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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도마는 없었다. 도마를 만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했다. 그러자 도마는 직접 예수님을 보고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서 8일 후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져 보라고 하시고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을 하셨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것은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어쩌면 이 말씀은 어쩌다 유명해진 말씀일지도 모른다. 때로 성경에 대하여 궁금해서 꼬치고치 캐묻는 사람에게나, 또 믿음에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몰라서나 당황해서 혹은 귀찮아서 하는 답변과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지지 말고 믿어라, 예수님께서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다며.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두고 보았다 보지 않았다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예수님이다. 도마가 보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 그 자체다. 그러니까 도마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신,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이고 주님인 것이다. 그러니까 2,0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 육신이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그 훌륭한 고백의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예수님을 보고서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 보다, 예수님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닌 보지 못하고서 믿는 믿음이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셉의 아들 예수님만 주님이라고 여기는 것 보다, 요셉의 아들 예수를 보지 못해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순종하는 것이 복된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경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꼬치고치 캐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믿는 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요셉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못 자국과 같은 증거를 기반으로 예수님의 일이 사실임을 믿는 것이나, 예수님은 실제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의를 자신의 말씀으로 믿는 자가 바로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은 요셉의 아들인 예수라는 한 육신을 보고서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며 죽여 버렸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가늠한 것이다. 그것이나 도마가 못 자국을 만져 봐야 부활을 믿겠다는 것이나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서 하나님의 놀라움을 증명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므로 모든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는 하나님이 축복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로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고 화려한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건물의 화려함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 뛰어나면 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가치관은 다 애굽의 가치관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창조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가 사람이란 존재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또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후에 한 번도 사람을 개선하거나 바꾸신 적이 없다. 사람은 창조될 때 사람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지 그 사이에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의 일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자리에 오른 일 밖에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겼다. 그래서 사람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원래 만드실 때 그 모습의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을 아들로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즉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연상하고 알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는 것, 또 자신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자신과 같이 사회 속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부족하고 죄인 되는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요셉의 아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실체를 봐야 믿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알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이 삶이 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기고 대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대한 것과 같다고 했고, 야곱도 자신을 죽이려 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그 형(에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했고, 바울 사도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이 하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예수인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관점, 애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 육신 가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의 대명사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대할 수 있는 믿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마음에 선악과로 인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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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9-23) 죄를 사하는 권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5. 12:24 Writer : 김홍덕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모여서는 문을 닫은 채로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그런 일을 행하리라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죽었는데 부활하신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강은 ‘에이레네(Eirene)’ 라는 말이다. 이는 ‘가까이 부르다.’는 뜻이다. 즉 옆에 불러서 부르신 이와 함께 부르신 이와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자리(정체성)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신 분이시니 그 예수님과 같은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평강이 있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해를 당할까 하여 문들 닫고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닫힌 문 가운데로 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숨을 내 쉬시며 영이 아니라 육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성령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신비한 영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령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심 같이 성령이 사람의 심령에 오시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어 예수님과 같은 안목,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 가까이,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또 같은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에 가까이 부르셔서 평강이 있으라 하시고 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죄라도 사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는 지와 같은 법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시므로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보면 그 예수님의 이미지와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안에 땅에 씨가 뿌려짐과 같이 들어오게 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이시고 또 사람 마음 안에 들어온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는 법으로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님의 육신이 되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 모습이 자기 안에 들어온 사람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다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이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 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듯이 감동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사람의 정체성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알게 된 사람이 육신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 아들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저것이 내 삶의 존재 목적이고, 인생의 정체성이다!’라고 깨닫게 되는 사람은 그 마음 안에 성령의 감동이 있게 되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심과 같이 그 감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죄가 사하여 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가 사하여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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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삼일 째 되는 날에 제자들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는데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는 잘 개어져 있을 뿐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때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안을 보니 천사 둘이 서 있었는데 그 천사들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함입니다.”라고 답하고 돌아서 보니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예수님이 살아나실 것이란 기대를 가졌을 정도로 사모한 예수님께서 옆에 서 계신데도 몰라 봤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모하면 꿈에서도 보이건만, 직접 마주하고 있는데도 몰라봤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답하기를 랍오니 곧 “선생이여”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 까지 하시고 또 부활까지 하셨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일이 덜 끝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이제 곧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 하신 것을 보면 이제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아직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과 이제 올라간다는 사이에 있는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시는 제자들이 아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에 조건이 있다면, 아니 올라가시기 전에 있어야 할 일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 역시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직 그 제자들의 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신 모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이 되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컬어 “형제”라고 하신 것은 주목해야 한다. 예수 안에 한 형제자매라는 상용구에 현혹되어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형제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듯 제자들도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가서 “형제들에게”라고 하신 것은 이제 그들이 형제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로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그들의 아버지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것을 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다르다고 해서 본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휴지보다 못하다. 휴지는 흘린 국물 닦는 것에라도 쓰지만 내 돈 아닌 돈은 쓰면 쓸수록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나, 그리스도이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모든 일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있으니 그 능력을 내게 베푸실 것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으려면 예수님의 능력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음이고 성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의 그런 능력을 내가 혜택으로 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없고, 내가 예수님과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먹일 수 없는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은 21세기 과학이 우주선을 우주로 보낸다는 것에 환호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것에 아무리 환호해도 내가 우주선을 타고 올라갈 수 없다면 별반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런 뉴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우주선을 쏘는 비용을 간접적으로 대고 있을 뿐이지.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고 하나님이었다면 우리의 아버지와 하나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잘 주실 것인지를 신앙하는 것은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 믿어지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엠마오로 떠나기도 했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아직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된 것은 성령이 오신 이후의 일이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또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고, 또 예수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시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아니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결국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께로 가셔도 이 땅에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살도록 하시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생이란 그러라고 사는 것이니 삶의 의미와 목적이 회복되었는데 인생에게 있어 그보다 더한 유익은 없는 것이다.


그 제자들도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시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의 왕이 되리라 생각했고, 예수님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질 수 없었다.(만진다는 것은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사 때 제물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는 것과 같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오심이고, 이 모든 것은 제자들에게 유익인 일인 것이고,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무엇보다 이것은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며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들도 예수님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하나님,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존재의 신 여호와가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과 아버지가 같은 형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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