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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물론 이 말씀은 같은 의미의 말씀이기도 하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포도를 맺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고, 가지는 그 안에 있어야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나, 사랑 안에 거하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서로 의미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고,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계명이란 생명의 본성과 같아서 본성을 거스를 수 없으니 지킬 수밖에 없는 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기쁨이 또한 우리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이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너희’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의 기쁨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오신 분에게 있어 가장 기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기쁨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 기쁨,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기쁨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뜻하신 바가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다시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에게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흙에 불과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는 존재, 곧 생령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이나 같은 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사람이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고 관계인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내가 너를 불렀을 때 너는 내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먼저 표현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면 그 사람의 생명(목숨이 아니라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해 내는(말씀이 육신이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우리의 격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 안에서 같다는 것이다. 사과는 이 집에 있는 것이나 저 집에 있는 것이나 사과는 다 사과인 것 같이. 그리고 모든 사과를 어우르는 사과, 곧 사과라는 생명의 이름으로서의 ‘사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심과 같이 우리도 하면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니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의와 뜻)을 육신으로 나타내셨듯이 제자들도 또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와 같은 오늘 우리도 육신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이 나타나도록 하라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격, 곧 같이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기에 이제는 예수님과 포도라는 생명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종과 주인은 친구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분 곧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이 같으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려면 예수님과 격이 같아야 한다. 그러니까 존재의 정체성이 같아야 하고 생명이 같아야 한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데, 하나님께 공로를 드리려 하고, 또 자기 소유의 일부를 드려서 뻥 튀기듯 보상을 받으려는(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닌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섬기는 본성을 가지고는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는 사람,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기에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요 그릇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사람 역시 그런 목적 아래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육신의 삶을 드려(소비해서, 바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지으신 인생들에게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하시려고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 사랑의 표상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드려진 것이듯,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 계명대로 자신도 육신을 드려서 사람에게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노라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자리로 보내 달라’고 기도한다. 선교를 하겠다는 등,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겠다는 등.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소비할 육신을 주시고, 그것을 소비할 삶을 주셨다. 다만 우리가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게만 여기고, 육신의 한계를 넘는 것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자기 기준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어두워서 그렇지, 이미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냥 이 육신을 드려 서로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냥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과 같은 격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종은 끊임없이 그 수고를 드려서 인정받아야 하지만 친구와 아들은 그 정체성 자체로서 유지되는 관계다. 즉 공로 없이 존재로서 같은 격을 나누는 사이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였듯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을 드려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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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본능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25. 10:09 Writer : 김홍덕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죄를 짓는가?> 하는 문제의 답은 “아니요”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지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Do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른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의가 있다면 그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정죄하고, ‘이런 꼴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과 다르게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여 자기의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육신을 가진 자신과 모든 사람을 부정하고 부끄럽게 여긴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정체성을 떠나거나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 반면, 사람은 자신들의 행동을 기준으로 죄를 가늠하다 보니 구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늘 죄를 인지하고서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행위로 짓는 죄는 정확한 규범이 없다. ‘간음’에 대한 기준도 나라마다 다르고, ‘살인’이라는 것도 정황에 따라 다르다. 하나의 행동에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행위 규범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규범이 없다면 죄도 없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속한 사회와 국가와 문화에서 정한대로 그것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지키면 좋고, 지키지 못했다면 자기가 속한 나라와 사회의 법대로 책임을 지면되는 것이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속한 사회가 경멸하는 짓을 해 놓고 하나님이 다 사하신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하긴 그건 자유지만, 분명한 것은 구원을 받았다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죄와 사망의 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와 창조하신 목적을 자기 운명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삼느냐 아니냐? 그것이다. 행동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회의 법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정한 가치관에 의한 법으로 인하여 죄가 된 것은 그 법에 맞게 벌을 받거나 용서를 구하면 되고, 하나님 앞에 죄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이다. Be or Not이다. 그 존재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행위에 관한 것은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 수 있다. 행위의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Have에 관한 것 역시 같다. 돈이 없다는 것은 죄인과 같은 삶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 그렇고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존재의 법은 단순하다. 그것이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사람이면 사람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반은 사람 반은 말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 동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행위와 소유에 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그런 사람들의 가치관 안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살았거나 죽었거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죄가 사하여진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어중간하게, ‘구원 받았는데 죄를 지을 수 있느냐?’라든가, ‘구원 받은 사람들이 짓는 죄는 어떻게 하나?’와 같은 소리는 다 반인반수를 생각하는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죄와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 즉 Do와 Have에 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죄는 정체성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일 뿐인데.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행위로 비롯되지 않아도 사람 안에 있는 다양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관점이다. 예수님께서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하셨듯이 사람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을 심히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들 양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초 중의 기초다. 왜냐하면 이것도 역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부정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고, 언제라도 그런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서 일어나고 때로는 그것을 행동이나 말로 표현하는 사람의 본성을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왜 부정하게 여기는가 하면 그것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실정법이나 성경을 어기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은 부정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온전하지 않다. 노아의 방주가 그렇고 고넬료를 찾아가는 베드로의 일이 그렇다.


