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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8. 14:58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의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심청전의 주제는 <효(孝)>입니다. 효를 이야기하기 위해 심청이는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심청전을 오늘날의 인권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인신매매입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심청전이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것을 문제시 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심청전을 학교에서 배우고 읽은 사람들에게 심청이는 효도를 한 딸이지 인신매매의 희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를 하려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효도의 내용이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청전을 읽으면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인 <효>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심청전의 본질은 아버지가 눈을 뜨려면 딸이 바다에 빠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효도하라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바다에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이 효도를 이야기한 것처럼.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기록된 문자와 문장대로 육신이 행할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자기 안에서 자기 삶으로 표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자기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심청전이 자기 것이 되는 것과 같이.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문자 그대로 행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로운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도승이나 신부나 수녀와 같이 사는 것이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몸을 제어하고 또 삶을 오로지 종교적인 의식 안에만 두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과 삶이 자기 삶에서 많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또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디까지가 종교와 신앙의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육신의 삶일까요? 그게 구분이 가능할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구분되지 않으니 그렇게 사는 것은 의로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다면 분명히 신부나 수녀나 목사나 수도승과 같은 사람이 좋은 신앙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삶은 어떤 경계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육신의 삶과 신앙의 삶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 그것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또 그것이 말씀을 따라 혹은 지키는 것이라고 산다고 여기는 것은 어두운 신앙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주제가 효도가 아니라 바다에 빠지는 것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율법과 성경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새로운 법, 곧 믿음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 즉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분명하고 또 아주 쉬운 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다 아는 뻔한 답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뻔한 답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 법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서 문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목숨과 같이 지키는 유대인들이 볼 때 어이없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어 버리고, 성전을 헐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등 율법을 작정하고 어기려한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 5:17)


그럼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시지도 않으셨는데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고 또 율법의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마 5:18)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의도한바 목적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율법을 완성시키고 다 지킨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니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육신이 연약해서 잘 지키지 못하니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계속 노력해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입니까?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모습과 삶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율법이 다 완성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율법을 또 성경을 지키고 따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완성되었는데 노력할리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시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괜히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 되기를 바라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율법의 완성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청전을 읽고 부모님을 위해 바다에 빠진 사람과 심청전을 알지 못해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심청전을 완성한 사람이겠습니까? 그건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외면하고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의 목적이 바로 예수님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성경은 행동강령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그와는 색다르게 행동은 무관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 인생에서 잘 살고 부자로 또 건강하게 사는 조건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인생 그 자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또 그것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고, 경건하려 애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 행동에 반응하시고 그 결과 복을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모든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아닙니다. 누가 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해서 차를 사겠습니까? 하나님도 사람의 육신이 먹고 입는 것을 풍족하도록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차를 사는 것은 기름을 넣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차를 통하여 나의 의도(이동)를 이루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도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삶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행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조법이나 그리스도가 되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설명,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인생의 정체성이고 삶의 이유와 목적임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어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치 심청전은 효도할 마음이 있으면 바다에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운명과 정체성이 자기 삶의 운명과 정체성이 된 사람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의 삶은 이러나저러나 또 사나 죽으나 그 삶의 모양이 어떠해도 늘 율법과 복음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상어가 되지 않듯,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 사람의 삶은 삶 전체가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율법과 모든 계명이 이루어진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율법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 율법으로 표현되는 행함이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율법을 완성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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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7. 09:46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복음으로 대치된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죄를 알게 되었는데 그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으니 이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곧 복음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은연중에 ‘율법은 이제 적용되지 않고 폐기된 하나님의 법’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온전하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사도들은 율법에 대하여 ‘지나간 법’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해야할 것으로 여길만한 말씀들을 하셨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온전하다는 것 외에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을 인함입니다. 그런 율법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듯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율법을 오해한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곧 율법을 오해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마치 생명의 본성이 그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과 삶의 형태를 정한 법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는 그 유전자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사람은 날아다닐 수 없고, 물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직립보행을 하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행여 사람이 물속에서 견디는 수영을 하게 될 때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날게 된다면 그 역시도 ‘나는 법’이 될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란 언뜻 보기에 다 ‘이렇게 해라’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율법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앞에 <누가>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면 출애굽기 20장을 시작하실 때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선언을 하신 다음에 다시 모든 계명 앞에 <너>는 이것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존재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그 율법을 행할 존재가 정립되고서 그 존재가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먼저고 그 존재는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 존재의 본성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니 너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생명의 법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계명도 생명의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이 되면 율법은 지켜질 것이니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의 본질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듯, ‘무엇 무엇을 하라’는 율법과 계명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대부분의 종교)이나 율법과 성경의 본질적인 방향성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도 분명히 <너>라는 정체성이 정립되고 난 다음에 그 <너>가 생명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과 계명과 성경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비유컨대 생명이 가진 본성과 행동의 모습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물속에서 살찌어다.’라고 하셨다는 것은 너는 물고기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본성대로 정체성의 자리를 지키고 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의가 있는 사람의 삶이 율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서 생활하면 물고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어이없는 짓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행동이 부족할까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본성마저 극복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에 있는 본성은 감추고 겉으로는 고상하게, 또 열심히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양은 번듯하나 생명이 없고 죽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이 보낸 모란 꽃 그림이 화려했지만 향기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반대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하니 당연히 의롭지 않기도 하지만, 하나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닌데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대한 의를 알지 못하고 반대로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가치관과 믿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법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육신의 행동이 따라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엉뚱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잉태되어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과 모양과 행함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 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읽고 듣고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저란 삶을 사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를 하면 되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심청전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부모가 자식을 잃는 불효가 되지 않겠습니까?


