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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과 십자가의 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8. 26. 00:48 Writer : 김홍덕

결혼 후 처음 맞이한 명절, 그 끝자락의 일요일. 신랑은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그 시각 신부의 친정에서는 조카 사위 한 번 보겠다고 친척들이 귀향(성) 시간을 늦추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축구는 늘 그랬듯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고 있고, 신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신랑은 축구가 거의 끝날 무렵에서야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마치고 운동장을 나섰지만 그 역시 마음이 불편하다. 교회의 지체들과의 매주 하는 축구 시간이 처가의 친척들과의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에 나누는 인사와 비교할 때 더, 아니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불편하게 도착한 신부의 친정, 당연히 대부분의 친척들은 돌아갔다. 그 시간까지 있을리가 만무했다.


여기까지는 서론이다. 본론은 그 다음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정에 있는 너의 옷가지를 다 챙겨라'

그리고는 정말 그렇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서 그들은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다시는 친정에 와서는 안 될 것 처럼. 교회의 지체들과 노는 시간을 빼앗은 죄를 지은 신부는 그렇게 옷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크라이막스는 여기가 아니다.


이 부부의 일은 그 교회에 소문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다음 예배 후 간증 시간에 부부의 간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신랑의 승리(?)였다. 신랑의 처사가 진정으로 복음적인 것이기에 찬양을 받았고 교회의 다른 지체들은 신랑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한다고 화답하고 칭송했다. 그리고 신부는 진심으로 자신을 돌이켰다. 그리고 그런 신부의 모습에 교회의 지체들이 역시 화답했다.



평범하지 않은 듯한 이 이야기는 실화다. 그리고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을 때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 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 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난 그냥 지나갔다. 어쩌면 적어도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지나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이 더 옳으냐를 떠나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적어도 내 마음의 빚이다.


오늘 문득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묵상을 글과 또 녹음 파일로 표현하면서 그때 완연하게 동의되지 않았던 그 마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실화의 어디에서도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을 신앙적으로 볼 때, 아니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시공간에 사람이 더 함께하고 기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야구로 비유한다면 안타를 친 것과 같다. 안타를 친다는 것은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점수로 승부를 가린다. 안타가 중요하지만 안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사랑하며 또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나타나는 한 형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한 형식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행동 습성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저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구나!" 라고 탄성을 내게 하고,

"이 신앙은 나도 가지고 싶은 신앙이구나!"라는 감동을 주어

신앙 가진 사람을 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깨닫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 속의 신랑은 의로웠다. 아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처가의 식구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하는 의로움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의로움은 죄인이 된 적이 없다. 기껏해야 발을 동동 구르는 신부의 눈치를 보며 분이 난 마음 그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인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로움이 의로운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냄,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로움이 세상의 군병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신앙적 의로움이 죄인이 되지 않은 것이다. 죄인은 고사하고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더 의롭기에 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신랑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는 죄인이 되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렇게 자신은 원치 않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세상적인 가치관(새 조카 사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랫사람이니 그를 봐야겠다는 것)에 끌려 갔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부가 '남편은 교회 사람들과 축구하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법이 절대로 없는데 이렇게 친척들이 불러서 왔노라'했었으면 어땠을까? 그것이 어떤 열매를 가져오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십자가의 도를 보여준 것이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제는 교통함이 단절되어서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신부의 친척이나 가족 중에서 그 신랑의 신앙을 보고서 그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은 없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의 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가진 신앙의 의로움은 절대 손해보거나 손상 당하지 않으려 한다. 흔한ㄴ 예로 교회 가는 시간에 뭔가를 하지 않으려 하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을 친구로 둔 이들은 교회에 가지 않음에도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신앙을 가졌기에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 없는 사람들의 끊임 없는 양보와 이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세상의 임금으로 세우고 백부장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된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인줄로 알고 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보는 의롭지 않는 이들의 주장에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육신의 사용법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은 육신 가진 삶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 도를 가지고 산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을 오늘 자기 삶 속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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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8-17) 빚진 자(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5. 16:11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기에 그 복음을 받아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에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일면 생각하면 듣는 사람에게 복음인데 전하는 사람이 감사할 일이 무엇인가 싶겠지만 바울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기를 전하는 것으로 삼았으니 누군가가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 정체성을 두고 있는 바울 사도와 같은 이들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나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세계로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돈을 꾸었거나 아니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에 이렇게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체감 상 당연히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빚>은 어떤 빚인가요?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나오는 죄를 영어 성경에서는 debt 즉 빚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킹제임스 버전-최근 버전은 주로 sin으로 기록) 이것은 옛날에는 죄 지은 자나 빚진 자나 다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자는 그 죄 값을 다 치를 때까지 빚진 자와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당시 헬라인이나 야만인과 같은 이들에게 뭔가 갚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요되는 비용을 자신의 기술인 천막 깁는 노동을 하여 벌어서 충당하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갚은 것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용역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에 조명을 밝히기 위하여 전구를 하나 샀다면 그 전구는 나에게 빚이 있습니다. 내가 그 전구에 대한 계획과 구매하거나 만든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전구는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전구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전구는 죽은 것입니다. 목적 안에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목적이 있었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빚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행하실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인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빚진 자인 것입니다.


