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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나니 예수님을 파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병사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내가 그다.”라고 답하신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유다는 세상 군대와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에게서 병사들을 얻어서 예수님을 데리고 왔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잡는 것은 세상의 힘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잡으려고 할 때 잡으려는 대상을 제압할 수 있는 것, 잡으려는 대상의 특성에 적합한 것으로 잡으러 간다. 새를 잡을 때 함정이나 덫으로는 잡을 수 없고, 물고기를 총으로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잡을 때 세상의 군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 세상의 법인 육신의 능력으로 서로 겨루어 이기는 세계의 법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로마군대나 제사장들의 관점과 동일하게 예수님은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예수님을 칭하는 호칭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찾느냐?’고 했을 때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답한다. 나사렛 예수… 그것은 그 시대, 그 사회의 패자들이 사는 동네인 나사렛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세상의 법으로 볼 때 패자요 죄인인 예수를 찾는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여 죄인이라 여기는 가룟 유다가 그 관점과 가치관대로 세상 힘의 상징인 군사를 데리고 와서 당시의 천한 동네요 패자와 죄인들의 동네에 속한 예수, 즉 죄인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에 <내로라.>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패한 자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데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죄인이 되어 죽으셨다. 아니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수용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왜냐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도 의인이 되는 것이라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체시고 아들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해서 죽였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주인이 보낸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이 세상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죄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다름이 아닌 선악과다.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준 그 기준 자체가 선악과다. 그리고 그 선악과에서 규정된 선으로 보면 예수님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악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고, 행동이 경건하고, 세리와 창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그렇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부정한 자와 같이 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준이라 생각한다는 것은 나타난 것,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보이지 않고 나타난 율법만 보였기에 그것이 본질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외면하고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자기들 맘대로.


만약에 율법에 명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질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을 싫어하셨을까? 심지어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망각이라기보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확신한 것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따라서.


그 기준으로 보니 예수님은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길만한 것이 없는 분이셨다. 그 함축적인 표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인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저 모습은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고 자기가 정한 선악의 기준대로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 기준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것에 순종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법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인생은 세상의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을 보이시고, 그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전하신 것이다.


반면에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가고 있다. 먼저는 예수님 이름(정체성)으로 기도해서 세상에서 경쟁력을 가지려 한다. 예수님께 기도해서 건강해지려 하고, 상위 대학에 가려하고,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 한다. 물론 나름의 명분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소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그 경쟁력으로 교회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또 사회에서의 죄도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좀 더 고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행동이 경건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을 보신다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은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행동이란 중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라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행동을 바꾸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성경을 읽고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참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상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스스로 죄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죄로 규정한 것을 마구 행하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세상의 법, 경쟁해서 이겨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이긴 자요 하나님께 영광이라 생각하는 그 법 아래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모든 법에서 이긴 자는 없다. 어디서 어떤 법으로 인해서든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돈으로 이긴 자가 건강에선 지는 자가 되고, 명예에서 이긴 자가 자식 농사에서 진 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법인 것이다.