행함과 행동은 어디까지나 생명이 있는 존재의 생명본성의 증거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행동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가치관에서 건져내신 신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된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삶이 자기 안에 씨와 같이 심기고 그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삶이 거듭남으로 자기의 모든 삶이 그 생명으로 표현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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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돌로 떡을 만들어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6. 22:25 Writer : 김홍덕

‘율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표면적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라고 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십계명과 레위기에 나오는 계명들과 같은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신앙의 어떤 부분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뭔가 떨쳐내어야 하는 과거의 유산과 같이 여겨지는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율법에 매몰된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율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우리에게 율법을 터부시 한 것으로 비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대한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 유대인들에게 한 사도들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지금 이 시대가 달력의 시간, 곧 객관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볼 때 사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던 시대에서 2,000년 이상의 간격이 있고, 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것이 가진 정체성을 가지고 율법이 무엇이고 복음이 무엇이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신 말씀이고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율법이라 하고 어느 부분을 복음이라 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을 보고서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한다면 신약성경도 율법이 되고 반대로 구약성경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가 행동이 아니라 그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본성으로 표현되다보니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십계명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시대에 말씀하셨다고 오늘 나에게 복음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전부가 복음은 아니라는 것이거나,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어떤 것은 율법으로 어떤 것은 복음으로 받는 상관 노릇을 한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이 무엇인가?> 할 때 율법의 정의를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왠지 모르게 떨쳐야 할 것으로 이야기 되는 율법은 무엇인가 한다면 그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또 듣고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이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간혹 ‘율법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를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앞에서도 계속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결정적인 편견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실 대에 금식하셨는데 금식하신 예수님을 마귀가 데리고 가서 시험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그 시험에 대하여 답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우리 모두가 받는 시험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시험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배고프니 돌이라도 먹을 것으로 만들라는 유혹이 아닙니다. 배고파서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은 율법입니다. 이는 모세가 계명을 돌판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돌로 쳐 죽인다’는 사형 집행법은 다른 말로 율법에 의거하여 사형을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경 곳곳에서 돌은 율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과 우리 몸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내 정체성과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율법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곧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정체성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의 배고픔은 바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키면 알 수 있는 것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인생의 목적과 삶의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귀는 시험을 할 때 조건을 달았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단서를 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육신의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답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마 4:4) 이것은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산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것, 생명도 살았고, 그 삶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을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신을 몸으로 잘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동으로 속을 바꿀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방향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겉에서 속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생명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함에 있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몸이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유혹을 지금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 시간이 예수님이 오신 다음 세대를 살고 있기에 복음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까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예배를 위하여 토요일에 일찍 자고, 말도 경건하게 하고, 주일날도 일찍 나와서 앞에 앉아야 한다.(have to do)’라고 하는 것이 경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이 말은 행동을 경건하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행동을 경건하게 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이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내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경계한 유대인들의 누룩, 사도들이 경계한 율법주의(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오늘날 성경(신약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을 읽고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귀의 첫 번째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 이것입니다.


율법은 부정한 것이나 터부시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보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지켜야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나사를 거꾸로 끼우는 것과 같은데 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돌을 먹을 수 없듯이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되면 모든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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