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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7) 부활의 능력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2. 10:4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시라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야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모습, 정체성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복음이 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 질 때에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세계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이 된다는 복음이듯,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의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에 대하여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적이라는 것이 그렇고, 모든 인생이 죽음을 맞이할 것인데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산다고 하니 대단히 각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제가 요한복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 죽음이나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고, 선지자와 또 사도들 중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였지만 그 다시 산 사람들 역시 죽었고, 부활하신 주님도 하늘로 가셨으니 지금으로서는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나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육신이 죽고 다시 산 증거가 없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다음에 남과 다르게 다시 살아난다는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능력이라면 당연히 가벼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도 다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진정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었기에 살리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이 맞이하는 죽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막역히 생각하지만, 부활은 반드시 예수님과 같은 죽음이 있어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고 또 죽었을 때 비로소 부활의 능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복음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시고 죽으셨는데, 그 죽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전히 산 것이었기에 살리신 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살 때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힘들고 늘 죄인이 되고 패한 자가 됩니다. 돈 앞에서 그렇고, 권력 앞에서 그렇고, 고상함 앞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늘 상대적인 패배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패배와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종이 되지 않으려고, 죄인이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수고함은 그쳐지지도 않고 또 이겨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세상의 가치관과 맞서 싸우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백조가 미운 오리새끼에게 ‘너는 백조야!’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모든 인생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그 가치관이 본질이라 여겨서 늘 이기려고 하는 소득 없는 수고로 일관하면 곤고한 삶을 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이 바로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철저히 패하는 십자가를 순종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인생은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보이시고 그것이 자기 정체성임을 순종하라고 전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십자가는 죽음의 틀이 아니라 생명의 거룩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을 본질로 알고 그것에서 이기고, 그 세계에서 왕이 되고 이긴 자가 되기 위한 존재라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실 때 존재의 목적이 회복된 것이기에 그것이 생명이 있고 산 것이라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죽음 아래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되고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힘입는 자가 되는 법은 우리도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들 역시 오늘 세상의 가치관과 그 법아래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법으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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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인생에게 복음이란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본다면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망의 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다고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있어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모든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다른 것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렇다면 그 아들 역시 세상의 주인입니다.


‘다윗’은 왕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왕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오셨다는 것, 왕이라는 것은 자기 세계를 자신의 의로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의로 다스리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신의 의로 세상을 다스림과 같이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는 모든 사람 역시 왕과 같이 자신의 세계를 의로 다스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뜻대로 되는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예수님은 모든 인생에게 복음이라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 나라 이스라엘의 왕, 곧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예수님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복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간혹 그러기도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렇지 않을뿐더러 단 한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일이 있었다면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니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주장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정말로 왕인가 싶기도 합니다. ‘도무지 어떤 세상의 왕이란 말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많은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그 모든 어려운 일, 곤고한 일, 화나고 짜증나며 슬픈 일들의 뿌리와 같이 공통된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자기 맘대로 된다면 그 일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기 맘대로 된다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에게 ‘네가 왕이다.’라고 인정해 준다면 나름 복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맘대로 되는 세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생은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버스 하나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버스가 온다는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제때 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세상이고, 그래서 내가 왕이라면 왜 맘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나의 것이 아닌 이유는 다른 것 아닙니다. 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구매한 것은 내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해도 됩니다. 사자 바로 부셔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들어 온 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자라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식하고 보니 세상에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자신의 의와 뜻대로 세상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함을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신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뭔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대적하고 하나님과 겨루며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세상이 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자기 관점과 안목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뀐 안목으로 보는 자기 세계, 그 세계는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육신의 삶과 세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심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면 이 세상이랴 말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니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의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수도 없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뜻대로 하시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푸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세상에 속하여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자신의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세상의 의로 사시는 분이니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육신이 원하는 일이 자기 맘대로 되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삶이 되어 사는 존재가 되므로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고 뜻대로 되는 삶, 곧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로 사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이며, 불만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의를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모든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되고, 만족이 되며, 안식이 되고, 평안하며, 항상 감사하고, 언제나 기쁜 존재가 되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억지로 할 이유도 없고, 신념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복된 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이고, 또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살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바로 알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복음인 것입니다.(예수님이 오심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 곧 왕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동안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고 만족의 동산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 곧 삶이 된 사람이 사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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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7) 예수님이 왜 복음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15. 21:58 Writer : 김홍덕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이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 누구와 무엇은 간절한 관계일 것입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누구이기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험생에게 있어 합격 소식은 간절한 것이고 합격이라는 말이야 말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두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누구에게 복음인가 하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인류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복음인지도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간절한 분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사람들이 복음으로 여기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것이 사람에게 복음’이라며 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계서 전하고자 하신 맥락과 같은 맥락에서 사람에게 복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이 간절해도 바닷물을 마시면 안 되듯, 예수님께서 복음이라고 하니 자기의 모든 간절함을 예수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은 <무엇이 간절한 것인가?>입니다.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간절함이 있고, 그 간절함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시기에 예수님이 복음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간절함>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간절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통적이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볼 때 모든 인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있으면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조차도 간절함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명제들은 철학적인 고찰이라는 선입견을 주지만 알고 보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생의 꿈은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돈이라고 해도,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가 돈이라고 하는 사람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 자신의 답이 돈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것은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왜 사는지, 인생이 무엇인지로 표현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간절함, 나는 누구며, 왜 사는지에 관한 답을 보여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듣고 그것을 복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내린 결론, 돈이나 명예와 같이 세상의 것이고, 애굽의 것을 구하면서 그것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복음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저의 글을 꾸준히 보시는 분들은 이것이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지 아시겠지만, 오늘 처음 저의 글을 보신다면 지난 얼마간 예수님께, 또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마음으로 바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돌아보신다면 스스로가 무엇을 복음으로 여기는지 아실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겨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도 누구나 구하는 것에 있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가지게 되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구했다면 아직 복음의 표면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런 분들에게 있어 성경은 참 의문스럽고 성경대로 살기 힘들 것이며 행여 성경대로 살지 않아서 벌을 받으면 어쩌나 염려하실 찌도 모릅니다.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보면 자신이 바라는 것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는 것을 벌로 여기고, 건강이 악화되는 것, 심지어 약속시간에 맞춰서 타야 하는 버스나 지하철 놓치는 일이 생기는 것조차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얼마나 예수 믿는 믿음이 세상적인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벌이라는 것이 대부분 세상의 것,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시는 것은 우리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해결에 대하여 기도하면 들어 주시기 때문에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니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시다 보니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을 상실한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고, 하나님이 속에 거하시기 위하여 빈 그릇과 같이 지어진 인생이기에 자기 안에 끊임없이 채우려는 그 배고픔을 채우시는 주님, 인생의 정체성을 채우시는 예수님이시다 보니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천 명을 먹이게도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게 하시는 예수님의 본성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상실하여 마치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와 같이 죽은 인생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인생에게 복음이고, 사람이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몰라 느끼는 공허함과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복음이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만 해결되면 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동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자동차를 산 사람이 기름을 넣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겠다고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먹고 마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 주시기에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껍데기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복음인 것은 ‘사람이 왜 사는지?’,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게 될 모든 인생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니 그 뜻도 하나님이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이신 것은 바로 이것,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육신의 어떠함이 신앙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삶의 이유와 존재의 목적 그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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