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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과 윌 스미스의 아들(드레 파커 역)이 주연을 맡은 <베스트 키드>라는 영화가 있다. 내용은 뻔한 내용인데, 성룡에게 무술을 배우는 아이는 이런 말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싶다.’ 라고 그러자 성룡이 이렇게 대답한다. ‘너 자신만 이기면 된다.’라고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려 한다. 이기려 한다는 것은 자기 맘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자기 맘대로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을 굳이 이기려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기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맘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관철시키려는 발상이다. 


신앙인들도 세상을 이기려 한다. 다른 것 같지만 그들도 세상을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한다. 아닐 것 같지만 세상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의 법대로 다스려지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모든 사람이 십일조를 내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뿐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 기도하고 심지어 거리로 나가서 전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서울역 광장에서 부흥회처럼 집회를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법과 지금의 신앙인들이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법은 세상의 법이 아니다. 세상의 법으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의 법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이긴 자가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공부 못하는 사람보다 이기는 것이나, 더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이 세상의 법이다. 아니 그것은 세상에서 이긴 것이 무엇인가 하는 법의 모양이다. 그 세상 법의 본질은 결국 공부를 더 잘해서, 더 높은 지위에서,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것이다. 남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한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겠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서 자선사업을 하겠다는 것도 세상의 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이 남을 종처럼 부리려는 것과는 달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선사업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신을 보내신 목적이 아니니 그 또한 결국 자기의 의를 구현해보고자 세상을 이기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법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생각을 자기 맘대로 구현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면 세상을 이긴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전하므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겠다고 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분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부러울 수는 있어도 자신이 그렇게 될 확률은 낮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 단속할 수 있는 몇 사람은 모르겠지만. 복음이 어디 특별한 역량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인가?


결국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성공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것도 세상의 법이다. 예수님께서 이기신 세상이 바로 그런 생각이 지배하는 세계를 이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남을 이겨 압도하고 높은 위치에서 세상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사형수의 자리에서 세상을 이기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공해서 세상을 자기 맘대로(본인은 하나님의 뜻이라 착각하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세상을 이긴 것 같지만 그것도 결국은 세상의 법이고, 그 법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기신 세상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맘대로 한다고 하니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예수님은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을 다 물리치고서 예루살렘을 정치적으로 독립시키고 또 종교적으로 완전무결하게 깨끗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셨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세상을 이긴다고 하니, 예수 못 믿게 하는 압박을 각오와 신념으로 이겨내는 것이나,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을 다 통제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이겠다는 것도 순종하셨다. 세상을 강제로 통제하는 권능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농부가 씨를 심듯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본 모습을 심으시고 그 씨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창조목적을 떠난)를 인정(시인)하고 돌아서게(회개)하는 하나님의 법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그 이김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을 다른 사람과 세상이 스스로 감동하고 돌이킬 수 있는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아내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냄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그 모습을 자기 맘속에 받아서 스스로 그렇게 살고 싶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요 세상을 이기는 이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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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24) 보혜사 성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6. 1. 12:44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16:1-24) 보혜사 성령



많은 신앙인들이 성령을 아는 것처럼 살지만 실상은 의심스럽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은 불치병을 고친다거나, 방언과 같은 은사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이 성령과 무관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령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인이 총을 쏜다고 총 쏘는 사람인가?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 일을 위하여 때로 총을 쏘는 것일 뿐이다.


성령은 신비한 능력의 상징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양의 은사들을 언급하고서 가장 마지막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모든 성령의 능력,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이나 예언이나 그 모든 것은 모두 다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령의 정체를 기적과 신비한 능력으로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가 사람이 육신으로 살면서 기대하는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도우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삶과 세상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을 신비한 능력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능력은 신비하다. 때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불치병이 낫거나 또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거나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 위를 걸으신 것 같이.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군인에게 있어 총과 같다. 군인의 임무가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것이듯, 성령의 역사하심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사람이 자기의 의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그 뜻을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며 살게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책무고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사람은 상대가 최면 상태나 아니면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을 나중에 알면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 안에서 스스로 인정되고 우러날 때 진심이 되고, 그렇게 사람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온전한 것이 된다. 그것이 아니면 다 거짓일 뿐 아니라 기만과 배신일 뿐이다.


