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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다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8. 10. 12:26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들 셋을 얻고 장자에게 아내를 얻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들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므로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 동생 오난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계대결혼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둘째 오난은 형수에게서 얻는 후사가 자신의 후사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형수의 몸 밖에 사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또한 악함으로 보셔서 오난까지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있었음에도 전통에 따라 다말을 셀라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셋째 아들도 죽게 될까 염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셋째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을 때에 창녀로 위장을 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게 그 화대에 대한 증표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말이 잉태하게 되자 유다는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심문할 때에 다말이 자신을 잉태케 한 자의 증표로 유다의 물품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때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쌍둥이)이고, 베레스는 예수님의 혈통에 속하게 됩니다.(마 1장)


이 사건은 우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아들을 얻는 것이라는 점에서 부도적적으로 보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면 아마 롯의 두 딸이 자기의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각각 아들을 낳은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이 낳은 아들들은 이방 족속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다말이 낳은 아들 베레스는 예수님의 혈통에 속하게 되며,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섯 명의 여자 중에 다말이 속하게 되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여자가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의 후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의 뜻을 시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이 여자와 같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듭난 생명을 얻어야하는 운명을 가진 모든 사람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말과 롯의 두 딸이 차이가 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거듭난 생명을 얻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그 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는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로 인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인 다말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백성인 남자의 아들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반면에 롯의 두 딸은 자신들의 의가 아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롯의 큰 딸이 동생을 꼬일 때에 하는 말이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창 19:31-32)라고 말을 합니다. 롯의 두 딸의 일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세상의 도리를 좇은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이고, 다말의 일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후사를 얻고자 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이 가하냐?’는 것일지 모릅니다. ‘딸과 아버지보다야 낫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보고 ‘나보다 옳다.’고 했습니다. 다말이 잘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입니다.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는데 예수님께 낫게 해 달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따라가니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15:26)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라고 답하고 간구하였더니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며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나,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 것이나 우선 보기에 그 부정함의 차이가 있어 보이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에 있어 행실이나 행위가 그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과 의로움을 따질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거듭나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되는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되냐?’ 라든가,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막 해도 되냐?’와 같은 것들입니다. 먼저 말씀을 드릴 것은 온전한 믿음은 아무 짓이나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뭐든지 맘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과 항변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하면 안 되니 하는 것>과 <할 수 밖에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사람이 그 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DNA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해야 뭔가가 된다니 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때로 못 지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이 그렇습니다. 거듭난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적질하고 간음할 방법이 없습니다. 개가 ‘야옹’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성경대로 살아야 자신이 목적하는 것, 천국에 가는 것이나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자기 의지로 해야 하지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 둘 중에서 누가 더 도덕적이고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물론 유다와 다말의 일은 범상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말이 바란 것은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가 되었기에 그 후사를 이으려 했을 뿐입니다. 롯의 두 딸과 같이 세상의 도리를 좇은 배필을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정해진 혈통 안에서 후사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세상의 가치관을 채웁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그래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부자가 되고 더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라 여기는 세상의 도리를 좋은 배필을 구하고 삽니다. 롯의 두 딸의 모습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낳은 모든 후사는 다 이방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롯의 두 딸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자신들의 아버지의 후사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후사를 잊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세상의 도리였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에 와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의 가치인 재물과 명예(세상의 도리)를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와 그 신앙이 이방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말은 달랐습니다. 그가 좇은 것은 세상의 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집안의 여자로서 유다의 후손을 낳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기에 자신이 창녀의 차림이 되고 또 그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본분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어떻게든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아들과 같이 다시 후사를 얻을 수 있는,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세상의 가치관을 다 버리고 그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존재인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요셉의 사건이 전개되는 중간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과 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상관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일은 어떤 일인가?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되는 과정의 시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 참 생명을 가진 교회 공동체는 어떤 사람들로 시작되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말과 같은 사람,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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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보는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8. 8. 10:43 Writer : 김홍덕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 즉 거듭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 곧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생명 공동체라는 것은 인위적인 규칙이 다스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본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공동체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흐름이 천지창조와 아담, 노아의 홍수 등을 거쳐서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의 여정이 시작된 이후에 그의 아들 이삭이 낳은 쌍둥이의 동생 야곱이 다시 그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서 정착하고 사는데 뜻하지 않게 야곱 곧 이스라엘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되고, 정작 그 아버지인 이스라엘은 아들이 죽은 것으로 아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잠시 난데없이 유다와 다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요셉의 일은 결국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이 애굽에 들어와서 사는 계기가 되고, 그 이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종살이 시키게 되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라를 이룬 나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혈통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준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유대인이 아닌 민족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저의 말과 같이 할례나 혈통이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작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양은 다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의 혈통이나 관습에 있지 않다고,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작 신앙의 모양은 성경을 형식으로 지켜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셉의 일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인하여 이 땅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지와,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어떤 의가 삶을 다스리는 사람인지를 요셉을 통해서 또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요셉과 예수님의 일이 오버랩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성경의 주제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관한 말씀이니 당연히 모든 말씀은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셉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 아버지와 형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팔아 버렸듯 예수님께서 팔리시고 또 이스라엘에게 있어 죽은 아들이었던 요셉을 만남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해 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우와! 하나님께서 예수님보다 수천 년 전의 사람인 요셉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예언하시고 그대로 실현됐네!’라는 감탄을 하고, 그 놀라움이 성경의 신비함이라 생각하는 것에 그치면 곤란합니다. 성경에 천하에 둘도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의 일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지구 반대편에 어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을 객관적 지표로 확인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경을 사람들에게 왜 주셨을까?’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불가사이한 것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그 문명과 과학으로 증명하는 숙제로 성경을 주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자랑하시려고 주셨을까요?


