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날과 상황은 반드시 오기에 그 날에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가치의 충돌이다. 살면서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인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과 방법이 어떠해야 가치 있는 것인지(잘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항하는 것이 미움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과 세상의 본질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존재로 보시고, 세상은 사람을 부정하고 연약하게 본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곧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한 것이라고 전하시나,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만물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류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느라 과학에 매달리는 것이다.(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세상과 예수님이 그렇게 다르다보니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미워한다면 예수님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미워한다고 하셨다. 세상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이유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편인데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과 같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말씀을 성령과 연계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령님이 사람 마음 안에 오시면 결국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같으면 가치관이 같아지는 것이다.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지가 다르다면 생명이 다른 것이다. 코끼리는 그 덩치에도 풀이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하여 가치 있는 것이고, 족제비와 같은 것은 작지만 동물을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하여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그렇다. 가치관이 다르다면 설사 금이 있다고 해도 다툴 일이 없다. 금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가지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블로그를 적으면서 굳이 기독교인들이 가진 복음의 괴리를 언급하기도 하는 것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의미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이 사용하는 평화통일과 한국이 사용하는 평화통일이 다른 것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고 기독교인들을 개독교인이라고 욕하는 것은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질투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워한다는 것은 가치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 일어나는 갈등이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나,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이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같은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치 사자와 하이에나가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같은 고기를 다투는 것과 같이. 이것은 그냥 질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모를 때 아이들이 그것을 돌처럼 가지고 놀았듯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모르다보니 돌처럼 버린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신이시고, 그 하나님의 존재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들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셨는데, 하나님을 존재로 섬기지 않고 늘 무엇을 해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는 분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런 이유로 예수님을 미워했다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과 같이 살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들의 삶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듯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기에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인지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오셔서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으로 살게 하는 영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에 있어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초인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신앙이 육신을 벗을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여긴다. 아담처럼.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아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는 바로 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의 가치관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람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행위와 소유를 가치로 보지 않고 존재가 있으면 행위가 비롯되고 생명의 정체성에 맞게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두셨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은 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뜻과 목적,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신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그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삶을 나타내게 되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듯 성령이 임한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다. 즉 성령이 그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 역시 성령으로 잉태됨과 같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뭔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기에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이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잉태케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세상이 예수님과 또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의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어떤 것을 죄로 여기는 가장 기본 바탕은 ‘내가 생각하는 선함’대로 되지 않음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굳이 어떤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죄를 정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에 그대로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죄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군가는 그 일에 대하여 선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아들이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정죄할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 꼴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라는 조롱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준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아들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것은 선으로 어떤 것은 악으로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 앞에서 사람들이 그 기준을 위배하면 정죄하는 것이다. 치약을 중가부터 짜면 안 된다는 기준을 가진 사람 앞에서 치약을 중간부터 짜서 사용하면 반드시 욕을 먹는다. 정죄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 정죄함의 시작은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치약을 중간부터 짜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기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기준 곧 법이 있어야 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기준과 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법이 제정되지 않는 시절의 행동은 아무리 눈살 찌푸리는 일이라도 심판을 받지 않는다. 법이 없으니 죄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죄도 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법이 세상이 있어서 그 법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 법은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다.>고 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래야 하고, 이럴 것이다.’라는 기준이 예수님을 정죄해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법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죽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 곧 아들을 삼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전하시면서 그것만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는데, 세상이 가진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도 다 지켜내야 하고(돌을 떡으로 만들고),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능력을 가져야(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고), 또 세상의 모든 영광을 가진 존재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야 하고, 기적이 있어야 증거를 삼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고, 세상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고 하니 세상이 자신들의 법으로 심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스스로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존재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행위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심판하는 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존재의 목적이나 이유를 가지지도 않은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을 가지고 그 행동을 심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것이 선악과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도 그렇다. ‘술 마시면(행동) 죄다.’, ‘성경을 봐야 한다.(행동)’, 십일조를 해야 한다,(소유와 공로)‘와 같이 교회가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교리가 다 행동(Do)으로 업적을 쌓거나 어떤 선한 기준을 통과하는 것과, 세상의 것 중에서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드려야 하는지(Have)를 이야기 한다.’ ‘이단이 만든 제품을 가지면 안 된다.’와 같은 것과, ‘하나님께 어떤 것(세상의 것)은 드리거나 가져와도 되고 또 어떤 것은 안 된다.’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세상의 심판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티를 제대로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세상의 가치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처럼 어떤 일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서 심판하는 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 죄는 기준이 있음으로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정체성을 밝히 보이셨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가 창조하지도 않은 세상에 대하여 자기의 선과악의 기준으로 마음대로 심판함이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사는 모든 사람과 세상의 가치관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 것이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4)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 되심은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밝아진 사람, 곧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인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나타내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어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됨으로 확증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사람의 행동과 소유를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심판하지 않고,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법과 기준으로 세상을 심판할 법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고, 또 그렇게 되었기에,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세상에 증거된 이 예수님의 법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러워야 한다.


