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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 육신을 가졌기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모든 인생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사는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목적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목적을 알아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요셉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든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신 것, 믿기를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라는 것은 어떤 속 안에 있다는 것이다. 어디엔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갇힌 자를 구하려면 구하는 자는 갇히지 않은 자라야 한다. 구하는 자 곧 메시아요 그리스도는 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사로잡혀 있는 세계가 온전하지 않으며, 구하고자 하는 존재(사라)가 그 세계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갇힌 자 역시 미운 오래 새끼와 같이 자기가 지금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벗어나기를 원할 때 온전한 구속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데 그것을 벗어나서 살다보니 당연히 목적을 벗어난 모든 존재와 같이 이런 저런 곤고함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보니 ‘삶은 고난’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괜스레 사람을 고생시키려 만드신 것처럼. 더욱이 사람들은 그런 곤고함 속에서 자리는 바꾸지 않고 곤고함이 경감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들 중에서 미움을 덜 받는 방법을 구하듯이.


하지만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다. 오리들하고 놀면서 미움 받을 존재가 아니다. 그때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이 오리라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니 ‘사람이란 존재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같은 존재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래 백조였다는 것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세상은 곤고한 것이라며 어떻게든 그곳에서 곤고함을 줄이고자 애쓰던 인생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아 ! 우리의 자리가 이곳이 아니구나!”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와 나의 가족, 또 때로 세상의 일로 원수 같은 이들도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삶을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그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에 가면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잘못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뭘 잘못했지?’라고 행위를 생각한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그렇게 판단한다. 심지어 행동을 보고 먼저 판단한다. ‘십일조를 안 낸다고? 그럼 신앙이 없고 부자 되기 힘들겠네?’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존재 정체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는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은 하지 못하는 죽은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이 목적 안에 있지 않아서 죽은 자와 같이 그렇게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는 자리에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대로,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호흡하고 있다고 산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있을 때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굴러 다녀야 살았다 할 수 있고, 시계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줄 때 살아있다고 하며, 전화기는 통화가 되어야 산 것이라고 하듯,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도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그 육신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삶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신 이가 뜻하신 목적 안에 있으니 그것이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며, 그 안에 있으면 그 이름의 영원함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름은 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정체성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예수님의 이름, 곧 보여주신 정체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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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사도가 밝히고 있는 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알고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기록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은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살아있고 생명으로 여기시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경의 기록 목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어쩌면 이것은 상용구와 같은 명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아주 뻔한 것 같은 그 하나가 모든 것일 때가 있는데 이 말씀도 그렇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다. 아마 이것에 대하여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믿는 것이다.


어떤 예수? 예수님이 한 분인데 어떤 예수님을 믿느냐고? 의문스러울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달라서 얼마나 혼돈스러웠는지 모른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 어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지를 믿느냐는 것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내가 범한(Doing) 죄의 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예수님도 그리스도로 믿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죽으면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부귀영화를 천국에서 누리게 해 주신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와 동일한 육신과 삶을 가진 평범한 사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나 철수와 같은 보편적인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면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을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평범한 사람은 우리가 쉽게 그리스도라고 믿는 능력의 예수님과는 너무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 쉬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왕이요 제사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고,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옆집 아저씨, 앞집 아줌마가 바로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그 당시로 보면 지금의 옆집 아저씨나 이웃집 청년과 같았다. 이름 ‘예수’역시 우리나라의 철수, 영희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고, 신분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귀족은 고사하고 사회적으로 볼 때 전혀 고상하지도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가난한 사람으로서 은행을 방문해서 대출을 받고자하나 여의치 않음을 알고 돌아서는 사람은 돈이라는 가치 기준에 의해서 멸시를 받은 사람이다.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은 학력이라는 기준에 미달하여 버려진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과 같았다. 이것을 알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세상이 선하게 여기고 가치로 여기는 재력이란 기준에 의하여 멸시 받는 사람, 시험에 떨어진 실패자를 보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든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면 쉽게 믿어질까?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 그래서 요한 사도가 그것을 보고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에 있어 어떤 예수를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멸시 받고 버려지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가난하고, 또 음란하기도 하고, 그래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것이 없어서 ‘저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나?’ 싶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해야, 또 죄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일을 보고 듣고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멘’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볼 것이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이 인정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는 사람이지, 세상 가치관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다. 그렇게 세상적인 역량도 뛰어난 예수라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경건한 모양(외식)을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남다른 경쟁력을 가진 사람이라 인정받으려 한다. 


이런 신앙은 자신들이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항변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버림받고 멸시받은 예수님인데,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의 가치기준의 상위에 올라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인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냥 패배자요 죄인이요 Loser일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실패한 사람, 아니 세상의 가치로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대접할 수 있는 심령이 없다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신들은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곤란한 일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이 그런 믿음 때문에 제대로 된 하나님의 계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가치가 아닌 사람을 말한다. 사람을 볼 때, 그 외모나, 재력이나, 교양이나, 신분이나, 신앙적 공로나, 은사의 정도나, 사회적인 봉사활동의 내역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심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고 오직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고백만 있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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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도마는 없었다. 도마를 만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했다. 그러자 도마는 직접 예수님을 보고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서 8일 후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져 보라고 하시고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을 하셨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것은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어쩌면 이 말씀은 어쩌다 유명해진 말씀일지도 모른다. 때로 성경에 대하여 궁금해서 꼬치고치 캐묻는 사람에게나, 또 믿음에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몰라서나 당황해서 혹은 귀찮아서 하는 답변과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지지 말고 믿어라, 예수님께서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다며.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두고 보았다 보지 않았다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예수님이다. 도마가 보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 그 자체다. 그러니까 도마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신,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이고 주님인 것이다. 그러니까 2,0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 육신이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그 훌륭한 고백의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예수님을 보고서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 보다, 예수님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닌 보지 못하고서 믿는 믿음이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셉의 아들 예수님만 주님이라고 여기는 것 보다, 요셉의 아들 예수를 보지 못해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순종하는 것이 복된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경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꼬치고치 캐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믿는 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요셉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못 자국과 같은 증거를 기반으로 예수님의 일이 사실임을 믿는 것이나, 예수님은 실제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의를 자신의 말씀으로 믿는 자가 바로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은 요셉의 아들인 예수라는 한 육신을 보고서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며 죽여 버렸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가늠한 것이다. 그것이나 도마가 못 자국을 만져 봐야 부활을 믿겠다는 것이나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서 하나님의 놀라움을 증명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므로 모든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는 하나님이 축복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로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고 화려한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건물의 화려함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 뛰어나면 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가치관은 다 애굽의 가치관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창조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가 사람이란 존재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또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후에 한 번도 사람을 개선하거나 바꾸신 적이 없다. 사람은 창조될 때 사람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지 그 사이에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의 일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자리에 오른 일 밖에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겼다. 그래서 사람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원래 만드실 때 그 모습의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을 아들로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즉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연상하고 알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는 것, 또 자신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자신과 같이 사회 속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부족하고 죄인 되는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요셉의 아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실체를 봐야 믿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알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이 삶이 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기고 대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대한 것과 같다고 했고, 야곱도 자신을 죽이려 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그 형(에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했고, 바울 사도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이 하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예수인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관점, 애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 육신 가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의 대명사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대할 수 있는 믿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마음에 선악과로 인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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