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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에 대한 글을 마치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30. 08:59 Writer : 김홍덕

율법은 엄연히 법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키지 않거나 못하거나 범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행함으로, 지켜야겠다는 의지나 신념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있다는 믿음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는 사람의 유전자가 가진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직립보행하게 하고, 말하게 하며, 생각하게 하고,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끼리의 유전자가 가진 법은 거대한 덩치와 긴 코와 그 큰 덩치와 힘을 가졌음에도 풀을 먹게 하며 그 큰 힘으로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법입니다.


율법도 그런 법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법으로 인생 안에 있으면 십계명도 지키게 되고,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가치관이 구분되지 않은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목적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도록 창조나 일을 하시지 않기에 안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이 이루어진 존재, 어떤 날도 안식일과 같이 안식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됩니다. 


또 그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콜라가 담긴 콜라병은 콜라가 됩니다. 사람들이 콜라가 담긴 병을 보고, 콜라를 달라고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은 병을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즉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십일조를 합니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만 드리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표로 그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가진 법이 삶으로 표현되고 삶을 주관하므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 어느 한 순간, 어떤 한 조문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고기가 물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물고기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모두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법리와 같이 생명으로 있어 그것이 표현된다면 율법은 어떻게 어길 수도 없고, 지키지 못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율법과 또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지키려 하는데 안 된다면 그것은 자기 안에 그 율법의 법리와 생명의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를 깨닫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주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의로서 하나님의 법을 반대 방향에서 지켜서 의로워지려 했기에 아무리 해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죄를 깨닫고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 해 보니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자신이 지난 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는지, 그 자신의 방법이 틀린 것이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것이 아닌 자기가 자기 삶을 주관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으 육신으로 수고하고 노력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애굽의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대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된 안목 안에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그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께 이르려했던,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던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되는 법,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법에 자신이 속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기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회개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이고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당연히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심겨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싹이 나서 거듭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법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게 됩니다. 


그 상태가 바로 육신이 말씀이 된 상태고 그 말씀이 육신으로 표현되면 모든 율법이 완성되게 되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바로 그 상태, 그 존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스도의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법으로 삶이 표현되는 상태가 되면 예수님의 오심이 그 사람에게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심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말씀에 대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되시는 뜻과 방향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께서 내용이 되시고 내 삶은 그것을 표현하는 양식이 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고, 영이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니 이 육신은 너무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부끄러워 이것을 감추려고 육신의 행위로 이를 가리고 하나님께 이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의 정체성, 육신을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이 삶의 의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면서, 그 보이신 삶이 율법의 완성이고, 하나님의 뜻과 우리 삶의 존재 목적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면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 의에 이르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반대 방향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 마음이 우리의 자리가 아님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좇아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고 믿음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과 영광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것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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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므로 할례를 받은 이들이나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나 모두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또 할례를 행하고 그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롬 4:11-12)


