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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8-17)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 11:49 Writer : 김홍덕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상당히 왜곡되었습니다. 먼저 여기에 나오는 <의>에 나온 개념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오류에 대하여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설명함에 있어 제대로 된 것, 온전하고 바른 목표를 소개하는 것이며 충분하고 또 그것이 옳은 설명이겠지만, 오류의 범위가 넓고 너무 상용화되어 있어 이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 곧 의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이때 이 ‘의’,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진 의가 어떤 의, 정확히는 누가 볼 때 의로운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 ‘의’는 세상의 관점에서 의롭게 여기는 것에 치우쳐 있습니다. 남을 구하다 죽은 사람을 의사자로 지정할 때 그 의와 맥을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의이며 그 의로움을 가진 사람이 바로 의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고자 하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그러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하다 죽는 것과 같은 것은 의로움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 반문에는 세상의 가치관에서 말하고 있는 의가 전부라는 생각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반문에 대한 답은 고린도전서 13장 시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듯, 하나님의 의로움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에서는 어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로움은 세상의 의로움과 무조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동일하게 사람이 사람을 구하다 죽는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을 살던 사람이 남을 구하려고 죽는 일과 같은 의로움은 ‘십자가의 도’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의롭게 여기는 것이 전부라면 세상에서는 의롭게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행위 자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생명으로 살던 사람의 의로움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것에 있어서 의인은 세상의 기준에 의한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의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그 의로움의 모양이 같거나 비슷하게 보여도 내용상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그 본질로 인한 의로움이 나타난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의로움이 무엇이냐에 따라 믿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의인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 가치관이 세상에 속하였으므로 믿음 또한 세상의 것이며 그 세상에 속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결국 세상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복을 받고, 세상에서 도모하는 일이나 건강과 같은 것이 나빠지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두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면 그 믿음은 세상의 가치관과 구분될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나 외모나 그 사업이나 재정적 능력이나 교양이나 고상함과 같은 것으로 사람이 의로운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볼 때 의로운 사람인지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는 예수님의 혈통이나 그 사는 모양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은 보지 않고서 본 예수님의 행동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의로움이란 그런 것이 의로울 때 의로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과 같이 지금도 사람의 행동거지나 그 삶의 형태가 얼마나 고상한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의로움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믿음은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순탄하다고 생각하고,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인생에 곤고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범죄(행위로)한 것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믿음의 목적은 무당에게 부적을 받아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목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육신의 일, 세상에서 도모하는 일의 안위가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것이 의로움이고 그래서 자신은 의인이 되기 때문에 세상의 일에 세상의 법칙과 도리를 뛰어 넘는 기적 같은 축복을 받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지 않아도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고, 회사일은 뒷전으로 하고 교회에만 몰입하면 복을 받아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정말로 잘 나타낸 것이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의 태도입니다. 아이를 유괴하여 살인한 살인범이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믿어 죄가 사함 받았기 때문에 살해된 아이에게 사과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것 같지만 지금 대부분의 큰 교회에 속한 목회자나 신앙인들의 신앙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환호하고 믿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관점으로 사람을 심판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거나, 하나님께 범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생각과 신앙을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그리고 세상의 경쟁에서 이긴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패한 자요, 죄인이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등 가치가 없어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이 의인으로 여기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왜 저렇게 바보 같이 사나?’ 싶은 삶을 사는데 그 삶을 보고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기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세상의 가치관을 이길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어리석게도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깨달아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보증을 받고, 그 죽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기에 죽은 자 중에 두실 수 없어 살아나신 것이 바로 의인의 삶이고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알아서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유와 공로를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육신의 삶으로 소유와 공로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과 같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인데 그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고,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가 그것입니다. 육신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과 같이 우리의 육신을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어 수고함으로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알도록 하는 것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리고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삶의 본성이 되어 사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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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8-17) 신령한 은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30. 10:41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보기 원하는 이유가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를 나누어 주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1-12)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려고 한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세우지는 않았지만 로마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고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바울 사도가 굳이 가서 만나고자 한 것은 로마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바울 사도가 기여했다는 것을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믿는 이들에게 그 신앙의 열매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3)


로마서에는 소위 신학이라고 하는 신앙을 학문화하여 연구하는 이들이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복음의 심도가 있는 말씀들을 시작함에 앞서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로마로 가고자 하는 것은 그 복음의 심도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바울 사도의 마음에서 우리는 복음이라는 것이 믿는 것에서 시작하여 열매를 맺기까지 일련의 성장(생명이므로)이 있음과 그 성장의 내용이랄까 아니면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령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정리해 본다면 믿음이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은사가 있고 그것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에 로마의 성도들을 직접 만나서 그것을 전함으로 서로의 믿음에 안위함이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은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안위함 곧 평안과 안식을 바울 사도 자신은 그것을 전해야 하는 빚을 진자로서 그 빚을 탕감하므로 누리는 안위함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의 시작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다소가 상충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면 복음을 받아 믿기만 하면 되지 그것이 열매가 되기 위하여 신령한 은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뭔가 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기만 하면 다 되는데 행함이나 다른 것이 왜 필요하냐?’ 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 의문들(대표적으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반문과 같은)이 생기는 근본적인 가치 충돌은 이 믿음의 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보느냐 아니냐에 딸린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에 대하여 설명하는 중에 ‘열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열매는 생명 세계의 결과와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신앙의 세계가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공로로 업적을 쌓아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바울 사도는 아마 ‘너희 믿음의 성과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과 같은 표현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믿기만 하면 다 된다는 것에 대하여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고 몸이 주기적으로 교회에 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모든 것을 자동으로 해결하는 시작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만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아무 것,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그 아무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쉽도록 이를 믿음의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행위를 하지 않아도 믿음 그 자체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 된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의로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의문의 열쇠는 그 행함의 정체입니다. 그 행함이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하는 것들이라면 의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없어도 됩니다. 그런 행함은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로마서에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행함입니다.