이야기를 달리 해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심청전을 이야기 해 볼까요? 그 저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저자가 심청전을 쓴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라도 심청전을 읽고서 심청이와 같이 효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심청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 모든 드라마와 문화는 그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 그것을 접하고 소비하는 사람과 관객들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또 그 삶에 있어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창작하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드셨기에 그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본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려고 심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성경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욥기를 어려운 성경으로 보는 것도 그 안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이라는 학문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리 상세하게 알아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 앞에서 그 지식을 뽐내는 것 이외에 쓸 일이 아무데도 없을 것입니다.


요셉에 관한 말씀을 읽고 또 들을 때에 <오늘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야 요셉이 절묘하게 예수님을 표현했구나?’가 아니라 ‘이 요셉의 일도 나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말씀이구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모든 말씀의 주제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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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곧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옷도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해 입혔는데 그러다보니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볼 때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언사가 불평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37:1-4)


그런데,

요셉도 성경을 보면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기에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다른 가족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자신의 꿈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형들의 시기가 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런 상황, 아버지가 더 사랑해서 채색 옷을 입히며 다른 형제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표현되었기에 형제들이 이미 마음이 불편한데 불에 기름 붓는 격으로 그 형제들에게 형제들이 미워하는 요셉을 섬기게 될 것이라며 꿈 자랑을 하고 있는 이 요셉의 모습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이 시간에 한 번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요셉과 예수님을 비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이 땅에 보내시었는데(창조하셨는데) 예수님의 처음은 보통의 사람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채색 옷을 입었지만 요셉은 그냥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듯,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잠깐 이 부분을 언급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듯 우리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과 같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 초자연적인 기적 자체가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예로 든다면,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능력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었다고 하는 인생을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신데, 그 능력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이기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육신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그때 살아난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든지, 아니면 지금도 정기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해보면,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하여 당시 유대의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계셨고, 그것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첨언한다면, 성경에서 옷은 보통 신분을 말합니다. 채색 옷은 예수님께서 얻으신 신분, 백성들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 여김을 받은 그 여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아주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인 이스라엘이 채색 옷을 입혔기에 형제들이 미워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말씀을 행하시므로 사람들에게 선지자로, 또 메시아로 인정받는 상황이 되었는데 같은 민족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아주 싫어했다는 것이 요셉과 예수님이 공통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12형제들 중에 11번째 아들입니다. 다른 형들이 볼 때 요셉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이미 장성했기에 가사(목축)에 도움이 되고 있었지만 요셉은 그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형들의 안부나 확인하는 정도 밖에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나 공로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어린 동생일 뿐이었는데, 그렇게 한 것도 없으면서 집을 위해, 또 아버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형들이 그 어린 동생에게 절하게 된다고 하니 참 가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잘 안위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율법을 잘 지키고, 또한 백성들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온 나라가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까 힘쓰고, 금식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하나 나와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목숨을 다해 지키고 있는 율법은 막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하니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셉의 일과 또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의로워지려고(인정받고 복 받으려고)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취하고 있는 삶의 모양이 결국 그들이 가진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무엇이 가치가 있느냐의 관점이므로 그것은 결국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으로 자기 삶의 채근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혈연이나 사회 조직에서 그렇게 주장을 하고 요구하며 심지어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관, 이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께 무엇을 하여야,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가치관의 뿌리가 행동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그 공로를 자신들과 비교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교회에서 또 기독교 신앙의 세계 안에서 늘 그것이 기준이 됩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

성경을 얼마나 보느냐?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

교회 행사에 얼마나 참석하느냐?

교회에 봉사는 얼마나 하느냐? 등등


이런 것들을 늘 판단합니다. 딴 것 볼 것 없습니다. 위의 내용들은 주보에 다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했는지 알리고, 또 남이 얼마나 했는지를 보라고, 또 그것이 누적되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관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보았듯이, 지금도 신앙이라 교회가 요구하는 것 또 성경에 기록된 것을 얼마나 몸으로 행위로 또 소유로 지켜내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관점, 그 가치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가치관과 생각은 모든 행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공로와 소유의 드림)=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고, 교회 시스템이 그렇게 운영되고, 주보에 공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가치관이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또 누가 아프거나 하면 옆에서 가장 먼저 권면하는 말이 “하나님께 뭐 잘못 한 것(Do or Have)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혹시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봤다면, 어디 좋지 않은 곳을 가는 곳을 봤다거나, 그런 공로의 신앙에서 볼 때 해서 안 되는 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면 스스럼없이 ‘그것 때문에 그렇다.’고 단정하고 소문을 냅니다. 이것은 소문을 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심지어 나름 영발이 있다는 사람들의 행태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하고선 예를 들면 ‘십일조 잘 하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 하나님께 해야 할 <행동>을 잘 하고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면 떳떳할 사람이 없습니다. 행위로 의로워질 사람이 없다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사람이 곤고하게 된 이유가 ‘너의 행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나 신앙이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는 형들의 관점,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과 제사장의 관점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순종하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는 가장 근본된 것은 사람 자체로는 온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막내급 요셉이 하는 것도 없이 형들과 아버지의 절을 받는다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것도 모자라서 율법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육신으로 사는 인생의 일이 잘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람이 행동으로 얼마나 성경을 지키고 교회에 공로를 쌓고 재물을 드리느냐에 종속된 것이라는 신앙은 전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 그 자체는 온전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요셉의 일과 또 예수님의 일을 볼 때 생각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이라는 것, 또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행위로 의로워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로서 의로워진 사람, 그냥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또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 그 자체로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 그 하나가 삶과 신앙에 있어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요셉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것을 계속 이야기 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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