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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6)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9. 09:44 Writer : 김홍덕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행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사람이 착한지 악한지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 사람을 가늠하는 것에 있어 조금만 더 깊이 있는 상황이 되면 그것이 달라집니다. 깊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를 알면 행동보다는 그 생각이 그 사람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동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어떤 행동에 대하여 말을 하다가도 그 본심을 알고서 그 행동을 재조명하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로움으로 여기시는가?’ 하는 것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 안에는 자기가 하는 행위와는 다른 생각이 있지만 어떻게든 행위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는 금전적인 아까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으니 그 마음을 억누르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좀 더 본성적으로 본다면 누구나 성적인 욕망이 있지만 그것에 대하여 정말로 잘 절제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말과 행동을 다스려 조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들을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의 행동보다 그 마음의 생각을 알면 행동도 재평가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행위보다 그 마음에 있는 생각을 아셨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시 본다는 것은 뻔한 일인데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다 된 것으로 여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마음에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에 대한 찜찜함을 가지고 살고 행여 누가 그것에 대하여 언급이라도 할까 전전긍긍하기까지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고 또 복음 안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고 마음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신앙의 근간인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로 여기시는지의 문제와는 연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과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를 의로 여기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생각과 본성과 욕망과 욕심과는 다른 행동을 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고, 또 자기 마음과 행동이 같기에 그것이 다른 이중성으로 신앙적 의문이나 갈등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같은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의 중심에 있는 생각의 표현이고 실천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법이 사람 안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형상(image)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법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안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생각과 가치관과 안목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씀과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상충되는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만 알면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신 것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말씀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어떤 행함이 있다는 것은 어떤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무엇을 하는 것이 목적이 있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곰의 탈을 쓰고 연극한다고 곰이 아니듯이 행동을 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약하면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살아 있다면 그 생명의 유전자에 맞는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자기 안에는 아까운 마음이 있지만 십일조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 마음에는 욕망이 있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참아내고 고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 행함은 다 믿음이 없는 것이기에 그런 행함을 신앙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인 믿음만 있으면 그 생명으로 인한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이 안에 있으면 그 생명의 본성에 따르는 행함은 거부하려 해도 나오는 것이 믿음과 행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시다고도 하시고 또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또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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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6) 남을 판단하는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6. 09:18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고 남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다못해 길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되면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거의 일상이 됩니다. 이렇듯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일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남을 판단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나마 좋은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음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겉모습과 소유의 정도 그리고 지식의 정도와 같은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는 것이고 형식이고 DO와 HAVE의 세계에 속한 것이고 그 결과들인데, 그것이 사람과 세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형식, 곧 외모와 가진 것과 지식의 정도와 교양의 정도와 같은 것을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사람 자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이 본질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이 가진 가치관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외모와 행동과 쌓은 능력은 그 사람이 무엇이 좋은 것이고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는 본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이 바로 그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돈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아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유일무이한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그 피조물을 판단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급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당시의 교회들, 로마의 교회를 비롯한 당시 세계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함에 있어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유대인이어야 하므로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경계한 것은 바로 그것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사람의 외모, 곧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기에 그것이 의로워질 때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다는 신앙관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를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유일한 죄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자신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세상과 사람의 정체성을 부여한 존재인줄로 착각해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 정체성으로 판단하여 본질로 알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고 또 잘못된 신앙의 완결판입니다.


그런 신앙은 지금도 만연합니다. 교회에 다니고 싶은 사람들이 부담을 가지는 것들도 대부분 이러한 것들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담배를 끊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갈등하게 됩니다. 왜 그런 갈등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라는 공식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담배를 피우느냐 아니냐하는 행동을 기준으로 정의가 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수입 전체로도 최소한의 지출을 감당하기 힘든 사람에게 10%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가 아니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는 공식이 그것입니다. 이것 또한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행동을 기준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입니다. 사람의 외모와 행위와 같은 겉모습과 형식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을 꾸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외모와 겉모습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사람의 다양한 겉모습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을 표현하는 다양성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위의 다양함은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 그것 하나만 알아도 사람의 다양함은 은혜이고 풍성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면 그 다양함을 분류하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갈라서 이쪽은 옳은 것, 저쪽은 부정한 것으로 나누고(이런 것을 이분법적 사고라도 함) 또 잘 나누는 것이 지혜고 또 그렇게 한 다음에 모든 것을 그 기준에 따라 분류된 옳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모두 사람 안에 선과 악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선악과로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그 자리에 거하는 것이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 자리입니다. 이 하나를 알면, 세상은 판단할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풍성의 풍성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습들은 그것 중에서 어떤 것이 선한 것이냐를 구분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을 보는 사람에게 사람의 어떤 모습, 어떤 행위도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은혜고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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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6) 하나님의 생각과 심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3. 12:47 Writer : 김홍덕

예전에 아파트에 살 때 경비실에 잠깐 근무한 아저씨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 분은 청소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 문제는 자기가 청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하다 보니 주민들이 때로 청결치 못하게 만들어 놓으면 잔소리와 불만이 많았습니다.(그것 외에는 대체로 친절했음) 그래서 자기가 분리수거를 잘 정리해 놓았는데 보지 않는 사이에 누가 엉뚱한 것을 버려 놓거나 하면 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아저씨는 해고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이없게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청소했는데 어느 한 부분을 놓쳤는데 그 이유로 해고가 된 것입니다.(물론 청소와 관련하여 때로 욕하기도 한 것이 쌓이기도 했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은 그 역량과 본성을 하나님의 의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할 때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것을 채워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신앙인들에게 있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서 어떤 이는 이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성경의 다른 것이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학교’가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성가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기도’가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성경공부’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다투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사람이 어떤 것을 스스로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기준이 죄의 핵심입니다. 그 의를 기준으로 무엇인 선하다, 무엇은 악하다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고, 그렇게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어떤 의를 담아야 하는지에 따라서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그릇에 자기의 의로움,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담는 것에서 신앙과 삶의 모든 타락과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죄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자기 기준,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사람이 스스로 가진 의가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애시 당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창조주가 만드신 것을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사람의 외모와 그 행동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어떤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이 가진 의(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신학생이 데모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뭔가를 주장한다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더 잔혹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예로 든 경비 아저씨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의로움으로 자신이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의를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의로움의 세계에 속한 사람, 그 의가 다스리는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행위로는 그 어떤 의도 완벽히 지킬 수 없기에 반드시 자기가 가진 의로움으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다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다면 사람을 볼 때 구분이나 판단할 이유나 원인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신 세상을 사는 사람,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마음으로 보는데 무슨 재주로 그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당을 나누고 구분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수 있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어 그 의에 의한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구분되고 판단이 되는 것은 오직 사람이 자기 의를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 그것만이 불편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은 그 마음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 십자가의 도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하며 사람의 외모와, 세상의 기준인 공로와 소유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특히 신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비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졌으면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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