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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 곧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같은 세계에 사는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는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사람을 주었다는 것은 소유를 이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다. 성경은 존재 규범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가 핵심이고 유일한 주제인 것이다. 누구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만 정해지면 행동은 그 정체성에 맞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정체성이기만 하면 성경은 어길 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성경의 말씀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정체성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이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또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의 개나 지금의 개나 사람을 따르는 본성은 같은 것이다. 개니까 그런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본성을 지닌 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기도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서 되는 경지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고 훈련한다는 것은 같은 생명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같은 생명으로 났는데 같아지려고 노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생명이 어디 노력으로 되는 것인가? 그냥 나는 것이지?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기도의 모든 내용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 그것 하나만 있으면 그냥 되는 것이다. 그것도 금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영광을 주셨다면,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한 영광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것이다. 생명의 본성인데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평생을 그 영광을 피해 다니려 해도 어쩔 수없이 영광이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보게 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다. 단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는 것, 그리고 제자들이 그 생명으로 거듭났으니 그 영광이 표현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어떤 행동들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디 그런 표현이 있는가? 그런데 지금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듭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력하여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첫째 그 영광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런 생명을 가진 정체성이다. 그래서 장로가 되려고 교회에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또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가상히 여겨 직분을 주는 꼴이 생긴 것이다. 같은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거듭나지 않는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아니라 노력해서 영광에 이르는 세상의 법을 자기의 삶의 법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몇 번을 절을 하면 신이 들어 준다거나, 주기도문을 몇 번 외우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이나, 교회에서 정한 행사와 시키는 일을 잘 참석하고 따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 뭐가 다른가? 그것은 전부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이 있다는 법에 의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살아가다가 어떤 순간 자신을 보면 예수님과 같이 살고 있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고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자기 삶의 내용이 되고,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르게 살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나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래서 거듭남이라고 하고, 생명이라 하며, 사망과 생명이라 하시며, 부활이라 하는 것이다. 성경의 이 모든 말씀들은 다 생명에 관한 단어고 말씀이 아닌가? 생명의 법이기에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눈을 감고 다녀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보면서 살게 된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사람에 도무지 없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으로 난 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개로 만들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이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숨 쉬는 어떤 한 순간 예외 없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정체성으로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우면 그도 영광스럽다. 한국의 바나나가 노란색이면 아프리카의 바나나도 노란색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거룩하시면 그 사람은 똥물에 뒹굴고 있어도 거룩하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시니 그들도 하나님과 하나이다. 몸이 어디 있던지, 삶이 어떠하든지. 그런데 하물며 영광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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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체성이 정립이 되면 그 정체성에 맞는 자리가 생긴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신다고 하셨듯이. 존재는 항상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자리가 있다. 부엌칼은 언제나 부엌에 자기 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떠나 있으면 주인은 항상 그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곳이 자기 정체성으로 인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같이 그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같아지기를 기도하셨다. 즉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과 의와 뜻을 나타내는 존재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으로,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당연히 아들에게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논리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사람들이 복권을 사고선 그것이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며 즐거워한다. 복권을 샀다는 것만으로 당첨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이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 부르는 것은 같은 것이다. 복권은 자기가 가진 번호와 추첨번호가 일치할 때(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때) 복권이지 그렇지 않으면 휴지 조각에 불과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자신의 정체성이 동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는 믿음이 소유와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믿음이라면 그것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린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회 청소하고, 성경 읽으면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복을 주시고, 또 죽어서도 세상의 개념과 같이 부자로 안식하며 살게 한다는 식의 믿음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남자에게 비키니를 주는 것이 모독이듯이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림이 어찌 모독이 아니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기적으로 왕이 되는 것도, 부자가 되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또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하지만 이 육신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심히 좋은 존재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같은 존재니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죄인의 틀에 매달려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모습이 바로 자기 모습이라고 깨닫는 사람도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존재,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다. 부엌칼이 부엌에 놓이게 되는 것과 같이. 그것이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식이다. 어떤 것이든 자기 존재 정체성의 자리에 있어 그 존재 정체성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안정된 것이고 안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회복이며 그 상태가 바로 안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이 거하시는 자리에 거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 가려해도 주인이 늘 그 자리에 둔다. 부엌칼이 다른 곳에 있으면 주인이 언제나 부엌으로 가져다 놓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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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23) 온전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6. 28. 10:35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 그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심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의외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면 오히려 두려워한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십자가와 부활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시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와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에 있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문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 부족함은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간의 생각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사실 보편적인 생각이다.(물론 그 보편성이 바로 죄기는 하지만.) 그래서 여러 신들 중에서 자기에게 잘 해주는 신을 찾는 것이 사람의 기본 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앞에서 말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에서 시작해서 그 문제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온전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차이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부족하게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량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의 모든 문제는 사실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을 부족하게 보느냐 아니면 온전하게 보느냐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부족하게 보는 관점은 모든 이방신들에게도 통용되는 신앙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인생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든 아니면 어떤 신이든 찾아가서 부족한 육신이 힘든 세상을 살 동안에 겪는 문제에 대하여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이 육신의 삶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온전하지 못한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 역시 인생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세상, 형이하학적인 이 현상계를 본질로 보면 사람은 너무나 연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어떤 신이든 찾아서 그 한계, 그 부족함을 메우려 한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므로 신이 반응하는 것 역시 눈에 보이는 세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에 신이 응답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찬물로 몸을 씻고 기도하거나, 빳빳한 신권으로 헌금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혹은 신이 정성을 보시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의 궤도 위에 착한 행실을 하면서 살고, 사람의 부족함을 감추는 고상함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육신으로 살 동안 문제의 해결)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안목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과 소유를 드림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가치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보면 자신의 행동은 늘 부족하고, 소유는 늘 드리기 아까운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자신은 알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전능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그러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누군가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 손사래 치거나 아니면 욕을 하고 비판하며 심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금욕’이 답인 양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억제하고, 적어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추함을 보이지 않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기준에 부족한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신앙의 힘으로 억제를 잘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여겨, 잠을 안자고 기도하고, 먹는 것을 참으려, 또한 억지로 행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바로 그런 육신을 가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부정하게 여기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삼기에 가장 좋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셨고, 또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마음이 죄고 선악과이며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자신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겨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 그것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거듭남이며 회개고 생명이다.


그렇게 사람이 회복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거하실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주 거룩한 존재로 인식할 때 비로소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온전함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온전함을 사람 안에 있는 부정함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알 고 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 기준에 만족하는 상태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존재를 만드신 분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사람의 온전함에 대한 자기 기준이 잘못되었거나 그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나면 하나님을 거짓 신으로 규정하고 떠나든지 아니면 자기의 기준을 바꿀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신앙의 시작이다.


그 시작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원래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이라는 내용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함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온전함은 사람이 원래 온전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사람을 부정하게 여겼던 기준을 버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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