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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9-10) 하나님의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6. 17. 17:0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시는 기도는 어떤 이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셨다.(요 17:9)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원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돈을 구하고, 건강이 없는 사람은 건강을 구한다. 하나님께 그것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가 구하는 것을 주실 마음이 들도록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성경을 지키려고 한다.


그런 구조를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과 삶이 어떤가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시고서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육신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는 구조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중심이 아니라 행동을 보시는 분이시니 믿음이 행함보다 중요하다고 보시는 분이며,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사람의 육신이 살아가면서 필요한데 부족하다고 구하는 것을 주시는 물질과 공로의 하나님이라는 구조다.


약간 적날한 표현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정말로 양심이 있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 솔직해야 한다.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때 ‘돈 달라, 밥 달라, 건강 달라, 남(여)자 달라, 직장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앞에서 말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다. 존재의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의 하나님으로 희롱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로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하는 것을 구하고, 복음이 전파되기를 구한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결국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이면 똑같은 신앙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목적, 중보하시는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런 신앙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시는 것은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서 눈에 보이는 육신의 공로와 소유를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다. 성경을 행동으로 잘 지켜야 살기 힘든 이 세상을 살 동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신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께 주신 사람 역시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냥 세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기도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형식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내용을 구하는 것이고, 빈 그릇으로 지음 받은 인생을 채울 존재의 정체성을 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해서 그것과 하나가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것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주인이고 본질이며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것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 열심히, 그리고 신앙생활 열심히 했더니 사업도 잘 되고, 시험도 되고, 결혼도 좋은 사람과 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또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것이나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의 것이다. 세상의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이기고,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이루어지거나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신앙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에서 종부하신 사람이나 신앙이 아니라 세상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그 주인이고,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과 본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그 첫 열매가 예수님이시기에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것, 곧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 안>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믿는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세상의 것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져서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시는 모습이다. 세상에서 경쟁하여 이기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는 사람들의 관점과 같다. 세상의 법으로 못 박은 것을 이겨내는 것이 그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즉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아는 삶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하는 가치관, 세상에서 이기는 법으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어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이라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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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가는 정체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6. 15. 16:09 Writer : 김홍덕


딸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고 하시므로 야곱이 길을 떠나게 된다. 생각해보면 딸이 수치를 당했는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언급도 없고, 야곱도 딸을 대신하여 복수한 아들들을 오히려 책망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그럴거면서 왜 성경에 디나의 일이 자세히 기록되었을까?


디나의 일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실수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벧엘로 가기 전에 우리 안에서 처리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늘 디나가 이방의 여자들 곧 세상의 문화와 화려한 유혹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강간당하듯 이방의 가치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천하에 드러났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강간한 세겜 족속을 야곱의 아들들이 도륙하듯이 죽여 버렸으니 이 일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간음하듯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은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말씀이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이 살 길인 것이다.


