ‘이 결정은 나를 지옥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의 신앙적 결단을 한번은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끝내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진, 그리스도는 이러해야 하고 왕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도 또 자기들의 왕이 되어 정치적인 또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중운동가인 바라바를 선택했고, 결정적으로 자기들의 왕은 가이사 밖에 없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왕은 정치적인 왕이 전부고, 그들에게 구세주는 육신이 가진 가난의 문제 해결, 고상하지 못한 인생의 모습의 해결을 해 주는 메시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왕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문제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본질로 여기시는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사회적인 문제 해결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때로 시끄럽게 까지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방신학이다 뭐다 하면서 교회가 사회적 약자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나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거리로 뛰쳐나가기까지 하는 교회의 행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선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결국 바라바를 선택하고 가이사를 왕으로 섬기게 된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국가가 자기 통치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는 안목과 믿음으로 아무리 하나님이라 불러본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늑대가 아무리 푸른 풀을 양식으로 삼으려고 해도 되지 않듯이.


그런 안목과 신앙이 선택한 왕은 결국 가이사다. 즉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서 누가 더 가졌는지, 누가 더 공로를 쌓을 수 있는지에 의하여 선이 결정되는 세계가 자기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의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다시 세상의 임금을 자기의 임금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마치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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