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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7-29) 율법이란 무엇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3. 15:40 Writer : 김홍덕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십계명과 또 유대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지켜오는 신앙적 규범인가? 아마도 대부분은 그렇게,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율법은 구약시대의 규범일까요? 그리고 지금은 신약시대(예수님 오신 이후)이니 율법은 없고 복음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율법에 관해서 이 시대 사람들이 읽고 묵상하게 하실 이유가 없으니 성경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도 없는 것을 지키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오늘날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율법은 어떤 조문은 율법이고 어떤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말씀하신 의도를 모르고 행동으로 지키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방향성의 법을 가지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성경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어 의에 이르려고 하면 예수님의 말씀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심지어 세상의 어떤 사상이라도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라도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의로 여겨 몸으로 행하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십계명이나 모세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이렇게 해야 의로운 것, 혹은 바른 것, 혹은 선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주장하고 그렇게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입니다. 


이것을 두고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바울 사도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로 나타나느니라(롬 2:14-15)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신앙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하나님을 알고 믿든 아니든 누구나 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율법에 대한 정의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도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든 아니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법은 바로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 곧 사람 스스로가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 생각하는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생각하기를 ‘사업이 잘 되면 좋은 차를 탄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사업의 형편과는 무관하게 좋은 차를 타려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사업이 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기준이 법이 되어 모든 것이 결정되고 결국 자신도 그 법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리해서 좋은 차를 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이 없으면 그 일로 화가 나거나 낙심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팀이 어떤 순위에 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있으면 늘 그 팀의 순위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응원한다는 것은 이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 바람대로 이기면 선한 일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져서 순위가 내려가면 패한 일,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도 굴뚝을 두 사람이 청소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이 검게 되었고, 한 사람은 검게 되지 않았는데 얼굴을 씻으러 간 사람은 자기 얼굴이 검게 된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눈으로 본대로 상황을 인식하고, 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2장 17-29절에서 율법이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길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수치를 느끼는 것이나, 죄로 여기는 것이나, 또 자랑하는 것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그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준이 사람에게서 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과 같으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사람은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들어진 아담과 동일한 존재고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보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나와서 자기를 보니 부끄러워지게 된 것이 선악과로 인함이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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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고 했는데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육신인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나와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 육신의 연약함을 감추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가치관, 곧 무화과로 몸을 가리는 가치관이요, 육신의 연약함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행함으로 감추려는 가치관으로 보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발가벗겨진 체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그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처형해야할 죄인이지만 의외로 바로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에 죽음에 두실 수 없는 법이 표현되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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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7-29) 기독교인과 율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1. 10:13 Writer : 김홍덕

앞선 글에서 율법이라는 것이 구약시대의 십계명과 또 그에 속한 계명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대적으로, 달력의 시대 곧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예수님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율법의 시대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신앙이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의 시대를 사는 것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과 교리야 말로 진정한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나 또 다른 바울 서신을 대하면서 그 안에서 ‘율법’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약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지키던 계명이나 오늘날 이슬람이나 또 이스라엘에서 전통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삶의 규범이라고 읽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 말씀들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복음의 시대라고 여기면서 복음 이전의 율법을 논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율법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바울 사도도 2장 14절에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 2:1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어떤 규범을 정한 조문이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라고 규정하고서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안다면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이 가르치고 말하고 있는 복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복음의 탈을 쓴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라는 것은 어떤 계명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것을 행함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기도 자체는 복음시대를 대표하는 신앙의 모습 같지만, ‘기도해야 한다.’ 혹은 ‘기도해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라고 하는 순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에도 유대인,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책망하고 있는 유대인은 넘쳐납니다. 교회에 갔더니 ‘육신이 때로는 싫고 힘들어 해도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봉사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라는 설교를 하고 있다면 또 그런 설교에 ‘아멘’하고 또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한다고 공감하고 있다면 그곳은 21세기의 느헤미야-에스라 성전이거나 솔로몬의 성전과도 같은 곳입니다. 당연히 그 신앙 공동체 속의 사람들은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육신으로 ~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공식과 교리가 바로 율법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이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에 온전한 존재이기에 이 육신을 하나님이 주신 용도와 다르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하여 수고하는 도구로 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온전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런데 왜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거스르는 불의며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유대인과 같은 모습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던 책망과 바울 사도가 책망하고 있는 유대인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던 바리새인들이나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이런 말씀들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욕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욕보이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하며(롬 2:17)

