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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 가셔서 심문을 받으셨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은밀하게 말하지 않고 늘 드러내어 말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묻느냐?”고 하시면서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대제사장의 하속 하나가 예수님을 치면서 “대제사장에게 무슨 싸가지 없는 말이냐?”고 말을 했다.(의미가 그렇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 하속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증거를 대지 왜 때리느냐?”고 답하시니 대제사장 안나스가 또 다른 대제사장이자 사위인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결박하여 보내고 또 빌라도에 보내어져서 심문이 이어진다. 당시는 지금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종교와 정치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여서 종교적인 문제로 사람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고,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사실 예수님을 잡아오긴 했지만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죽일 명분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괘씸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가운데 실수를 하면 그것으로 송사를 할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성공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과 같은 말을 했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법이라는 것이다.(요 19:7)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괜히 죽고자 하심도 아니고, 대제사장의 농간에 넘어 간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을 줄 아시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씀하셨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에 대하여 흔히 “우리를 대신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가 더 옳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예외 없이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법에 의해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는 사람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대속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죄인,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의 대속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기에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죄를 시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죄목이 먼저 신성모독인 것이다. 감히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의 정체성을 설명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기에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이 나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얻었으니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형상으로 즉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시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많은 아니 대부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송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그런 신이 따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고상해지고 영광을 받아서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언제나 죄인인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자리를 떠나 고상해지거나 성공하면 의인이 되지만 사람이 자기 본성을 그대로 인정하면 언제나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목수의 아들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부끄럽고 금욕적인 생활로 다스려야 할 존재였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뿐더러 보기에 심히 좋은 존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을 사람이라는 형상을 가진 존재가 표현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인 것이다. 아버지의 의와 뜻을 육신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기준,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보기에 좋은 존재가 아니라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한 아담은 무화나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다.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다. 즉 율법으로 자신을 가렸다는 것이다.


그 율법, 사람을 부끄럽게 보는 선악의 기준을 가진 안목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부끄럽고 가려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자고 심문하는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이 가진 가치기준, 즉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진 세상의 안목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자신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하며 세상의 군사들을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 여긴다. ‘아니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해지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리, 죄인 중의 죄인인 사형수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신 분이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이 고상해지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말하고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심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늘 있는 심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물을 때 뭐라고 답할 것인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물을 때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예수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때 마음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대답으로 인하여 삶이 송두리 달라진다고 해도? 그럴 수 있어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다.




Written by 김홍덕 - 010.3396.5555,  the.elphi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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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금송아지나 사람들이 만들어서 절을 하는 각종 조각물이나 상징물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우상이지만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우상의 진정한 본질은 사람들의 마음에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불상이나 금송아지이므로 우상의 본질은 사람 안에 우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을 이끌 신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형상으로 만든 조형물과 같은 우상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안에서 어떤 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 의를 상징할 것을 정하거나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 마음에 농사가 잘 되어야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농경사회의 신들은 많은 경우 당시 농사에 절대적인 요소였던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이 우상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 안에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라는 의가 있으며 그것을 나타낸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실 때, 시작하신 말씀은 <너를 위하여> 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자기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것으로 표현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으로 표현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형상으로 표현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할 존재로서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형상으로 표현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형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형상은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이동이라는 의(도)가 자동차로 표현되었고, 소통이라는 의(도)가 전화기로 나타난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형상으로 표현해야할 의를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지어진 형상이 있는 존재인데, 그 존재가 자신을 위하여 다시 형상을 가진 우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하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것에 자기 삶이 잠식당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염려하는가 하면 이는 컴퓨터나 인공지능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이 의를 나타 내여야 하는 존재인지, 의가 나타난 존재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스스로 빠진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니라, 의가 나타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무엇을 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먹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육신의 일에 있어 언제나 자신을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위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은 예외 없이 만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자기를 설명할 의와 뜻, 곧 우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없는데 그것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정의를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만든 우상이라는 것이 우습게도 생물학적으로도 사람보다 열등한 동물들을 형상화하는 우스운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것은 자신들 만의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드신 이가 주시지도 않은 것이 안에 있어서 그것을 형상으로 표현했다면 어쨌든 자기 안에 형상으로 우상으로 표현할 의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위하여 섬기는 것을 정했다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만드신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누구라도 싫어할 일입니다. 나의 의를 표현하라고 만든 존재가 준적도 없는 자신의 의를 위하여 다시 뭔가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그 만든 것이라는 것이 내가 만든 것을 모방한 것이라면 기가 찰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포도원을 맡기고 갔는데 자기들 것을 삼으려고 주인이 포도원을 맡긴 목적대로 소산을 얻고자 하니 자기들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종을 죽이고 아들을 죽였다는 것도 바로 이 상황과 같고, 니느웨로 가라니 다시스로 간 요나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할 존재인데 자신의 의를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죄의 근원입니다.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이지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라고 지었는데 가서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을 형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니 자기 자리를 제대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존재가 아닙니다. 즉 자기 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상입니다. 이미 형상화 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만 잘 표현하면 됩니다. 그것은 마다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자신을 위하여 즉 자기가 옳다는 것이 선함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는 모든 짓은 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마음에 돈이 최고다 하고 돈을 좇으면 돈이 그 사람의 우상이고, 권력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권력을 추구하고 섬기면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 돈과 권력이라는 것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옳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2계명을 지키는 것은 손으로 우상을 조각하거나 어떤 형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2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형상으로 자기 의를 표현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형상과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이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2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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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당시 독립단체라 할 수 있는 열심당의 당원이었다고 한다. 열심당원들은 칼을 가지고 다녔는데 베드로도 그 칼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그 칼을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라 버렸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귀를 도로 붙이시면서 베드로를 만류하셨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 하겠느냐(요 18:11)


