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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신 말씀을 자라 생각해보자. 특히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라면 아들도 사람이어야 할 텐데 비유라고는 하지만 마치 쿵푸펜더의 아버지가 오리로 나오는 것과 같이 농부는 아버지고 포도나무는 농부를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은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중요한 관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라는 존재의 정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뜻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다. 포도 열매를 얻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 바로 아버지, 곧 농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농부요 아버지이신 것은 과실에 대한 계획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획이 만질 수 있는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는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육신을 가진 존재가 되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계획을 가지신 이가 바로 아버지고 그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혈육이 아닌데 자신의 뜻을 이어갈 사람들을 아들이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아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계획(LOGOS)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을 육신을 가진 존재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 바로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이 바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하고 많은 나무 중에서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포도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잘 대변하는 과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포도나무라는 것은 결국 아버지께서 얻고자 하시는 바가 바로 포도 과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고 예수님은 포도나무며 우리는 가지라는 말씀을 풀어보면, 하나님이 포도 곧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얻고자 포도나무를 심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얻고자 하시는 포도 과실 곧 그리스도라는 성품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가지셨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낼 사람(포도열매)을 얻으시려고 그 이미지의 표본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의 존재 목적이자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포도나무 가지(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해야할 존재인 사람)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바로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끗한> 사람이니 것이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


사람들은 보통 깨끗하다고 하면 소독된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다. “저기 가서 깨끗한 걸레 하나 가져와라.” 걸레가 깨끗한 것인가? 걸레로 입을 닦는 사람이 없을 테니 걸레는 깨끗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깨끗한 걸레라는 것을 말하고 이해할까? 깨끗한 걸레란? 걸레로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걸레를 말하는 것이다. 즉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걸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장에서 기름 닦는 보루도, 또 바닥 닦는 밀대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과실을 맺는 가지를 아버지께서 더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이는 더 그 목적이 풍성하게 달성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하나님의 뜻이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아들의 삶이 더 풍성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왠지 모르게 이 말씀은 가진 자는 더 풍성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떠 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배 때 잘 씻고 화장하고서 참석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포도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를 심고 그 나무의 가지에서 그리스도라는 열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이 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더 풍성하게 나오도록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든 존재다.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사실 성경의 어떤 말도 아무 의미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 계획안에 있을 때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깨끗함 곧 성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성결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문제다. 육신이 아니라 삶이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는 삶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포도나무니 너희는 내게 붙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비중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까 삶의 얼마를 예수님께 투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문제는 늘 그렇다. 이면 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정말 단순하게 Be or Not 그것뿐이다. Do나 Have의 문제처럼 ‘얼마 정도’라는 것이 없다. 있으면 있는 것이고 아니면 없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아니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에 던져 버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맞는 존재가 되는 것. 하나님께서 포도를 얻기 위하여 심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이냐 아니냐가 사람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면, 제 아무리 육신이 팔팔하고 올림픽에 가서 메달을 딸 정도로 건강해도, 또 세상을 호령하는 재력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냥 그것은 불쏘시개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바로 가지인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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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은 유명한 장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로 유명한 말씀이다. 요한복음 15장과 16장은 어떻게 보면 14장의 말씀을 더 깊게 설명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지금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 하시는 말씀들이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모든 것에 대한 핵심적인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왕이라도 맞이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환호 속에 입성하셔서는 왕좌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근심하자 근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시고는 그 근심하는 자리에서 떠나자고 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 포도나무장의 말씀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1-2)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라는 말씀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너무 익숙해서인지 오히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우리가 가지라면 그게 같다는 말일까? 아니면 다르다는 말일까? 이 말씀은 당연히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생명,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우리가 예수님과 같다고 하면 질색을 하고 그런 말과 생각마저 터부시 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건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라는 것을 믿고 좋아하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에 손사래 친다는 것은 모순이다. 자신이 가지가 아니거나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거나 그 둘 중의 하나가 아닌 다음에야 그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 가운데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당연히 이 <너희>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는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불태워진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과실은 다른 것이 아니다. 포도나무의 과실이 포도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에 포도가 열리듯,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삶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나타낼 뿐이라는 말씀도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제별 성경 보기/십계명] - 누가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너희>를 단순하게 성경을 읽는 사람의 눈에 <너>라고 하니 성경을 읽는 사람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너희>는 거룩한, 그러니까 아주 구분된 존재들이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가장 밑바닥의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사형수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추한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는 말씀을 시작하실 때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선언을 하시고 시작하신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포도나무와 포도 열매가 <포도>라는 과일 명(이름, 정체성) 안에 속하듯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the Grape안에 모든 a grape가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다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를 말하는 것이지, 글을 읽는데 <너>라고 하니 자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 (요한복음 7:25-52) 스스로 증거하는 그리스도(인)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이 나를 향한 말씀이구나!’ 생각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거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정이 되고, 자신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는 것에 동의가 되는 사람이어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것은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을 금할 방법이 없음을 육신의 삶으로 알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는 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 포도가 가진 특징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설명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포도나무는 혼자 서지 못한다.(하나님과 사람은 내용과 형식으로서 하나가 되어야 온전함과 같다.)

