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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12-40) 이 세상과 내 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9. 09:06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사형을 받으시는 죄목은 크게 두 가지다. 아니 그것이 전부다. 하나는 신성모독이고 또 하나는 반역죄다. 이 세상에 임금이 버젓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나라인 유대의 왕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대신한 총독이 와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라고 하시니 이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목수의 아들, 초라한 몰골로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지내고 밥을 먹던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는 물론이고 웬만한 중산층과 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 용납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인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는 사회의 문제아였고 죄인이었다. 그런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신성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것이 첫 번째 죄목이었다. 바로 신성모독이었다. 그런데 이 죄목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죽어야 할 죄지 로마의 법으로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아니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인 상태에서 사람을 죽일 권한조차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보낸 것이다. 빌라도가 아니면 예수님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과는 질문 자체가 달랐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은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까 아니었다. 그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이 “네 안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냐?”고 물으신다. 이는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와 같은 질문이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보냈으니 묻는 말이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의미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면 “네가 왕이냐?”는 빌라도의 말에 다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니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답하지 않으신다. 진리는 예수님이 의미가 없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이 같고 생명이 같은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예수님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말로만 바라보는 빌라도에게 있어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핵심은 나라에 관한 것이다. 빌라도는 자기가 본질로 보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으로서 예수가 반란을 꾀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보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빌라도가 보고 있는 세상이 예수님이 왕이신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하셨다는 죄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생각한다. 그 죄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 누구나 죄로 여기는 것들이다. 화를 내는 것, 욕하는 것, 사람을 미워하는 것, 심지어 때리고 죽이는 것,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나 훔치는 것, 음란한 마음과 때로 그 마음을 실천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에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지 못한 것을 약간 더한다. 예수님께서 사하신 죄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먼저 이것을 생각해 보자. 죄가 성립하려면 가장 먼저 법이 있어야 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 그리고 법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존재하려면 나라와 사회가 먼저 있어야 한다. 나라가 가진 의로움을 기준으로 법이 생기고, 사회와 세상이 가진 의로움을 바탕으로 법이 생긴다. 그 법이 앞에서 열거한 것을 모두 법으로 규정하고 있고, 사람들이 그 법 아래에 있으므로 그 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 법을 어길 때 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고 도적질하고 음란한 것과 같은 것은 어디에 속한 법을 어긴 죄인가? 그것은 세상에 속한 법이다. 물론 하나님의 법도 그런 것을 죄로 여기시지만 하나님은 그 행위 자체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런 범죄를 죄로 보시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에 죄로 보시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대로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을 욕하거나 미워하고 심지어 때리고 죽이는 이유는 사람 안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은데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각이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자신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에 대하여 자기 맘대로 선하고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된 마음이다. 그 기준이 설사 성경에 있는 것이라 해도 다를 게 없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 하는 이를 책망하셨다. 선은 오직 하나님 그 분 자체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 것은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다. ‘그건 당연하지!’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다르면 법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의 죄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법에 속했으니 당연히 그의 세상도 이 세상이다. 즉 빌라도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회개를 한답시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에서 죄로 여기는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는 것이다. 행동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행동을 죄로 여겨 그 죄를 예수님께 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나라, 유대는 이스라엘이라는 육신의 혈통을 따른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다는 ‘찬송’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유대고 이스라엘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신 것은 이 땅의 법에 의하여 죄를 심판하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나라,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의가 그 사람을 다스리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라는 빌라도의 법, 애굽의 법, 사람의 행동을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그 나라는 행동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존재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나라다. 행동은 어디까지나 존재의 표현일 뿐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도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자동차의 본질은 차체가 아니라 이동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사함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 곧 가이사의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으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범칙금을 내야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교회에 대신 헌금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육신의 행동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가 되는 것을 죄의 본질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가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세계, 애굽의 세계d에 속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즉 사람의 행동 자체가 법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가 모든 의의 핵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나를 왕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의 말이냐?’고 물으신 것이 그것이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왕인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행위는 관계가 정해지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존재가 정해지면 모든 용법도 정해진다. 그것이 존재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만 정해지면 모든 것이 다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거나 이야기할 죄는 오직 그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인,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존재 정체성, 그것 하나만 정해지면 된다. 그것 외에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 


그것 하나가 잘못되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보니 육신이 속한 세계가 죄로 여기는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며, 내가 선하게 여기는 대로 해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 그 선악과를 먹은 것 하나가 인류의 모든 죄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해결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 육신이 지은 죄는 그냥 세상의 법에 따라 살면 된다. 법규 어기면 범칙금 내고, 행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법에 따라 벌을 받거나 배상하면 된다.(물론 그 속사람이 선악의 기준이 없는 상태라면 그러기 힘들겠지만)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의 백성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육신이 범한 죄를 하나님께 회개한 근본적인 죄로 볼 것이 아니다.