성령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림과 같고, 여자가 혼인하여 남자의 유전자를 몸에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늘 씨 뿌리는 비유나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라는 말씀이 나오고,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사람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바꾸어내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이 성령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잉태함은 결국 뿌려진 씨의 생명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 자체가 가진 생명이 싹이 나서 씨가 심긴 땅의 흙(육신의 삶)을 열매(그리스도의 생명)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과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성자 곧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육신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말씀)이 자기 생명(삶의 목적과 의미)이 되는 것을 거듭난 생명, 구원 받은 생명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땅에 씨를 심어 과실이 열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실의 모든 것은 땅의 것이다. 땅에 있는 물(하늘에서 내린 비)과 양분이 하늘의 빛과 어우러져서 과실이 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보면(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보면) 열매는 결국 흙이다. 하지만 그 열매의 이름 곧 정체성은 흙이 아니라 뿌려진 씨의 이름을 가진다. 사과 씨를 뿌렸으면 사과가, 복숭아씨를 뿌렸으면 복숭아가 되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서 그것이 생명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의 이름인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일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필요하면 기적도 또 십자가도 지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다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인 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지 않았다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을 것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한 알의 씨가 되셨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모습이 바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되는 씨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이 사람에게 땅에 씨가 심기듯 들어오면 그 씨가 잉태되어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이 성령의 일이고, 그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 안에 받아들인, 즉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보내신다고 하신 성령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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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볼 때 ‘저 모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구나!’라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구나!’라고 깨닫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익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으로서는 너무나 큰 고통이지만 십자가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셨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예수님을 바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은혜이고 유익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심으로 그 뜻을 깨닫게 하실 성령이 오셨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이심으로 그 보이신 뜻을 성령의 역사하심(잉태케 하심)으로 자기 생명이 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진 온전한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 없는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죄가 다른 것이 죄가 아니다. 죄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다.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으면 죄고, 전구가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죄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을 벗어나면 죄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행위는 육신으로 사는 세계의 법에 따르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것이 죄다. 이것을 전하셨는데 믿지 않고서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진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으니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자리를 벗어난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시고 기뻐하신 사람을 부끄럽고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자리를 벗어난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은 의와 육신, 내용과 형식으로 하나 되는 존재의 관계인데,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공로를 세우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죄다.


그것이 죄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죄를 벗은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가 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죄를 벗지 못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책망을 받는 것이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서로를 책망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지만, 사회에서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아 죄인들의 세계인 교도소로 가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이 된다는 것은 굉장한, 아니 본질적인 회복이다. 원래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쉬운 말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뜻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 그것이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성령이 오셔서 의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가 나온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죄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가 세상을 책망할 수 없겠지만,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은 당연히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가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 밖에 없다. 존재와 생명의 법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이면 사람이지 반인반수가 없고, 생명이면 생명이지 반만 생명인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의와 죄에 대하여 온전히 회복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온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는 것이 된다. 세상의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가진 가치관, 세상이 의롭다고 또 선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의로 여기지 않으면 세상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예수님께서는 의복을 차려입고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세상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으셨기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세상의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세상의 심판은 늘 피라미드의 법이다. 재물을 더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이긴 것이다. 즉 더 의로운 것이다. 행위도 그렇다. 기도를 더 많이(물리적 시간으로)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돈이 없고 기도를 적게 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이 어차피 기준이 되는 것이 나타남으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므로, 더 가진 자가 나오면 없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임금이 가진 심판의 법이다.


이러한 세상의 심판을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하심이 기준이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너무 잘 만들었다는 것이 선함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지, 세상의 법과 가치관에서 겨루어 이기는 것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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