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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부 알아보지 못했다.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세 번째라고 하고 있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알지 못해서 자기 생업을 찾아 떠났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오셨다.


요한복음 뿐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 21장에서도 고기 잡는 제자들이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거리상의 문제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는 단순히 거리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무덤에서는 아예 몰라 봤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금방 알아볼 수 없게 한 제자들의 안목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일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품속에 있는 의가 형상을 가진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 나타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아직도 땅에 계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 살 길을 찾아 갔다. 육신의 안목,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고 기대했던 그들의 안목과 가치관이 아직 남아 있기에 육신의 문제에 자기 삶이 회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볼까 생각했다.


신앙이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이 육신을 사용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존재로서 인생을 살 것인가?’하는 것이다. How는 What이 정해지면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며 어떤 존재인지만 정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는 자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혈연관계도 서로가 원수로 관계를 정리하고 나면 천하에 그런 싸움이 없다 싶은 싸움과 다툼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설명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 보이신 내용인즉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육신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즉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같이 육신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지 보이신 것이다. 육신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육신을 사용하는 법이고 육신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종과 같이 섬기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섬기는 자리에 처했다는 것은 어떤 세계에 있어 패자가 되었거나 빚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종이 되어 어떤 가치, 어떤 법에 있어 주인인 존재나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셨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인생들, 그리고 그 가치관을 가진 자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가치관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신 것이다. 육신이란 그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즉 나의 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을 물리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세상의 가치관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또 종이 되어 그들 앞에서 종과 같이 섬기고 심지어 나의 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오직 그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을 향한 뜻이 나타나게 하시기 위함이고, 그렇게 될 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못 박았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이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 되는 법아래서 살면 그 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목적이고 뜻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도 육신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육신의 먹거리를 해결하고자 생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고기를 잡고 있으니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기를 잡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하지만 고기는 없었다. 즉 그 삶에는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육신을 소비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부에게 고기는 그 삶의 결실이다. 그들은 어부지만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은 그 직업이 무엇이라도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소득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결실이란 얼마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와 생업이 어부였던 제자들이 육신의 삶을 떡으로 사는 것에 투자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을 하셨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그랬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 오른편은 바른 편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오른손으로 붙든다는 말씀은 하셔도 왼손은 언급도 않으셨다. 오른손은 바른 손이고, 오른편은 바른 곳에 던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여겨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바른 것으로 알고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먹을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봤다는 것이다. 일어난 일은 육신이 먹고 사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일인데, 어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업이 풍성해진 것일 뿐인데, 제자들은 이 일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택함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일이 나타났을 때에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것, 그것이다.


제자들이 그들의 경험에 의거하여 던진 그물에 잡히지 않았던 고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던졌더니 잡힌 것이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것이다. 바르다는 것은 존재가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바른 것이다. 세상의 물건을 보고 바르게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만든 이의 용도, 그것을 사용하고자 기획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 사용될 때 바르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또 소득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늘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라고 사람을 도우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도우시겠다는 것이다. 그 결정체가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봤다. 이것은 성경을 행위로 지키면 생업이 풍성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주시다!”라고 했다. 우리 모든 일에 있어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가지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로 사용하는 이가 바로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도구가 주인을 알아본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생업이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약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날 이후에 고기 잡을 때 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면서 죽을 때까지 어부로 살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이렇게 생업이 잘 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보는 대로 성경을 보는 병폐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떡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찾아와서 그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은 인생이 바뀐다. 자기 육신을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비하게 된다. 진정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아니 오른편의 삶, 바른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이 창조된 목적대로 살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묵상하는 것의 결국도 이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떡으로 살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육신을 오직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와 본질을 예수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이시고 주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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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 육신을 가졌기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모든 인생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사는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목적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목적을 알아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요셉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든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신 것, 믿기를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라는 것은 어떤 속 안에 있다는 것이다. 어디엔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갇힌 자를 구하려면 구하는 자는 갇히지 않은 자라야 한다. 구하는 자 곧 메시아요 그리스도는 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사로잡혀 있는 세계가 온전하지 않으며, 구하고자 하는 존재(사라)가 그 세계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갇힌 자 역시 미운 오래 새끼와 같이 자기가 지금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벗어나기를 원할 때 온전한 구속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데 그것을 벗어나서 살다보니 당연히 목적을 벗어난 모든 존재와 같이 이런 저런 곤고함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보니 ‘삶은 고난’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괜스레 사람을 고생시키려 만드신 것처럼. 더욱이 사람들은 그런 곤고함 속에서 자리는 바꾸지 않고 곤고함이 경감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들 중에서 미움을 덜 받는 방법을 구하듯이.