이 사람의 본성에 관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사람의 본성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자기 본성을 태어날 때 선택했을까? 그런 사람이 없다. 삶이라는 자체가 자기도 모르게 주어진 존재가 어느 겨를에 자기 본성이나 삶의 성격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뜻으로 걸어 들어온 인생이 아닌데. 사람이 가진 모든 본성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고 좋아하셨다. 그것도 심히.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어느 것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부정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부정한 것이지 선하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온 것을 사람이 부정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환상에 하나님은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신다.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5)


또한 바울 사도 역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3-5)

라고 하셨다. 사람이 가진 모든 것,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이 다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다 선하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본성과 욕망들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그 본성과 욕망이 목적 아래 있지 않고 자기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이다. 아담 역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드러낼 존재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육신과 인생이 감사할 것에서 벗어나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으로 바뀐 것이다. 몸이 바뀐 것이 아니라 안목이 바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어떤 것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그 어떤 것도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없다. 날카로운 것은 위험한 것이지만 칼이 날카롭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날카로움이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을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성욕을 예로 들면 사람이 성욕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가진 아들들이 나오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드신 그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셨기에 만드신 사람 안에 자기 종족을 보존하고 나타내려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성욕이 부모가 가진 삶의 뜻,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을 또 표현해갈 아들을 얻기 위한 결혼 안에서 표현되는 것은 표현될수록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벗어나 성욕 그 자체를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즐기거나, 또 하나님의 뜻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재물과 권세를 이어갈 아들을 얻기 위하여 아내를 취하는 것들이 죄인 것이다. 


즉 성욕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모든 본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뜻, 즉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자기 육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아는 가치관 안에서 누리고 주관하여 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당연히 사람이 가진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즉 존재의 정체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구원받은 사람의 가치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는데도 사람 안에 부정한 본성이 있다고 하고, 그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은 ‘구원을 받지 못해서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인 것이다.


따라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사람이 가진 모든 본성이 하나님의 목적에 수렴하게 된다. 생명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개가 가진 모든 유전자와 본성은 자신이 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지 고양이가 되려고 개의 본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개가 개다운 것이 선이다. 개가 고양이 짓을 하면 거짓이고 외식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부정하게 여겨지고 있다면, 또 때로 ‘그러면 구원만 받았다면 마음껏 성욕과 같은 본성을 표출하고 기분 나쁘면 아무나 때리면서 살아도 되나?’라고 묻는다는 것은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선전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선하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율법을 어기면서 안식일을 범해도 선하신 것이 그것이다. 당시에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현행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은 선하셨다. 그와 같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선하다. 왜냐하면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서 하는 ‘무엇’이라는 것은 포도 맺는 것에 관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구원받은 이의 본성 안에 있는 ‘무엇’은 자기 하고 싶은 것, 자기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이라도’ 할 때 그 무엇이다. 생명이 그것인데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데 살면서 육신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에 관한 법을 어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을 가진 한계이다. 하지만 한계가 아니라 그것이 목적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시다보니 세상이 가진 가치관, 하나님이 보실 때 죄와 사망의 법인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이 죄인이 되었는데 그 법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일은 이 육신이 속한 세계에서 정한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구원을 받아봐야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다. 생명이 나면서 삶이 시작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은 후에 왜 죄를 지을까?’, ‘구원 받았지만 사람 안에 부정한 본성은 그대로지 않는가?’와 같은 의문은 구원받지 못한 이의 의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문들의 답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정체성과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야말로 빛이 비췬 듯 밝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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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았으면 맘대로 살아도 될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24. 15:05 Writer : 김홍덕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진 의문이지만 어지간한 교회에서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구원 받은 다음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나 이 블로그에서는 죄가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존재가 회복되면 죄가 없는 인생으로 살게 된다고, 살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럼 구원만 받으면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답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생명의 법으로 설명한 것에 대한 반문만 하는 것은 대안 없는 비판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의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 의문을 원론적으로 정리해 보면,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완료형으로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_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말씀들은 현재 자신의 행동이나 삶이 혹시나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싶거나, 또 정죄를 하거나 받을 일이 있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인가 아닌가? 당연히 그런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구원을 받았으면 정죄함이 없다는데 구원을 받았으면 맘대로 살아도 될까?’, ‘구원 받은 사람은 죄가 없을까?’, ‘구원 받은 다음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될까?’와 같은 생각과 의문이 든다면 그건 한 마디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이야기하거나 가르치고 배우면서 ‘구원을 받았어도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늘 기도하고 회개하며 또 말씀을 듣고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변명하고, ‘예수님께서 세족의식을 행하시면서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셨지 않느냐?’와 같은 괴변으로 의문을 침소봉대하려 한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 (요한복음 13:1-1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