이런 성경 구절은 어렵습니다. 제가 애용하는 개역한글판은 그 문맥으로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도무지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관계가 무엇이고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궁금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야기 해 나가는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으로나 아니면 또 다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함입니다. 그 결정적인 것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을까?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할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는 아들 이삭을 얻기 전에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아들 이삭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믿음을 인친 것, 쉬운 말로 하면 그 믿음이 표현되고 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이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삶의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란 그 생명만의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은 그 생명의 법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법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할례를 받아 하나님께 의로워지려 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명을 좇아 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할례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으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의무와 같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는 전적으로 그 믿음이 표현된 것입니다. 할례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벌주시니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또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것에는 이 믿음과 율법을 알지 못하고 또 무엇보다 알지 못하면서 교회의 운영과 교역자들의 생계를 위하여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들어졌기에 그 본성 안에 어떤 행동을 해서 속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자꾸 교회에 가면 이것저것 해야 된다고 가르치니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 부흥하는 교회, 큰 교회는 왜 잘 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런 교회와 그런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안목은 하나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라는 타락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하고 그러려면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세상적인 욕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논리가 안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으니 복채를 내듯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니 어떤 시대를 살더라도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려면 먼저 그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미운오리새끼가 날아가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백조가 되기 위하여 뭔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날아가는 백조가 바로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아브라함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서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데 어떤 행함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인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비췬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이 이것이고, 요한복음에서 빛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빛이 있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면 됩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 주신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나를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자기가 깨달은 인생의 존재 정체성대로 살게 됩니다. 그것이 행함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은 생명의 본능적 행동이기에 본능에 속한 그 생명 만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이 단지 살아갈 뿐인데 나타나는 모습,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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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1-25) 일과 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28. 18:55 Writer : 김홍덕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기록된 것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주시고, 기도하면 들으시고, 십일조를 하면 복을 주시고, 사랑하면 은혜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다 조건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보응(삯, 급여)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모두 사람이 무엇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시는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고 있는 은혜로 여기지 않고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빚이란 ‘사람인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은 자기 행동에 대하여 보응할 빚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우는 대로 또 성경을 읽고 자기 생각에 ‘이러면 되는 것이다.’라는 확신 같은 착각에 빠지면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보응하셔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신이 되고, 빚진 것을 갚지 않는 악덕 채무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어 가시는 이도 여호와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다른 신도 아니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신들 중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신으로 사람에게 간택 받으심을 기뻐하시면서 사람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사람이 구하는 것이라면 다 퍼다 주시는 간도 쓸개도 없는 바보가 아닙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에 어떤 행동이나 소유의 드림에 반응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께 가서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내가 많은 신들과 세상의 가치관 중에서 당신을 택했으니 당신은 나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구하면 내어 놓으십시오, 대신 내가 당신이 시킨 대로 서명으로 <예수 이름으로>라고 서명은 하겠습니다.’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그 청구가 더 효과적이도록 하나님께서 뜻하신 생명이 있는 자의 법과 행동과 모양을 기록한 성경을 보고서 그 행동을 흉내 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노릇>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양을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했으니 그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간혹 아픈데 작정 기도하고 주일 예배 빠지지 않고 금식도 하면 다 나을 것이라 믿다가 죽는 기막힌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정말로 터무니없는 믿음에 대한 착각들이 단순한 착각을 넘어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것’이라는 법이 되고 또 주장이 되어 남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그 말하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시험을 쳐서 권위를 부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이런 일과 동일한 일들이 바울 사도의 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시대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믿느냐와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에 종속된 문제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하고 드려서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행동에 대한 빚이 있는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신앙과 행함이 바로 일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믿음을 인정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뭘 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해서 떠난 것은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기에 부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이 자기의 어떤 일(앞에서 말한)로 인한 보응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 믿는 것은 복불복이구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투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임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생은 태어나서 인생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인생 그 자체가 이미 거저 주신 것이고, 이 삶의 기회가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은혜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아무 것도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정말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두고 고난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인생은 자기 힘으로 존재하게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인생은 이 인생 자체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생의 존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과 같은 기회입니다. 우리 인생이 임의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이도 아닌 만유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을 때 이미 하나님이 택하시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담을 그릇으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셔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에게 자기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 믿었더니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신 것이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삯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은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형상을 표현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나라는 인생을 조성하신 것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것도 한 적이 없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사람은 이 놀라운 은혜를 압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 뜻을 가진 이와 그 뜻을 표현하는 존재의 관계라는 것을 아는데 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려 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나의 정체성,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 내 삶으로 표현되기만 하면 그 모든 행동과 삶이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데 왜? 무슨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서 무엇을 얻고, 공로와 소유를 드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이 인생과 육신의 목적이 그것이 아닌데.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인생의 존재 자체가 은혜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삯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갚아야 할 것이 있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어야 할 존재의 빚이 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께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천지의 주관자이신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나타낼 존재를 만들면서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것을 빠트렸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알아도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서, 인생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부족하다고 여기기에 뭔가를 자꾸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다 먹이시는 하나님께 자기 인생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행하기에 늘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믿음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의로워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반응하고 보응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서 의로워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믿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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