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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24. 10:18 Writer : 김홍덕

죄와 의에 대한 모순된 일반적 견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죄인인가를 생각해보자.’라고 한다면 어떨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야!’라고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실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자신 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그렇게 인간이 완전하지 않고,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도 불연 듯 실수처럼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라면 이 죄를 어떻게 벗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얼버무리듯이 정말로 천국에 가려면 모든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기 전 그 찰나에 죽어야 하겠지만, 이건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몇 명이나 누렸을까 싶은 것이고, 그것 역시 사람으로서 너무 얻기 힘든 행운 같은 일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벗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대안처럼 보이는 변명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부연 설명들을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종파의 교리에 따라 첨가한다. 예를 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라든가, 아니면 ‘그런 자신의 문제와 한계와 죄를 해결하는 대상을 하나님으로 정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식으로.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모순된 논리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완전한 행동과 삶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것에 미치지 못해서 죄인이라고 인정하고서 그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종교적인 율법과 경전의 말씀들을 지켜서 죄를 벗고자 하는 것이 그렇다. 자기 행동과 삶이 의에 이르지 못해서 죄인인데, 그 행동과 삶을 올바르게 해서 죄인의 신분을 벗으려 한다는 것이 모순인 것이다. 그 와중에 단지 행동의 가이드가 성경이기 때문에 대부분 지켜내지 못하는 자기 삶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자기 행위가 의롭지 못해서 죄인임을 인정하는데 그 행위를 스스로의 노력과 신념으로 의롭게 하려고 노력해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딱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내 말을 믿어봐’라는 말 만큼 불신을 자인하는 말이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위가 의롭지 않아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의인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인이 될 때와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다 아시고 무엇보다 우리의 그런 모든 모순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차비를 대신 내어준 것처럼 내 죄를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하지 못하는 행위의 의로움을 예수님께서 대신하셨는데, 그런 의로움을 가지셨으면서도 죄인이 되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내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의 논리지 성경의 논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조차 행위로 구원하지 못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손과 발이 못 박혀서 꼼짝도 못하셨는데 무슨 행위로 의롭게 되시겠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대속은 그런 대속이 아니다.




죄에 대한 근본적인 안목의 괴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근원된 기준은 <자기 행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몸의 행동과 마음의 행동(생각)을 아우르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경우가 늘 있기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그런 기본 관점을 살펴보면, 사람이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악하기에 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위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가지신 죄에 대한 기준이 사람의 행동과 말과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렇게 하라’ 또는 ‘이렇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자신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느냐 아니냐를 심판의 기준으로 보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Do와 Have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행위와 소유를 판단하시는 분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라고 부르면 이 무슨 모순인가?


그리고 이 모순의 절대적인 맹점은 사람은 그런 기준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간주하고서 스스로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 규정된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시 죄인이 되었던 그 불완전한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더욱이 매일 실패하면서 ‘더 잘하자!’라고 뇌까리며 신념을 북돋우는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신앙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 <“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하는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을 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부터 재정립을 해야 한다. 아니 늘 입으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과 자기가 행동으로 죄인이 되었으니 행동으로는 성경이나 어떤 경전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이 괴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평생 성경을 수천 번 읽었어도, 또 행동으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줬다 해도 말짱 도루묵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인정되지 않는다면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느라 남들 누리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괜히 인생만 허비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난리 법석을 떨면 뭐하겠는가? 산에서 낚시 하는 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기 말과 생각과 행동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맘대로 된다면 그것을 잘 제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자기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이신 반응이 우리와 달랐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게 모순 덩어리로 보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지으시고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셨다. 사람은 사람을 볼 때 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여기는 이 육신의 삶을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문제를 보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행위가 선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늘 이것을 극복하려고 좋은 생각을 하려하고, 또 행동을 바르게 하려고 힘을 쓴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그 노력이 수포가 되면 회개한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아담과 하와와 지금 우리가 다른 존재인가? 그때는 날개가 있어서 막 날아다니고 했는가? 그것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다 같다. 바뀐 것은 단 하나, <사람이 사람을 보는 관점> 그 하나만 달라진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먹고 배설하고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단 하나의 사건이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 자신을 보니 벗은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벌거벗고 여자인 하와와 에덴동산에서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벗은 것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단 하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악한 과일도 아니고 선과 악이 함께 이름에 있는 선악과를 먹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맞이한 하와에게도 또 하와역시 아담에게 자신이 벗은 것도 감추어야 했고, 상대가 벗었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목이 바뀐 것이다.