비단 이 말씀이 아니라도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핍박을 받는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주 많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분명히)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비난하는 것과 또 기독교인들을 ‘개독교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핍박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그건 그냥 아전인수적인 해석일 뿐.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계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서로 사랑하니 사람들이 미워할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가 사랑하는 것을 비난하겠는가? 그것은 오히려 비난하는 이들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기고 자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왕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과는 반대의 법으로 살기 때문이다. 세상은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왕이 되는데, 예수님의 법은 섬기는 자리로 가서 왕이 되는 세계다. 세상의 법은 자기가 옳으면 그것을 주장해서 세상을 밝히는 것의 선한 것이고, 그것을 관철해서 성취하면 이룬 것이 되는데, 예수님은 세상의 하나 밖에 없는 의인이셨는데 죄인들이 예수님이 틀렸다고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하니 순순히 끌려가셔서 죽으신 법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의의 왕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반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것은 사실 이것과 다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뭐 그런 꼴이냐?’며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에 끌려 가셨는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들의 아우성’으로 간주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예수님과 전혀 반대의 법으로 살고 있고, 비난의 내용은 전혀 다름에도 비난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이라고 망상에 빠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의 경쟁방식이 아닌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겨서 피라미드의 위로 가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 이긴 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면 포로가 되고 종이 된다. 즉 지는 것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가진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이기려 한다. 세상의 방법과 같이, 자기가 가진 의의 과학적 실증, 논리적 우월성, 성공 사례의 우월성 등을 증거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해서 이기려 한다. 이것이 바로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런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법은 모르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고, ‘주여!, 주여!’ 외치는 것이지만 자기 의에 매몰되어 알지 못한다. 이것이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그 미움은 그런 싸움의 상대로서 이기니까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낮은 자가 이기는 법이다. 그런데 자기가 믿는 의가 더 옳은 것이라고(더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기려 하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할 일이겠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이기려 하고, 그런 싸움으로 인하여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아니다.


더욱이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가 주장하는 의를 자신도 지키지 못해서 결국은 역공을 받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갈수록 사회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선하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그 논리로 세상 사람들을 압박하다 보니 교회의 목사가 횡령을 하고, 여성도와 추문을 일으키고, 장로가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일들이 자기 발등을 찍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도 못하면서’, ‘꼴좋다’와 같은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비난이라 여기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비난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그랬다. ‘난관에 봉착하는 것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의 법과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안다면 그 길을 돌아서야, 아니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으로 강력하게 이긴 것이 아니라, 져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죽으셨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그것이 이긴 것임을 깨닫게 되는 진정한 이김이 되는 법을 알고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은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면 섬김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섬긴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게 되므로 자신을 섬긴 사람이 자기의 그리스도가 되는 그런 관계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의의 충돌이나 다름에 있어 이 법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 즉 더 아는 이, 더 밝은이가 그렇지 못한 이가 알 때(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서로 섬기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더 아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강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아니 정반대의 법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또 믿음에 대해서, 또한 육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세계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고 생명의 법이다. 바로 이 법을 세상 사람들이 미워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보 같으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조롱한 사람들의 조롱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 와 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불거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이미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조건을 붙이고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보여 보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율법)을 떡(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육신이 초인적인 것이 아니냐?’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선하게 또한 의롭고 옳게 여기는 이김의 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으로 이겨내니 세상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남들은 자기 육신을 본질로 알고 그 육신이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용을 쓰고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그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고 있으니 그 꼴이 참 바보 같아 조롱하고, 때로는 그 모습이 자기 양심을 찔러 비난했지만 그것이 결국 사람을 바꾸어내는 기적을 만드는 것을 보니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떤 미움에 처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일부러 그 미움에 들어간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을 살기에 당하는 것이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아야 한다. 정체성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세상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밝히 알아서 그 우월감으로 사람들을 이겨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아는 그 법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삶을 살게 하니 그런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