그 존재의 목적,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진 빚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연상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보고서 ‘저 사람의 삶과 말을 들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겠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혈통으로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또 그 사람의 삶이 모양이 어떠한 사람이든 무관하게 자신은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전하고 살아 내어야 하는 빚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진 빚인데,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이 교회를 세우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 들였으니 바울 사도는 빚이 탕감 받은 것과 같아서, 그 채권자이신 하나님께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인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바울 사도가 전한 이 로마서의 비밀을 알고서 그 놀라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우리가 로마서를 대하는 바른 모습일까요? 아니면 로마서를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로마서를 잘 아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다 유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런 것은 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감탄하라고 한 고백이 아니라, 이 로마서를 보는 모든 사람도 다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에 ‘바울은 정말 겸손한 사람이야’라든가, ‘바울의 안목은 정말 놀랍고 로마서는 정말로 대단한 책이야’라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로구나!”하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없는데 하나님께 빚을 갚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 아래 거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빚진 자라는 것을 안다면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삶이라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이루어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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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영어로 이 부분은 to belo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들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아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의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어떤 공간 안에 있거나, 조직 안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당 안에 있다는 것이나,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또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의 범주에 속했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과는 ‘사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고양이는 ‘고양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사과(a apple)는 the Apple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믿는 기독교인을 a (little) christ라고 하고 예수님을 the Christ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세계 안에서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입니다. the Apple은 사과 실물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는 생명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과 동일한 과일, 즉 실존을 우리가 사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정체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정체성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속한 실존적인 개체,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또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집 앞에서 보는 사과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과는 전혀 다른 사과(a apple)지만 또 같은 사과(the Apple)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졌지만 또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그 이름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다양함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생명이 같다는 것, 정체성이 같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과 정체성도 그리스도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모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육신의 삶의 풍성과 세상적인 성공과 복을 받는 것을 위하여 믿는 것이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주여! 주여!’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다 헛짓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 예수님의 운명과 같다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같아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랬다면 자신도 이룰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나도 힘써 노력해 보자’라는 것은 흉내 곧 노릇은 할 수 있어도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그 유전자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생명은 그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정체성은 행위나 공로에 속한 것이 아니니 노력하는 신앙, 신념으로 버티듯 하는 신앙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공로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고 아들이 되려는 모든 믿음은 자기 생각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신앙입니다. 기도 많이 한 것으로, 성경 많이 본 것으로, 신학을 공부했다는 것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정하거나 옷 입는다는 것은 모두 존재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유와 공로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신데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었을 때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의로움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로움으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남을 섬김으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는 그런 존재로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삶이라서 한 개의 사과를 보고 사람들이 ‘사과’라고 하듯이 그 삶이 예수님의 생명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하거나 <힘쓰고 애쓰고 깨어 있자>고 신념을 동원하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달리 열매입니까? 그 생명 DNA만 있으면 다른 것을 맺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이 열매고 생명입니다. 그러니 성령이라는 생명이 자신의 DNA가 되기만 하면 아니 맺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열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을 안다면 노력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서 어떤 말씀이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미완이라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면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생명도 날 때 그 생명의 이름을 가지지 않고 살면서 노력으로 그 생명의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사람답게 살려고 하기는 해도 태어나 보니 아직 사람이 덜 되어서 노력해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채우는 이가 없습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그 자체로 온전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나 깨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과는 어떤 짓을 해도 사괍니다. 짓눌려 다 일그러져도 사과고, 반이 갈라져도 사과며, 맛이 없어도 사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생명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생명으로 났다면, 노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니 이것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그런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것은 동쪽 끝에 가도 여호와가 계시고, 서쪽 끝에 자리를 펴도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리스도며, 자기가 아무리 그리스도 아닌 것으로 살려고 해도 성경을 구구절절 지키고 살고 있는 생명인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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