이것을 성경이 죄라고 하셨다. 이 죄의 정체는 바로 <사람을 볼 때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하는 자기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죄인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보니 자기 자신도 부끄럽고, 벗은 다른 사람도 못 볼꼴이라는 것이다. 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 그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정체성을 보니 그 꼴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과 생각이 죄라고 사람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사람이 죄인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바로 여기에 사람의 죄가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보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사람이 가진 자기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인 이유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과 행동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그 생각을 하나님께서 <악(惡)>이라고 하신 것이다.(마 9:4)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가 사하여 졌노라”>하심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사람이 죄를 사한다고 하니 참담하다.’하는 생각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 바로 <악한 생각>이라고 꾸짖으신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평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인 자기 자신과 또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그 안목을 가졌기에 죄인인 것이다. 그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먹었으니 자기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자기가 심판하고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볼 때 아담이 부끄러워한 것처럼 여기면 연단하게 되고 채근하게 된다. 또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보면 비판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아무리 지켜도 되지 않았던 것은 그 속에 사람에 대한 기준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아야 한다. 그 기준이 자신도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도 온전히. 그러려면 비판하는 이유가 없어져야 되는 것이다. 그게 마음에 남아 있는데 노력으로 될 것 같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평생 죄인이다. 그렇게는 죄가 사해질 수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불연 듯 또 비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자기 안에 남아 있으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그 생각과 행동으로 인함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는 자기 안에 있는 그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를 자기 맘대로 심판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선악과를 먹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보지 못하는 안목과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정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 때문이다. 생각과 행동 때문이 아니다. 생각과 행동 때문이라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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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누구인가? 그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을 알아야 하나님 앞에 두는 것이 신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일반적으로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또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능력이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이지만 어떤 분야에 월등한 사람을 OO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신이란 자기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는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유일한 차이, 하나님은 있고 또 해결할 수 있지만 사람은 가지지 않았고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존재>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으신 분이고, 사람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른다. 때로 사람들은 아는 줄로 착각하지만 자신들이 ‘인생의 목적은 이것’이라고 하는 것들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만으로 사람(the Man)이라는 존재가 가진 공통된 자기 존재의 목적을 모른다는 것을 증빙한다. 사람이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다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만 해도 사람마다 가진 수준이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돈이 자기 목적일 수 있겠는가?


