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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28-30) 다 이루었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19. 08:2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다.(물론 가상 칠언의 마지막은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다 이루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죽는 것이 다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더니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며 오히려 죄인으로 삼아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에 메달아 버렸는데 이것이 다 이룬 것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 잘 이루어졌다면 금의환향하는 모습이 되어야 이룬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리러 왔더니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것이 다 이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유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니 달린 이유부터가 사람들의 조롱이었다. 그런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신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의 시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상하지 않는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지,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어기고, 또 잉어의 몸이 되었을 때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냐는 비야 낭과 조롱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눈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죄인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군보다 적군이 더 가치를 아는 법이라서 그런 것일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더 죄인 같을수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다.(행악할수록 은혜가 많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목과 다른 안목으로 볼 때 죄가 많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그 눈에 보이는 본질이 흥하고 그 가치 안에서 선하고 의로우면 복을 받고,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가치관이다. 세상의 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임금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흥하면 훌륭한 임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의는 그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그 세 번째가 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의를 가지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하러 오신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가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눈에 보아지 않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고, 자동차는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심청전은 효도에 대한 생각이 나타난 이야기와 책이고, 먼 거리를 편하게 가고자 하는 생각이 열차와 비행기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이치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의와 생각이 표현된 것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이 된 아들은 나타난 육신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삶,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 그것이 어떠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아들인데 그것으로는 안 되고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왕이라고 인정하는 어떤 능력이나 공로를 행하거나 어떤 신분이나 가치를 가져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현혹하는 말, 그것이 선악과를 부축인 뱀의 말이고, 그 마음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신 포도주를 대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가치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십계명을 주실 때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심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인데, 그 존재가 다시 어떤 형상을 하나님으로 섬기려고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십계명이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섬기려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해야 한다면 조건을 만드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육신과 세상의 조건이 뛰어나면 사람들에게 우상과 같이 불리고 대접받는 것이 그것이다.


정말로 잘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순간의 모습이 어떤가? 과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성공인가?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영광을 받는 것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성공과 같은 것인가? 하고 있는 사업이 남들과 달리 교회에 다니는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성공과 같은 것인가? 육신의 병이 기도했더니 나았다는 것이 육신이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인가? 말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 아전인수 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나 램프의 요정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도 아니다. 절대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육신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육신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며, 신앙에 힘입어 가난한 자를 구제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행위로 이룰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대단한 신앙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에는 반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벌로 읽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의미고, 의미가 되는 것이고, 존재의 이유가 되는 관계고, 의미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두신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들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아들이라는 것이 나타나면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고 모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이룬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신 것은 ‘너 같은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조롱하는 자리, 자칭 아들이라 하는 것을 심판하여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정말로 역설적인 것이다. 이를 두고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 육신의 공로와 소유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계의 의가 버리고 인정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은 그 세상의 가치관이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인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은 예수님과 같은 법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 모두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뜻대로 우리가 이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가려 한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망상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늘 죄인이라는 것을 자기 운명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은 육신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주장하는 이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섬기러 왔다고 하심이 그것이고, 의에 대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 역시 그것이다. 죄인은 곧 종이며, 종은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나를 죄인으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곧 세상의 대변자들이다.


그렇게 자기의 생각과 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것이니 꿇어라!’는 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신앙인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과 같이 할 것이 아니라, 그 주장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 주장하는 바에 따라 이끌리듯 살아가는 것(이것이 순종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은 것이고, 조롱하는 것이고, 핍박을 받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쓴 소리해서 듣는 반응일 핍박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조롱이고, 신 포도주다. 그렇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일이 오늘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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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니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에게 여자의 운명을 바꿀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난 다음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다. 특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시니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과 우슬초에 적셔서 예수님의 입에 대니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다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의 마지막 마침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신포도주를 받으시고는 이미 다 이루었음을 아시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포도주는 로마 군인들이 마시는 포도주라고 한다. 이 신포도주는 포도주에 물과 계란을 섞어서 만든 것이고 포스카(posca)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 포도주는 유대인들의 제사에 사용되지 않는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마시는 포도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늬만 하나님의 아들이었듯 포도주도 무늬만 포도주인 것을 예수님께 드린 것이다. 한 마디로 격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외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군병들이 신 포도주를 장면에 대하여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의 일환으로 기록되어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신포도주를 주었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께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군병들이 마시는 포도주로 대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 와 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목마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순종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도 그것이고, 또 목마르신 것도 그것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에 있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다 하셨음이고, 목이 마르다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남았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러 오신 예수님 사역의 총화다. 화룡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다 이루신 것이다. 광야에서 높이 들린 놋뱀의 역할은 들리는 것으로 다 이룬 것이고, 높이 들린 목적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병이 나을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예수님으로 하실 일을 다 이루신 것이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예수님 사역의 목적까지 다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대접한 전후 순간에 밑에 있는 이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고백이 나왔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심을 조롱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하고, 또 정하지 않은 포도주로 대접함으로 예수님을 그저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치부했지만 사람들의 그런 관점과 대접이 오히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는 온전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대한 유대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고상해지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조롱을 받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됨이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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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그때 밑에는 요한사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엠마오로 가던 제자)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라고 말씀을 하셨다. 자기 모친을 보고서 죽어가는 마당에 “여자여”라니. 상식적인 표현은 아니다.


이 말씀은 다소 알레고리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한정되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여자는 육신으로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모든 인생을 향하신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은 여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랑되시는 주님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잉태하여 내는 거듭난 존재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인데, 그 정체성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또 여자의 삶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남존여비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면 성경을 글자대로 읽은 외식하는 사람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한 사람에게 특정하게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우리 모든 인류를 향하신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역시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여성의 격을 가진 인생이 낳아야 하는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아 내가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낳아야 하는, 사람의 생명이 거듭나야 하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모든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새 생명을 자기 안에서 낳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볼 때는 사형수와 같은 죄인인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한다. 아니 교회에 다니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마음만 먹고 신념을 가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그 생명의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거위 아버지에 펜더 곰 아들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된 예수님을 아들이라 칭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가지신 뜻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연상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셨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연상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함을 모친 마리아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받아 주시는 존재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시인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가서 육신이 세상을 살 동안 필요로 하는 것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들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지금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대하여 이긴 자가 되어야 의인이 되는 사람을 아들로 삼으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본질이 아니고,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뜻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인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필요하면 먹고 마시게 하실 것이고, 그 일에 대한 수고가 끝나면 하나님의 의(義)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 되는 유일한 법이고 의다.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면서 모든 인생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아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심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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