백번 물려서 그것이 이해가 되고, 또 항상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마음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히려 ‘의심하면 믿음이 없는 거야!’, ‘보지 않고 믿어야 해!’라고 협박하고 자신을 억제하고 신념으로 믿고 있으면서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안고 사는 것은 정말로 답답한 일이다.


이런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의외의 것에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느냐나 아니면 그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는 <죄가 무엇인지?>, <죄란 무엇에 관한 문제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죄와 구원의 정체성, 곧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왜 모르느냐 하면 존재의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죄를 논하고 있으니 당연히 모르는 것일 수밖에. 아들은 아버지의 혈통이란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공로나 소유의 정도에 따라 아들이 되고 종이 되고 그러는 것이 아님은 알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것이다. 거듭 났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용어고 개념이다.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명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이 되는 거듭남을 말한다. 이것은 육신의 생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 아래 자기 정체성을 두고 있다면 산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하고 악한 것을 찾아서 그것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망인 것이다.


생명이란 것은 한번 나면 변하지 않는다. 고양이로 나서 개가 되는 것을 본적 있는가? 남자로 나서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고 해도 사람으로 났다는 것은 틀림이 없고, DNA도 변하지 않는다. 즉 생명이란 나면 그것으로 언제나 그 생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이 거듭남일진데 거듭난 생명이 이전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구원받기 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가 거듭나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다시 죄인이 될 수 있으며 죄에 대하여 염려하겠는가? 죄가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행동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구원 받은 다음에 죄를 짓는 문제에 대한 의문이 있는 것이다. 즉 죄를 행동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 곧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보는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또 어떤 행위가 죄가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죄를 생각하고 구원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자기 존재의 자리를 떠난 것, 곧 하나님과 사람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것을 자기 의로 삼고 있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행위의 결과가 죄가 되는지를 늘 신경 쓰고 걱정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원 받은 다음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동으로 죄가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의 육신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행동을 한 자기 자신을 알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이 죄를 짓는가?’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아니 사실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앞에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보지 않았는가?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는가? 그렇다. 예를 들어 개로 태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치자. 한 강아지가 태어났다. 그 강아지가 다시 고양이나 말이 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죄와 구원에 관한 것이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생명의 주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이 행동으로 짓는 죄는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도 죄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육신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정의를 내린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의 자리를 회복한 사람도 육신은 그 문화권이 정한 법에 따라 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말하는 죄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아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문화권에서 규정한 죄에 의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자기가 사는 문화권에서 규정한 실정법으로 죄인이 되지 않으려 하거나, 영화 <밀양>의 유괴범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사했으니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겐 사과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살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지만 세상의 법이 십자가에 못 박으려하는 것에 순종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십자가의 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사회와 문화가 터부시하는 것을 범하고 <하나님의 일>을 운운하며 뻔뻔하게 있는 것은 후안무치한 신앙이다. 교회 세습과 같은 것이 그렇고, 목사가 여성도와 추문이 일어났는데도 버젓이 새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렇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오해라도 물라나고 죄인의 자리에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게 구원받은 증거이다. 자기가 아무리 억울한들 예수님만큼 억울할 리는 없을 테니까?



다음 편에 <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본능>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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