이 차이, 즉 사람이 가지지 못한 자기 존재의 목적 이것을 아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이시다. 그러면 다른 신들은 어떤 신인가? 하나님께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니, 신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의미일까? 잘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니다. ‘두지 말라’는 것은 ‘섬기지 말라’는 것과는 다르다. ‘둔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세상에 여러 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에게 신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라는 정의 자체를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가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낸 자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세계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이라면 세상의 여러 신(神)중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하거나 비장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당연히 사람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계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또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또 할 수 있는 존재가 신이고,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 인생의 유일한 신이신 것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과 자신이 ‘신과 피조물’이라는 2칭의 관계로 만나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이 1계명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하나님은 자기 삶의 의미요 목적이요 내용이고, 자기 삶은 그 형식으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신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자신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의 목적을 가지신 분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 사람들도 다 바라는 것을 단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거나, 교회에 감사 헌금하는 것으로 방법만 다르게 구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을 신으로 두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런 것 해 주시려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성품을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Do나 Have에 관한 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으로 보답하는 신을 따로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은 너무나 많다. 이름만 다르지 모두 똑같다. 아이폰이나 갤럭시폰이나 통화하고 인터넷 하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다 같듯이, 산신령이든, 부처님이든 무엇보다 자기가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하나님’ 할지라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일에 대한 안위와 성공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과 통화할 수 있듯 신만 다르지 신앙은 완전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같다는 것은 신의 정체성도 같다는 것이다. 신을 위하여 수고하면 보응하고, 신께 자신의 재물을 드리면 또 보상하고, 위험하고 험한 일 당하지 않으면 이렇게 행동하고, 잘 살려면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범주가 통화와 인터넷이란 기능이 같듯 다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고, 그런 모든 기기를 스마트폰이라고 하듯 신에 대한 개념이 그렇다면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 격하되셔서 졸지에 Do와 Have의 잡신의 반열에 강등되신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신이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이지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이시고, 더 나아가서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이 사람의 램프의 요정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 가진 존재라는 것이 자기의 정체성임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1계명은 세상의 여러 신(神)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진 유일한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 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 바로 1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애굽에서 너를 건져 낸 여호와’라고 하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 존재의 의미로 살아가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가진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너희>에게 있어서 신은 나 여호와만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를 천지창조의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데 왜 다른 세계가 있겠는가? 세계가 애굽과 달리 존재의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계인데 왜 다른 신이 있겠는가? 하나님과 자신이 <너와 나>의 2인칭의 관계, 하나가 없으면 상대가 의미 없어지는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니 당연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신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신은 하나님뿐이신 것이다.



**) 뭔가 설명이 시원하게 된 것 같지 않지만 일단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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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아버지는 농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요 14:11)’라는 말씀도 하셨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로 붙어 있고, 또 같은 생명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지만,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의 관계와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다르다.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 = 농부와 포도나무)?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농부와 포도나무는 하나의 개체는 아니다. 농부와 포도나무는 농부가 포도를 얻겠다는 의(생각)를 가졌고, 그것을 포도나무를 통해서 현실(상)화 하는 관계다. 즉 농부의 뜻을 포도나무(포도라는 생명)가 표현해 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하나님의 법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임을 확증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농부와 포도나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농부가 가진 포도를 얻겠다는 그 의와 뜻은 포도나무를 통하여 구현(나타나는)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포도나무와 포도나무 가지는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은데 “주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 그 사랑은 내 기쁨 ♬~”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뭔지도 모르고 부르는 노래 곧 찬양이 아니라 노랫소리일 뿐이다. 예수님은 왜 포도나무고 나는 왜 가지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기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에 대하여 경계한다. 이런 경계는 우선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육신이 예수님의 본질이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경계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개체인데 그것이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 예수님의 정체성을 육신으로 보이신 기적과 같은 예수님의 공로를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보다보니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과 또 자신과 같은 존재인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을 터부시하는 이유는 바로 the Christ와 a christ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다들 지식적으로는 Christian이라는 말이 a little christ라고 말하면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만약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면 적어도 <예수님과 나는 같은 존재>라는 것이 ‘아멘’이 될 것인데 사람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the Christ와 a christ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포도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얻고자 포도나무를 기르시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풀면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해 내는 목적으로 만든 사람이 그 목적을 잘 달성하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열매를 얻고자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존재 =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고, 아들이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얻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삶이 포도요, 그것을 맺는 가지가 우리 유신의 삶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 곧 생명의 나고 자라며 표현되는 이 생명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인 것이다. 그것을 포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농부

 열매에 대한 뜻을 가지신 분

 열매의 정체성 포도(그리스도)라는 생명

 농부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 아들그리스도

 농부 이신 하나님의 뜻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

 하나님의 아들 열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 포도 열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지이고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신 것이다. ‘포도나무’는 생명의 이름이다. 사람이 보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포도나무를 일컫는 생명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하심대로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모든 사람이 속한 세계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면 ‘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가 될 수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자신이 거듭나서 그 생명을 표현하는 한 그루의 포도나무와 같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랑,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살아있는 생명 안으로 속하는 사람은 포도의 세계에 속한 포도나무이고 가지니 당연히 농부가 원하는 포도를 맺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포도를 맺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포도라는 생명은 포도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포도나무 가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라는 생명이 가진 모든 생명의 법 곧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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