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성경에 나오는 것은 그 의미가 있다. 피는 생명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뼈는 의를 나타낸다. 덧붙이자면 그래서 뿔도 의를 나타낸다. 뿔은 뼈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의는 내용이다.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또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만들어 내는 것 그 모든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의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의는 모든 표현된 세계의 근원이고 아버지와 같은 것이 바로 의다. 에스겔서에서 뼈가 군대가 되는 말씀도 결국 의가 있으면 살이 붙어 군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죄수는 쉽게 죽지 않았다. 십자가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말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며칠 동안 살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죄수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또 죽음을 당기기 위해서 뼈를 꺾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한 두 강도의 다리는 꺾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때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뼈를 꺾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전하시기 위하여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아들 예수가 사형수가 되어 죽어가는 순간을 사실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남기신 것은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지만 의도하심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뼈가 꺾이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육신이 상한 것이지 의가 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형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되셨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송사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문할 때에 고발하는 자들의 고발이라는 것이 고작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에 다시 짓는다고 했다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건 로마의 총독이 볼 때는 그냥 사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사기로 나라를 팔 것이 아니라면야 그 정도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실 동안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발에서는 아무 답변도 않으셨고, 오히려 괜히 예수님을 치는 자에게 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하실 정도로 떳떳했다. 그런데 단 하나,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이냐?”라고 했을 때 그 질문에 답을 하신 것이다.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유대인들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과 같은 신분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행실과 율법을 어기는 상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마저 침묵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 자기 육신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라는 그 하나님의 의는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꺾이지 않으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십자가에서 의가 꺾이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셨으니 뼈를 꺾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죽으심이 바로 의를 보존하시는 역사하심인데 그 뼈가 꺾이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죽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육신을 어떻게 쓰다가 하나님께 갈 것인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육신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는 존재다.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의인데 그것이 꺾일 리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뼈는 예수님의 의를 의미한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이시다보니 그 의에 대하여는 굽히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심문을 받고 있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지 않으신 것이다. 즉 의가 꺾이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동네 이장 아들도 못될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한 것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고, 또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삶이지만, 그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 때는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느라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때는 신념 같은 것 필요 없다. 그냥 그렇게 된다. 그 하나님의 의는 우리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죽은 자와 같이 되어도 꺾이지 않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드디어...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6. 7. 20. 09:49 Writer : 김홍덕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좋은 키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늘 있었는데,

그래서 언젠가는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사 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일반 키보드보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지만, 

원하는 품질을 제공해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경험이 없으니...)

그러나 드디어 장만....


타이핑하는데 적어도 손가락에 힘은 들든다. 소리도 경쾌하고..(청축이라 더한듯)

일반 키보드에 비해 책상면에서 키패드까지 높이가 좀 높은 것이 생소하지만

타이핑에 도움이 될 것 같다..(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건만...)


별일 아닌 소감...



'잡동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좌경화는 이단의 길  (0) 2025.02.23
21일간 글쓰기 도전  (3) 2024.11.05
바람의 소리  (0) 2015.10.19
삼성의 팬으로서...  (0) 2014.11.13
세상은 정말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0) 2014.11.1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복음 19:28-30) 다 이루었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19. 08:2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물론 가상 칠언의 마지막은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다 이루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죽는 것이 다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더니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며 오히려 죄인으로 삼아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에 메달아 버렸는데 이것이 다 이룬 것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 잘 이루어졌다면 금의환향하는 모습이 되어야 이룬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러 왔더니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것이 다 이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유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니 달린 이유부터가 사람들의 조롱이었다. 그런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신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의 시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상하지 않는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지,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어기고, 또 잉어의 몸이 되었을 때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냐는 비야 낭과 조롱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눈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죄인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군보다 적군이 더 가치를 아는 법이라서 그런 것일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더 죄인 같을수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다.(행악할수록 은혜가 많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목과 다른 안목으로 볼 때 죄가 많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그 눈에 보이는 본질이 흥하고 그 가치 안에서 선하고 의로우면 복을 받고,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가치관이다. 세상의 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임금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흥하면 훌륭한 임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의는 그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그 세 번째가 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의를 가지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하러 오신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가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눈에 보아지 않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고, 자동차는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심청전은 효도에 대한 생각이 나타난 이야기와 책이고, 먼 거리를 편하게 가고자 하는 생각이 열차와 비행기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이치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의와 생각이 표현된 것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이 된 아들은 나타난 육신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삶,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 그것이 어떠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아들인데 그것으로는 안 되고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왕이라고 인정하는 어떤 능력이나 공로를 행하거나 어떤 신분이나 가치를 가져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현혹하는 말, 그것이 선악과를 부축인 뱀의 말이고, 그 마음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신 포도주를 대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가치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십계명을 주실 때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심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인데, 그 존재가 다시 어떤 형상을 하나님으로 섬기려고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십계명이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섬기려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해야 한다면 조건을 만드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육신과 세상의 조건이 뛰어나면 사람들에게 우상과 같이 불리고 대접받는 것이 그것이다.


정말로 잘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순간의 모습이 어떤가? 과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성공인가?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영광을 받는 것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성공과 같은 것인가? 하고 있는 사업이 남들과 달리 교회에 다니는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성공과 같은 것인가? 육신의 병이 기도했더니 나았다는 것이 육신이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인가? 말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 아전인수 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나 램프의 요정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도 아니다. 절대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육신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육신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며, 신앙에 힘입어 가난한 자를 구제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행위로 이룰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대단한 신앙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에는 반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벌로 읽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의미고, 의미가 되는 것이고, 존재의 이유가 되는 관계고, 의미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두신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들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아들이라는 것이 나타나면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고 모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이룬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신 것은 ‘너 같은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조롱하는 자리, 자칭 아들이라 하는 것을 심판하여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정말로 역설적인 것이다. 이를 두고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 육신의 공로와 소유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계의 의가 버리고 인정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은 그 세상의 가치관이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인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은 예수님과 같은 법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 모두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뜻대로 우리가 이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가려 한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망상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늘 죄인이라는 것을 자기 운명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은 육신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주장하는 이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섬기러 왔다고 하심이 그것이고, 의에 대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죄인은 곧 종이며, 종은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나를 죄인으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곧 세상의 대변자들이다.


그렇게 자기의 생각과 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것이니 꿇어라!’는 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신앙인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과 같이 할 것이 아니라, 그 주장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 주장하는 바에 따라 이끌리듯 살아가는 것(이것이 순종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은 것이고, 조롱하는 것이고, 핍박을 받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쓴 소리해서 듣는 반응일 핍박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조롱이고, 신 포도주다. 그렇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일이 오늘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