  • 포도나무의 색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사람을 상징하는 붉은 색(아담의 뜻이 붉다는 뜻)이 합쳐진 색깔이다.

  • 포도나무는 열매 하나에 많은 열매가 함께 있다.

  • 포도주가 예전에는 기름과 함께 치료에 사용되기도 했다.

  • 포도는 다른 과일과 달리 망가질수록 가치가 높다.(포도주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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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보는 관점과 하나님 여호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십계명 Date : 2016. 5. 16. 21:08 Writer : 김홍덕

십계명을 보는 관점

앞으로 함께 생각해보는 십계명은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에서 그 안목이 바뀐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보면 좋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대상이 바로 세상적인 안목이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심을 구원이라 하듯이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신의 의로 삼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법에 이끌리는 세계로 들어온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천지창조다. 자기의 존재목적을 잃고 무심히 눈뜨면 일하고 그러다 먹고 쉬고 자고서 또 다시 그렇게 사는 삶 속에서 그 반복되게 요구하는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에 이르지 못하여 좌절한 인생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고 살던 암흑 같은 세계에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게 하는 빛을 만나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 목적에 따라 다스리는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된 것이다. 그 사람의 인생 안에.


바로 그 사람들이 사는 법,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가치관 안에 열린 사람들,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세계가 움직이는 법,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행동할 때 마다 법이 어떤가 생각지 않고 근원적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에 동의하며 살기에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다. 때로 법을 공부하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지만 나라를 붕괴시키려는 생각만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나라에서 사는 것에 지장이 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다.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세계의 삶도 그렇다. 십계명은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또한 달력(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 구약시대의 말씀이기에 엄중함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엄중함을 안다고 경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엄중함을 아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 자유롭게 살고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올림픽에서 애국가가 울려 나오면 가슴 뭉클함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엄중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십계명은 지난 말씀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키는 말씀도 아니다. 이것은 애굽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바뀐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의 모습이고, 그 삶의 울타리며 법이고 본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

십계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1계명이 무엇이다.’를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느 것도 스스로 있는 것이 없다. 존재의 원인과 이유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그것이 궁금하다. 그래서 ‘우주의 기원’, ‘인류의 기원’과 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궁금해 한다. 궁금하다는 것은 있는데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과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사람에게 하나님이 신이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있는데 사람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여호와가 사람에게 신이 되시는 이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지만 사람은 스스로 있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관계의 가장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통틀어 공부 좀 한다는 모든 학자들이 깨우치고자 했던 것은 전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데 어떻게 우리 능력으로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부모인지도 부모가 아이를 낳아서 부모로서 길렀기에 아이가 그 부모를 아는 것이지, 스스로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볼 능력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바로 그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신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이지, 먹고 사는 문제, 육신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존재가 정해지면, 내가 누군지만 정해지면 자연스럽게 그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게 되니, 하나님 앞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정체성대로 사는 것은 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백조를 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백조며 하늘로 날아가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미운 오래새끼의 교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애굽이라는 세계는 소유와 공로로 승부하는 세계다. 공로가 크면 위로 올라가고, 소유가 많으면 위로 올라가는 세계다. 그 세계에서 위로 가기 위하여 진흙에 볏짚을 넣고, 또 불에 구워서 단단한 벽돌을 만들듯 흙으로 만들어진 자기 인생을 그렇게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그 애굽의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셨다는 것은 사람이란 그렇게 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는 동시에 애굽의 법 아래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바로 그 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잘 이해가 되는 존재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시니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애굽에서 건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자기 정체성, 인생으로 나서 인생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 그것이다.(이것이 기도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신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자신이 하나님과 맺을 관계는 give & take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관계, 서로 중 하나가 없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2인칭의 관계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2인칭이다. 남편이 없으면 아내가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이 2인칭의 관계다. 그 관계가 정립되면 서로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두 정해지고 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또 아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정해지는 것이다. 관계가 정립이 되면. 즉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매개체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나는 누구며, 왜 사는 것이며, 그런 문제에 있어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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