그런 법 아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의 모든 것에서 조차 의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의 모든 행동의 결과인 공로와 소유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스럽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고 안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며 이생의 자랑인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세상의 법을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라고 유혹한 것은 끊이질 않았다. 금식 후 사탄이 그랬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랬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세상의 법으로 너를 못 박은 상태를 이겨보라고 유혹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정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에 유혹을 받았는데 이긴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강아지에게 ‘야옹’ 소리를 내어 보라는 것과 같은 유혹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은 것은 유혹을 신념으로 마음 다 잡고 이기신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능력이 있음에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전하신 복음과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하나님께 세상의 삶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떼쓰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갈 능력을 발휘하자는 유혹이다. 세상에서 죄인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 세상에서 죄인이 되면 안 되고, 예수님을 믿는 자신도 세상에서 조롱거리나 패자가 되면 안 되며, 교회가 세상보다 뭐가 나아도 나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런 존재임을 알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은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에 순종하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법으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했다.’며 사형시킨 그 십자가에 순종했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가진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 영화 밀양의 살인범과 같이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했으니 세상에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세습되는 것을 비난하는 세상의 여론을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 유괴 살인법이나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이 육신의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사용하심과 같은 용도이다. 예수님의 육신은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됨을 순종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 육신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세상의 법으로 우리를 죄인 삼을 때 그 법 앞에 우리 육신을 내어주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 이 육신의 사용법이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 우리를 죄인 삼으면 죄인이 되어 수고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세상에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몸을 좀 수고하고, 한 걸음 더 걷고, 한 번 더 일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고,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못한다는 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같은 교회의 성도가 신앙이 없음에 그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수고할 생각은 않고 입으로 심판하는 신앙을 영적 전쟁이니 거룩한 일이니 심지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어둠의 자식들의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으로 군사를 데리고 온 유다가 ‘당신은 나사렛 예수’ 곧 죄인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니 이 이제 죽어야겠다는 그 주장에 자신을 맡기셨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 것인가? 오늘 자기 주장, 자기가 하나님인양 살아가는 세상과 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주장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어디 감히?’라고 하는 것인 신앙이겠는가? 아니면 죄인처럼 그 주장으로 인하여 수고하고 자기 육신을 그것에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땠는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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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24-26) 아버지의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3. 12: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고 하셨다. 이는 여호와라는 이름, 단어가 이 땅에 알려졌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와 동일하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다는 의미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넘쳐나지만, 사랑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남자, 또 여자가 있지만 그 중의 한명과 결혼해서 사는 것은 여자와 결혼하고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 나에게 여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사람 또 나에게 남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사랑은 상대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 상대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헤어지면 삶의 의미가 없다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에게 존재의 의미고, 또 그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 사람들이 어떤 물건이나 일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씻고 빨고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의 존재 이유, 삶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이것을 짧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사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람에게 끊임없이 알게 하시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또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정체성은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정체성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다. 아들은 자기를 알아야 아버지를 안다. 즉 아버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며 그 관계성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 즉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정립이 되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해질 때 그 사이에 사랑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인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신 분이라는 의미와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또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예수님의 육신으로 표현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다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비추어 생각한다. 육신의 일을 헌신적으로 돕고 수고하는 것과 같은 것을 사랑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그런 모든 사랑의 표현은 사랑에 대한 의미가 표현된 것이지 그것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 자신의 삶에 있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 헌신적인 것이지, 관심이 없는 일은 전쟁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사람이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또한 사람이 알았다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정체성이며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의미 있는 관계, 곧 사랑하는 관계이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예수님으로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아버지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다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든 인생에게 중요하고도 중요한 이유는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도 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심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존재로 지음 받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펜더 곰의 아버지가 거위가 될 수 없다고 했듯, 세상을 살 동안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믿기에 하나님이나 또 다른 신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문제 해결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이 그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나타나게 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존재에 맞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 의이신 분이지, 나타난 것을 보고 그렇게 하면 내면이 바뀌는 법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가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살고 있는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 받기 원하고, 또 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때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고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삶의 목적, 즉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그 본질로 착각한 세상에서 인정하는 법대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도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세상이다. 세상의 법을 자기 삶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교회에 다닌다고, 눈만 뜨면 성경을 보고 외우듯 한다고, 육신의 삶을 팽개치고 교회 일만 돌본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관한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어떤 세계에서나 항상 나보다 이긴 자가 있어 나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의 법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아는 자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자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것이고,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세상을 오래 살면서 세상이 원하는 법을 좇아서 나이 들도록 살고 나서 보니 그 법으로 그렇게 이기려 애쓴 자기 삶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도전하는 중이고, 나보다 더 이긴 자는 세상에 충만한 것을 보면서 자기 삶이 허무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모른다고 하고, 늙어서 인생의 의미를 ‘무(無)’라 하고 인생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기에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순종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체성을 아는 것 또한 당연하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이 기도의 주제다.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며, 하나님이 아버지시며, 하나님을 알고, 이름을 알리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 하나님의 이름과 정체성을 알고, 자기 존재의 의미가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이 안에 있는 인생이 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에 그 목적을 이루시려 십자가로 가시면서 하나님께 창세전부터 가졌던 그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구하시는 것, 그것이 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자기 삶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하나님이 자기 삶의 의미와 내용이 되시고 자신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나타내므로 사람들이 그 삶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그 목적이 우리 삶의 의미다. 그 의미가 깨달아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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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24-26) 아버지의 이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 09: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하시는 기도의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음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있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없는 과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만 봐도 적어도 예수님 당시 이전 4,000년 정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것은 모세 시대부터라고 쳐도 아담의 아들 아벨이 죽은 뒤에 다시 얻은 셋을 낳았을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고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했다고 하셨을까? 이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은 불렀지만 그 정체성은 몰랐던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버지는 물론 아들의 정체성까지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주로 범죄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신원미상’이라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을 발견되어 수사를 해야 하는데 그 피해자의 신원, 곧 정체성을 모를 때 ‘신원미상’이라고 이름을 부여한다. 마치 그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주관하는 신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라고, 또 모세를 통해서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은 알고 불렀는데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정체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범죄 피해자에게 원래 이름이 있는데 신원미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알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한한 일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그 세계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일을 다 이루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보고하듯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은 무엇인가? 예수님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 이전에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렀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 그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뜻이 표현된 존재다. 아버지 안에 있던 눈에 보이지 않고, 형상을 가지 않은 뜻이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서 표현된 존재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형상을 사람으로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사람으로 나타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 사람을 지으신 의와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자신은 하나님의 어떤 의가 자기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인지를 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로 알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아는 것이며, 세상과 다르게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신 것은 물 위를 걸으시는 일로도 아니고, 오병이어의 사건도 아니며, 죽은 자를 살리신 일로 인함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신 사건은 오직 십자가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실패자로서 사형수가 되어 못 박히시니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 세상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안목은 하나님의 관심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안목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진 이들과 신앙은 세상에 넘쳐난다. 산신령에게 비는 것이나 부처에게 비는 것이나 심지어 돈을 믿는 것이나 자기 힘을 믿는 것이나 모두 예외 없이 그것이 목적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자기가 믿는 것의 위대함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는 무례한 신앙이 바로 세상에서 잘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시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밑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한 사람들과 같은 시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세상의 법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과도 같은 신앙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시각과 같은 것이다.


그런 가치관과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 정체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로 아는 것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를 알게 하신 십자가와 반대로 향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법으로 실패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는데, 많은 사람들(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무리 입으로 불러도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알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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