하지만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다. 오리들하고 놀면서 미움 받을 존재가 아니다. 그때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이 오리라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니 ‘사람이란 존재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같은 존재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래 백조였다는 것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세상은 곤고한 것이라며 어떻게든 그곳에서 곤고함을 줄이고자 애쓰던 인생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아 ! 우리의 자리가 이곳이 아니구나!”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와 나의 가족, 또 때로 세상의 일로 원수 같은 이들도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삶을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그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에 가면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잘못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뭘 잘못했지?’라고 행위를 생각한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그렇게 판단한다. 심지어 행동을 보고 먼저 판단한다. ‘십일조를 안 낸다고? 그럼 신앙이 없고 부자 되기 힘들겠네?’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존재 정체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는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은 하지 못하는 죽은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이 목적 안에 있지 않아서 죽은 자와 같이 그렇게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는 자리에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대로,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호흡하고 있다고 산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있을 때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굴러 다녀야 살았다 할 수 있고, 시계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줄 때 살아있다고 하며, 전화기는 통화가 되어야 산 것이라고 하듯,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도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그 육신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삶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신 이가 뜻하신 목적 안에 있으니 그것이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며, 그 안에 있으면 그 이름의 영원함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름은 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정체성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예수님의 이름, 곧 보여주신 정체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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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사도가 밝히고 있는 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알고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기록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은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살아있고 생명으로 여기시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경의 기록 목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어쩌면 이것은 상용구와 같은 명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아주 뻔한 것 같은 그 하나가 모든 것일 때가 있는데 이 말씀도 그렇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다. 아마 이것에 대하여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믿는 것이다.


어떤 예수? 예수님이 한 분인데 어떤 예수님을 믿느냐고? 의문스러울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달라서 얼마나 혼돈스러웠는지 모른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 어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지를 믿느냐는 것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내가 범한(Doing) 죄의 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예수님도 그리스도로 믿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죽으면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부귀영화를 천국에서 누리게 해 주신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와 동일한 육신과 삶을 가진 평범한 사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나 철수와 같은 보편적인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면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을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평범한 사람은 우리가 쉽게 그리스도라고 믿는 능력의 예수님과는 너무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 쉬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왕이요 제사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고,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옆집 아저씨, 앞집 아줌마가 바로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그 당시로 보면 지금의 옆집 아저씨나 이웃집 청년과 같았다. 이름 ‘예수’역시 우리나라의 철수, 영희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고, 신분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귀족은 고사하고 사회적으로 볼 때 전혀 고상하지도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가난한 사람으로서 은행을 방문해서 대출을 받고자하나 여의치 않음을 알고 돌아서는 사람은 돈이라는 가치 기준에 의해서 멸시를 받은 사람이다.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은 학력이라는 기준에 미달하여 버려진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과 같았다. 이것을 알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세상이 선하게 여기고 가치로 여기는 재력이란 기준에 의하여 멸시 받는 사람, 시험에 떨어진 실패자를 보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든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면 쉽게 믿어질까?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 그래서 요한 사도가 그것을 보고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에 있어 어떤 예수를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멸시 받고 버려지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가난하고, 또 음란하기도 하고, 그래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것이 없어서 ‘저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나?’ 싶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해야, 또 죄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일을 보고 듣고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멘’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볼 것이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이 인정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는 사람이지, 세상 가치관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다. 그렇게 세상적인 역량도 뛰어난 예수라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경건한 모양(외식)을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남다른 경쟁력을 가진 사람이라 인정받으려 한다. 


이런 신앙은 자신들이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항변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버림받고 멸시받은 예수님인데,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의 가치기준의 상위에 올라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인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냥 패배자요 죄인이요 Loser일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실패한 사람, 아니 세상의 가치로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대접할 수 있는 심령이 없다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신들은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곤란한 일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이 그런 믿음 때문에 제대로 된 하나님의 계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가치가 아닌 사람을 말한다. 사람을 볼 때, 그 외모나, 재력이나, 교양이나, 신분이나, 신앙적 공로나, 은사의 정도나, 사회적인 봉사활동의 내역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심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고 오직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고백만 있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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