이 말씀을 지금의 말로 바꾼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아, 너희가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라고. 그리고 그 다음의 성경을 읽어 간다면 성경을 몸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긴 유대인들이나, 시대가 신약 시대이기에 자신들이 복음을 지키는 것이라 스스로 착각하기에 성경을 몸으로 지켜서 의로워지고, 또 그렇게 의로워지는 목적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삶이 복 받기 위한 것임을 교묘히 숨기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롬 2:23-24)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자신들의 육신과 삶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것에 두고,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늘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랑하지만 결국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 없이 행함의 죄를 범하므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이 자기 육신의 행함과 삶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행함으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은 행함으로 도달해야 하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사람을 판단하고, 기준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 당을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을 모르고 상실한 탓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가진 이 육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위하여 주신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향이 반대입니다. 나라 지키라고 준 총으로 내란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방향이 반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방향을 거꾸로 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자기 자신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기 육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맘대로 각색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은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불의한 자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들이 되려면, 바울 사도가 책망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어떤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바른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또 세상에 주장할 리가 없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향이 사람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생명의 방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유전자가 삶으로 행동으로 발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라는 형식의 행함으로 속사람이 의로워지는 역방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마음,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의가 생명이 된 사람입니다. 


그 생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삶의 목적과 이유라는 것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유대인, 곧 하나님이 택하시고 의롭게 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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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6) 지금은 율법이 없을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0. 12:52 Writer : 김홍덕

로마서 앞부분은 로마에 있는 혈통으로 이방인인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 할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서 복음도 그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로 인하여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 없는 사람이 되고 또 신앙적인 갈등 가운데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마음으로 바울 사도가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혈통으로 이스라엘인이라는 것 이외에 무엇보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과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한 증거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것은 실제로 그런 증거들을 있기 때문이지만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을 모두 행함으로, 육신의 것 곧 형식에 관한 것으로 규정하였고, 그런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것을 책망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삶을 허락하셨으니 그 사람의 혈통이나 생김새나 성격이나 지혜로움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같은 피조물인 사람이 그것을 판단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는가 하면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의는 결국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면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위의 바르고 그름은 율법으로 가늠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시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이 말씀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이 말씀으로 깨달아야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사람들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이라고 여기고 가르치며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에 있는 기도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들을 지키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몸을 행함으로 지키려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단지 그 말씀이 신약성경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율법이 아닌 복음을 듣고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고 무엇보다 엄청난 신앙적 오류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신약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것(행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신약시대라도 자칭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할례는 구약의 말씀이라 행하지 않아도 되고, 십일조는 부자가 되어야 하니 지켜야 한다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말씀도 행함으로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행하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다 율법이 되는 것이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표현되다 보니 행동으로 표현되면 구약의 말씀이든 신약의 말씀이든 무엇이라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 또한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이 먼저고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 되어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으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행함이 아무리 대단해도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법이고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말씀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같은 말씀을 읽고, 또 듣고서 자기 안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기뻐하신다고 하니 때로는 싫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자기 마음의 갈등과 겨루어가면서 행하려고 하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은 다 율법 가운데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신앙의 발전이나 더 나아가서 거듭남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자기 삶을 바꾸는 새 생명이 없는데 거듭남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이 있다면 성경을 읽고서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 생명이 자기 행동과 삶을 성경과 같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신앙이 얼마나 율법적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서 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그것을 말씀하셨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육신이 신약시대를 살고 있다고 복음이라 믿고 살면 그것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착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로마서를 연구해도, 또 성경을 외워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 역시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의가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이것입니다. 사람은 겉을 바꾸어 속이 바뀌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속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법이 영이신 하나님께서 형식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으로 사람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도 그 속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고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어 그것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키려고 하는 말씀이 신약이냐 율법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법이 무엇이냐가 율법인지 복음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자신의 의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방향성,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기에 그 의가 행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 행함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행함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경을 보고서 그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의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지켜낸다 해도 다 불의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지켜낼 수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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