그렇게 그것이 드러난 다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 곧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단을 쌓으라는 것이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고,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을 죽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며, 그것을 하나님의 집(벧엘의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제 야곱이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야곱이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야곱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하니 자신의 모든 식솔들에게 이방의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의복을 바꾸라고 하는 것이다. 식솔이란 자기 세계다. 모든 식솔들은 자기의 모든 세계, 곧 가치관과 정체성과 삶의 모든 것이다. 그들에게 이방신을 버리라고 한 것은 이방의 가치관을 버리라는 것이다.(이때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리고 의복을 바꾸라는 것은 신분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식솔들은 이방 신상을 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야곱이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귀걸이(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 주었다.(창 35:3-5) 왜 그랬을까? 그리고 야곱은 또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았고 그것을 그냥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버렸다.(출애굽 때는 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씀일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귀는 믿음의 시작점이다. 귀걸이는 무엇을 듣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방신을 버리라고 했을 때 그 귀걸이를 내어 놓았다는 것은 이방의 가치관을 듣는 증표를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방인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던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이 벧엘로 길을 떠나자 그 사면 고을의 모든 족속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그 땅의 거민들을 살육하듯 죽였음에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사람,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은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볼 때 심히 두려운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자, 하나님의 전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방신의 말을 듣거나, 이방의 문물을 좋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며, 의복 곧 삶의 모양 역시 바뀐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런 가치관에 있었다는 것이 디나의 일이 만 천하에 드러나듯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방신을 섬기고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는 증거인 귀에 거는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다. 즉 이방의 가치관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즉 애굽의 법인 피라미드의 법으로 세상이 가치롭게 여기는 학문의 세계, 재물의 세계, 신분의 세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에 가져오는 것이다. 즉 벧엘에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아니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제는 신앙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세상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상을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을 이기지 못했으니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왜 이기지 못했는가 하면, 세상의 법은 언제나 승자가 바뀐다. 자기가 성공한 그 법에 의하여 또 다른 누군가가 자기보다 이긴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회나 부흥회 한다고 하면 전투 찬송을 격하게 부르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방신의 의복과 신분과 가치관을 듣는 귀를 버린 사람)은 오히려 세상이 두려워한다. 예수님께서도 몸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영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세상은 육은 죽일 수 있지만 영은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세상의 법이 점령할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목적 안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이 죽지 않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 목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방 신상과 귀걸이를 땅에 묻지 않고서 벧엘로 가는 것이 그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는 조상이다. 그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즉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이요 교회요 공동체가 그에게서 시작되는 사람이다. 그의 여정에서 이제 공동체가 시작되는 벧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에 합당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세계인 자기 식솔들 모두에게서 이방의 신상과 이방의 가치관을 듣던 귀를 상징하는 귀걸이와 신분을 나타내는 의복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묻고서 벧엘 곧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진정한 교회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인 자식, 취업, 사업, 건강과 같은 것을 구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이 잘 되면 은혜요 복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교회가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고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회칠한 무덤일 뿐이고,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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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과 세상을 자기 자신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니 예수님의 오심도 결국은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에게 나타내시려(영광) 하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저희는 원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는 말씀이 자기 자신의 말씀이 되려면 이것을 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원래 모두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가 있어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인데, 그 존재들을 예수님께 주었다는 것은 돈이나 열쇠를 주는 것과 같이 사람을 물건이나 개체로 여겨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온전하게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주었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 주었다고 하시니, 돈이나 연필을 건네주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님께서 주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나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님께 주었다는 것은 사람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사람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사과 씨를 심어서 사과를 얻겠다는 뜻을 가지시고 농사를 지어 얻은 열매는 사과라는 정체성(the apple)에 속하게 된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지은 모든 사람은 하나도 예외 없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존재가 되므로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길 수 있게 하시기 위한 존재로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니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니 예수님께 주신 것이 되는 것이다.


  • 그 사람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나온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어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같은 본성에 속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에,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뜻과 육신이 하나가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본성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가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가진 본성을 지키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 곧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념을 가지고 정신 차려서 지켜내면 예수님께 주신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다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니 자기 안에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있으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서 생수가 넘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 당연히 예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하나님 말고 다른 어떤 것이 그 존재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은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으니 예수님의 세계에 속하고,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알려고 노력하거나 성경을 의무적으로 보거나 기도하고 부르짖어 깨닫는 것이 아니다. 미운 오리새끼가 하늘 나는 백조를 볼 때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알 듯, 예수님을 보면(그 말씀과 성경에서 보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냥 알거나 믿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다. 사람이 사람으로 나면 모든 것이 다 사람의 일을 하고 사람의 본성으로 살며 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 곧 생명을 가진 사람이니 그 안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분이며, 하나님으로 비롯된 분이라는 것을 자신도 아는 것이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데 예수님의 본성과 마음과 생리를 왜 모르겠는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 모르고 이해되지 않아서 믿으려 애쓴다는 것도 이상한 것이다. 아니 그러고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아닐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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