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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인생에게 복음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본다면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망의 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다고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있어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모든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다른 것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렇다면 그 아들 역시 세상의 주인입니다.


‘다윗’은 왕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왕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오셨다는 것, 왕이라는 것은 자기 세계를 자신의 의로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의로 다스리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신의 의로 세상을 다스림과 같이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는 모든 사람 역시 왕과 같이 자신의 세계를 의로 다스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뜻대로 되는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예수님은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라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 나라 이스라엘의 왕, 곧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예수님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복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간혹 그러기도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렇지 않을뿐더러 단 한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일이 있었다면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니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주장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정말로 왕인가 싶기도 합니다. ‘도무지 어떤 세상의 왕이란 말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많은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그 모든 어려운 일, 곤고한 일, 화나고 짜증나며 슬픈 일들의 뿌리와 같이 공통된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자기 맘대로 된다면 그 일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기 맘대로 된다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에게 ‘네가 왕이다.’라고 인정해 준다면 나름 복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맘대로 되는 세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버스 하나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버스가 온다는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제때 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세상이고, 그래서 내가 왕이라면 왜 맘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것이 아닌 이유는 다른 것 아닙니다. 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구매한 것은 내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해도 됩니다. 사자 바로 부셔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들어 온 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자라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식하고 보니 세상에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자신의 의와 뜻대로 세상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함을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신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대적하고 하나님과 겨루며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세상이 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자기 관점과 안목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뀐 안목으로 보는 자기 세계, 그 세계는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육신의 삶과 세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심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면 이 세상이랴 말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니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의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수도 없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뜻대로 하시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푸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세상에 속하여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자신의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세상의 의로 사시는 분이니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육신이 원하는 일이 자기 맘대로 되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삶이 되어 사는 존재가 되므로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고 뜻대로 되는 삶, 곧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로 사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이며, 불만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의를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모든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되고, 만족이 되며, 안식이 되고, 평안하며, 항상 감사하고, 언제나 기쁜 존재가 되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억지로 할 이유도 없고, 신념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복된 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이고, 또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알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복음인 것입니다.(예수님이 오심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고 만족의 동산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 곧 삶이 된 사람이 사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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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7) 예수님이 왜 복음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15. 21:58 Writer : 김홍덕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이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 누구와 무엇은 간절한 관계일 것입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누구이기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험생에게 있어 합격 소식은 간절한 것이고 합격이라는 말이야 말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두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누구에게 복음인가 하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인류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복음인지도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간절한 분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사람들이 복음으로 여기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것이 사람에게 복음’이라며 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계서 전하고자 하신 맥락과 같은 맥락에서 사람에게 복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이 간절해도 바닷물을 마시면 안 되듯, 예수님께서 복음이라고 하니 자기의 모든 간절함을 예수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은 <무엇이 간절한 것인가?>입니다.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간절함이 있고, 그 간절함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시기에 예수님이 복음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간절함>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간절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통적이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볼 때 모든 인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있으면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조차도 간절함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명제들은 철학적인 고찰이라는 선입견을 주지만 알고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생의 꿈은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돈이라고 해도,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가 돈이라고 하는 사람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 자신의 답이 돈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은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왜 사는지, 인생이 무엇인지로 표현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간절함, 나는 누구며, 왜 사는지에 관한 답을 보여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듣고 그것을 복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내린 결론, 돈이나 명예와 같이 세상의 것이고, 애굽의 것을 구하면서 그것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복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저의 글을 꾸준히 보시는 분들은 이것이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지 아시겠지만, 오늘 처음 저의 글을 보신다면 지난 얼마간 예수님께, 또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마음으로 바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돌아보신다면 스스로가 무엇을 복음으로 여기는지 아실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겨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도 누구나 구하는 것에 있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가지게 되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구했다면 아직 복음의 표면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런 분들에게 있어 성경은 참 의문스럽고 성경대로 살기 힘들 것이며 행여 성경대로 살지 않아서 벌을 받으면 어쩌나 염려하실 찌도 모릅니다.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보면 자신이 바라는 것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는 것을 벌로 여기고, 건강이 악화되는 것, 심지어 약속시간에 맞춰서 타야 하는 버스나 지하철 놓치는 일이 생기는 것조차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얼마나 예수 믿는 믿음이 세상적인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벌이라는 것이 대부분 세상의 것,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시는 것은 우리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해결에 대하여 기도하면 들어 주시기 때문에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니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시다 보니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을 상실한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고, 하나님이 속에 거하시기 위하여 빈 그릇과 같이 지어진 인생이기에 자기 안에 끊임없이 채우려는 그 배고픔을 채우시는 주님, 인생의 정체성을 채우시는 예수님이시다 보니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천 명을 먹이게도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게 하시는 예수님의 본성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상실하여 마치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와 같이 죽은 인생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인생에게 복음이고, 사람이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몰라 느끼는 공허함과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복음이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만 해결되면 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동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동차를 산 사람이 기름을 넣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겠다고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먹고 마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 주시기에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껍데기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복음인 것은 ‘사람이 왜 사는지?’,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게 될 모든 인생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니 그 뜻도 하나님이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이신 것은 바로 이것,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육신의 어떠함이 신앙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 그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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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여러 번의 선교 여행을 다녔고 그 끝으로 언젠가 로마에도 꼭 가려고 했습니다.(행 19:21) 로마는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의 수도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라는 것을 전한 바울 사도로서는 로마에 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소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인지를 전하는 것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누구’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입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했습니다. 이를 두고 <선민사상>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가 만난 예수님과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복음(福音)’이 무엇이냐? 부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한 마디로 좋은 말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좋은 말인가? 그것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이 복으로 여길만한 아니 여기는 소리, 소식이 복인 것입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에게 기대치 못한 목돈이 생긴 것과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생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생에게 복음인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복으로 여길까요? 많은 사람들이 재물이 생기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 복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것을 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또 운동선수들은 이기는 것, 금메달을 얻는 것을 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것들이 복이 된다는 것은 맞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복이냐는 것입니다. ‘건강이 모든 사람에게 복이지 않느냐?’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생길까요? 자살하는 사람에게 건강이 복이겠습니까? 누군가 금메달을 땄다면 또 누군가가 경기에 이겼다면 누군가는 은메달을 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패자들 역시 금메달과 이기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경기에 임했고 진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에게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전하시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복된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 인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소식이 간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생일대의 핵심적인 소망이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 모든 인생에게 간절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을 믿고 또 성경을 읽고 알고자 하는 이유는 인생이 가진 문제들 그 중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나는 누구며, 왜 사는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인생이 뭔지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자기 맘대로 되는 사람이 신을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인생이 힘들다고 이야기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에게 의탁하는 모든 것은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왜 사는지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자신에게 복음이 되지 않기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어두움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매 세상이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모든 인생에게 복음으로) 오셨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자기들의 복음이라고 여기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 스스로가 어떤 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우상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냐 하면, 사람들은 돈을 복으로 여기고, 또 명예를, 또 어떤 이는 금메달을 따는 것이 복음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런 것들을 얻으면 자기 삶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돈과 명예와 같은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왜 모든 인생에게 복음일까요? 이것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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