어쩌면 빌라도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법에 관해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놓아주려 노력한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법은 예수님을 기어코 죄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세상이 의롭게 여기는 기준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가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모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법으로 심판하고 죽일 때 왕성해지는 나라라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서 죽으면 풍성해지는 생명의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노라하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하나님이 내용이 되시고 육신을 가진 자기 인생은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라는 아는 것만 해결되면 된다. 그것이 해결 되지 않은 상태 그 하나만 하나님 앞에 죄다. 그것이 유일한 죄다. 그러나 그것 하나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죄를 낳는다. 세상은 늘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요란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살인이 일어나지, ‘내가 죄인이요!’라는 사람 때문에 소란스러워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행동으로 지은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육신이 속한 세계의 법에 따른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하나님을 믿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아니지만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으셨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법에서도 무관하고 사함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법이 자기 의의 본질인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이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의인이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으면 죄인이다. 이는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와 본성의 문제고 그 사람의 존재 정체성의 문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 육신이 이 세상에 속하므로 세상의 법으로 육신이 죄인이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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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 가셔서 심문을 받으셨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은밀하게 말하지 않고 늘 드러내어 말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묻느냐?”고 하시면서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대제사장의 하속 하나가 예수님을 치면서 “대제사장에게 무슨 싸가지 없는 말이냐?”고 말을 했다.(의미가 그렇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그 하속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증거를 대지 왜 때리느냐?”고 답하시니 대제사장 안나스가 또 다른 대제사장이자 사위인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결박하여 보내고 또 빌라도에 보내어져서 심문이 이어진다. 당시는 지금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종교와 정치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여서 종교적인 문제로 사람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고,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사실 예수님을 잡아오긴 했지만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죽일 명분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괘씸죄 정도였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가운데 실수를 하면 그것으로 송사를 할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성공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과 같은 말을 했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법이라는 것이다.(요 19:7)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괜히 죽고자 하심도 아니고, 대제사장의 농간에 넘어 간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을 줄 아시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씀하셨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에 대하여 흔히 “우리를 대신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가 더 옳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예외 없이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법에 의해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는 사람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대속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죄인,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의 대속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기에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죄를 시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죄목이 먼저 신성모독인 것이다. 감히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의 정체성을 설명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기에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이 나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얻었으니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형상으로 즉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시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많은 아니 대부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송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그런 신이 따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고상해지고 영광을 받아서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언제나 죄인인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자리를 떠나 고상해지거나 성공하면 의인이 되지만 사람이 자기 본성을 그대로 인정하면 언제나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목수의 아들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부끄럽고 금욕적인 생활로 다스려야 할 존재였지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뿐더러 보기에 심히 좋은 존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을 사람이라는 형상을 가진 존재가 표현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인 것이다. 아버지의 의와 뜻을 육신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기준,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보기에 좋은 존재가 아니라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한 아담은 무화나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다.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다. 즉 율법으로 자신을 가렸다는 것이다.


그 율법, 사람을 부끄럽게 보는 선악의 기준을 가진 안목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부끄럽고 가려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자고 심문하는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유대인들이 가진 가치기준, 즉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진 세상의 안목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자신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하며 세상의 군사들을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라 여긴다. ‘아니 우리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상해지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리, 죄인 중의 죄인인 사형수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신 분이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이 고상해지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말하고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심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늘 있는 심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물을 때 뭐라고 답할 것인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물을 때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예수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때 마음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대답으로 인하여 삶이 송두리 달라진다고 해도? 그럴 수 있어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다.




Written by 김홍덕 - 010.3396.5555,  the.elphi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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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금송아지나 사람들이 만들어서 절을 하는 각종 조각물이나 상징물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우상이지만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우상의 진정한 본질은 사람들의 마음에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불상이나 금송아지이므로 우상의 본질은 사람 안에 우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을 이끌 신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형상으로 만든 조형물과 같은 우상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안에서 어떤 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 의를 상징할 것을 정하거나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 마음에 농사가 잘 되어야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농경사회의 신들은 많은 경우 당시 농사에 절대적인 요소였던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이 우상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 안에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라는 의가 있으며 그것을 나타낸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실 때, 시작하신 말씀은 <너를 위하여> 이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자기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것으로 표현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으로 표현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형상으로 표현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할 존재로서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형상으로 표현할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형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형상은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이동이라는 의(도)가 자동차로 표현되었고, 소통이라는 의(도)가 전화기로 나타난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형상으로 표현해야할 의를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지어진 형상이 있는 존재인데, 그 존재가 자신을 위하여 다시 형상을 가진 우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인공지능이나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하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것에 자기 삶이 잠식당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염려하는가 하면 이는 컴퓨터나 인공지능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이 의를 나타 내여야 하는 존재인지, 의가 나타난 존재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스스로 빠진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니라, 의가 나타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를 위하여 무엇을 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먹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육신의 일에 있어 언제나 자신을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위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은 예외 없이 만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자기를 설명할 의와 뜻, 곧 우상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없는데 그것을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정의를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만든 우상이라는 것이 우습게도 생물학적으로도 사람보다 열등한 동물들을 형상화하는 우스운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것은 자신들 만의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드신 이가 주시지도 않은 것이 안에 있어서 그것을 형상으로 표현했다면 어쨌든 자기 안에 형상으로 우상으로 표현할 의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을 위하여 섬기는 것을 정했다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만드신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누구라도 싫어할 일입니다. 나의 의를 표현하라고 만든 존재가 준적도 없는 자신의 의를 위하여 다시 뭔가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그 만든 것이라는 것이 내가 만든 것을 모방한 것이라면 기가 찰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포도원을 맡기고 갔는데 자기들 것을 삼으려고 주인이 포도원을 맡긴 목적대로 소산을 얻고자 하니 자기들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종을 죽이고 아들을 죽였다는 것도 바로 이 상황과 같고, 니느웨로 가라니 다시스로 간 요나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할 존재인데 자신의 의를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죄의 근원입니다.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이지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라고 지었는데 가서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을 형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니 자기 자리를 제대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존재가 아닙니다. 즉 자기 의를 나타낼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상입니다. 이미 형상화 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만 잘 표현하면 됩니다. 그것은 마다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자신을 위하여 즉 자기가 옳다는 것이 선함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는 모든 짓은 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마음에 돈이 최고다 하고 돈을 좇으면 돈이 그 사람의 우상이고, 권력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권력을 추구하고 섬기면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 돈과 권력이라는 것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옳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2계명을 지키는 것은 손으로 우상을 조각하거나 어떤 형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2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형상으로 자기 의를 표현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형상과 삶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이나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2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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