마지막 잡히시는 순간까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정작 기적이 필요한 사람은 귀가 잘린 말고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칼에 잘린 귀를 온전케 하실 정도로 초인 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으러 온 자들에게 잡혀가고 있는 것이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답답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예수님의 정체성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마음으로 능력 행하실 것을 참고 견디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좀 다른 이야기다. 예수님의 능력과 무관하게 지금 이 일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지금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 삼으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육지에서 싸움에 관한한 가장 강한 동물은 코끼리라고 한다. 성난 코끼리는 사자나 호랑이나 곰 아니라 어떤 동물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코끼리는 그런 어마 무시한 능력을 다른 동물과 싸워 이겨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거나 그 힘으로 자신이 먹고 사는 것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풀떼기나 뜯어 먹고 산다. 그것은 코끼리가 ‘내가 힘을 쓰면 다든 다치니까 참아야지!’ 라고 자신을 절제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코끼리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하나님 아들의 본성도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의 아들일 뿐 아니라, 천지 창조에 함께 하신 예수님이신데 이 세상의 일을 어찌 자기 맘대로 할 능력이 없겠는가? 뭐 내키지 않으면 새로 만들면 되지. 천 년이 하루 같은데, 그냥 잠시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데 그 어마 무시한 하늘의 권세는 까맣게 잊은 듯이 순순히 잡혀가시는 것은 대의를 위하여 참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근간에 속하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다. 그러니까 이 법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요원한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려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은 이렇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이르고 싶어 하는 자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르려 하는 것을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이김은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는 심각한 타락과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앙 없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지적질하는 소위 말해서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의 행태로 나타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도전하는 그 힘과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겨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이 신앙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문제시 삼으면 좀 심하게 말해서 ‘사탄의 공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기려 한다. 교회 세습을 비판하면 어리석다 하고, 추문에 휩싸인 목사를 향한 여론은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또 주일 날 장사하던 사람이 망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하고, 교회에 간다고 회사 일에 빠진다고 했을 때 욕하면 사탄의 계략이라고 한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모두 말고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와 같은 행동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일을 수습하시면서 “내가(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는 것은 베드로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열거한 현재 신앙인들이 보이고 있는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잔을 마시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스스로 착각하는 자신들은 세상으로 인하여 괴롭힘을 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잔을 마시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걷어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소위 신앙인들에게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때로는 교회가 가는 방향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없다고 책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할 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왜 있는가? 말로 사람을 책망해서 될 것이라면 예수님도 성경책을 세상에 던져 주면 되지 뭣하러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겠는가? 이런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켜져야 하고, 신앙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지키려 했던 베드로처럼.


하지만 신앙이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 풍성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절대로 죽으면 안 될 분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을 떠난 세상이 가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사형을 당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 하나님의 법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죄인 삼으려는 시도 앞에서 하늘의 천군을 불러서 물리치시겠는가? 그 안에 있는 본성이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장면은 절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본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존재며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세상의 법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죄인 되는 것이 본성인 생명,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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