반면에 야고보서에 말씀하고 있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한 것에 나오는 행함은 이와는 다릅니다. 이는 생명이 살아 있으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행함입니다. 예를 들면 살아 있다면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것과 같은 행함입니다. 그러니 그 행함이 없다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행함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노력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로워질 수 없는 행함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믿음의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야고보서에 말씀하고 있는 행함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 사도가 복음의 열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은사에 관한 것들 역시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도 육신으로 그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그 생명을 가진 동안 그 생명이 생명답게 누리고 또 사람으로서 그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평생을 수고합니다. 복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잉태되고 그 생명으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이니 그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으로서 어쩔 수 없는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복음으로 받아 들여서 생명으로 잉태되고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에서 그 생명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에 대하여 아는 것이 바로 신령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신령한 은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세계와 그 열매에 대하여 전하여 그 내용을 알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기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을 보증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난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이라는 것을 늘 보증 받고 공증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복음의 비밀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는 믿음을 가진 이들의 삶이 왜 그리스도의 삶인지를 보증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신령한 것입니다. 영적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 표현된 사람에게 그 영적인 삶이 하나님의 신령한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증될 때에 그것이 온전한 선물인 것입니다. 뭐랄까 마치 명품 가방을 선물 받았는데 그 안에 그것이 진품이라는 보증서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로마의 성도들이 가진 믿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서, 유대인이 아니라서 자신들이 믿는 복음이 부끄러워하거나 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확증하고 이로 인하여 서로 안식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취지로 로마서를 써 가고 있다 보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다소 난데없어 보이는 표현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신앙이, 어떤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어떤 이들의 눈에는 지켜야할 교리와 지식으로 보이는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지식적인 구조와 신학적 관점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나나의 껍질은 노랗다.’고 바나나의 본성을 표현하듯, ‘개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본성을 이야기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생명의 본성을 말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말씀을 읽고서 ‘이렇게 해야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안에 무슨 신령한 생명이 있어 그 정체를 몰랐는데 ‘그것이 이것이구나!’ 깨다는 생명의 세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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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십계명 중에서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계명을 꼽으라면 아마 이 3계명을 이야기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전제는 계명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한 것이지만. 신념을 가지고 몸을 다스려 계명을 지키는 것을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혹은 불경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정하게 부르거나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이 신에 대하여 가진 기본적인 경외함과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부르는 일에나 호칭을 부여함에 있어 욕을 하는 것과 같은 일이나 부정한 표현을 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계명이라는 것은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계명은 몸으로 시행되고 나타나고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자기 안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에 맞는 행동은 의지나 신념이나 노력 없이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아버지이시니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안에 갈등을 하고, 안 되니 신념을 가지고 노력해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대로 하는 생각과 행동 그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명과 성경 말씀을 지키는 일에 있어 노력을 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그 시작하는 지점은 지키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수고와 공로와 신념을 동원해서 그 자리로 억지로 자신을 데려가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본성으로 인한 것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계명이나 말씀을 지킨다는 것도 바로 그런 세계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서 이 십계명을 보아야합니다.




<이름>이란 어떤 것인가?



제 3계명의 핵심은 <이름>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정체성입니다. ‘사람(Man)’이라는 이름은 모든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이름입니다. ‘사자(Lion)’ 역시 우리가 사자로 인식하는 동물 전체를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영어에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정관사 the라는 것이 있습니다. the가 생명체 앞에 붙으면 그것은 그 종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이름이 정체성이라는 것은 성경 전반에 나옵니다. 천하에 예수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체성이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뇌까린다고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의 제 3계명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하나님을 대하거나 부르지 말고 기대하지 말며 그런 신으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3계명의 핵심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믿고 부를 때는 그 상대의 정체성에 맞게 부르고 대합니다. 언어적으로도 상대가 무엇, 혹은 성별이 무엇이냐에 따라 호칭이 다릅니다. 정체성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틀(문법)을 깨면 가끔 강조가 될 수는 있지만 보통은 틀립니다. 왜 틀리는가 하면 그것은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에게 ‘She’나 ‘그녀’라고 부르면 그것은 상대를 희롱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부르지 말라고 하니, ‘거지 하나님’ 이나 ‘하나님은 무능하다.’는 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너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이런 계명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유와 공로를 의로 여기시는 신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소유의 드림과 공로로서 사람의 의로움을 판단하는 것은 이방의 잡신들의 정체성인데 하나님을 그런 잡신들과 같이 취급하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라 소유와 공로를 의로 여기시는 신으로 대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소유와 공로를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 앞에 어떤 행동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고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행위-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행위를 외식이라 하심)를 많이 하면 신앙이 좋다고 하고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이 공로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여김입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부자로 살게 해 주신다고 믿고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은 사람이 소유를 드리는 것을 의로 여기신다고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렇다고 여기고 대하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사람에게 늘 하시는 질문은 “네가 누구냐?”입니다. 범죄 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정체성의 자리)에 있느냐?”고 물으셨고, 예수님께도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무슨 공로를 드리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여기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온전히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정립되고 정체성이 정해지면 행동은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정해지고 그것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계명은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이 사람에서 하나님께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는 방향을 가진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어떤 존재로서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가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왜 만드셨는가 하면 하나님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관계로서 사람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시진 분입니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나님이 요구하시기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인 나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정해지면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무엇은 무엇을 드리고 어떤 공로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방향이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무엇을 드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고 의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알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방향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의 존재 정체성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 곧 하나님의 내용이고 사람의 육신과 삶은 그 형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성전이고 우리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비밀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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