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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31-37) 물과 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0. 17:2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고자 병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그러자 찔린 자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다. 이 말씀은 참 귀한 말씀이다. 행여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이런 현상이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된다. 사람의 시체가 어떤 현상을 보이는지 설명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까지 오셨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참으로 여러 번 언급을 하는 것은 이 십자가는 우리 모든 인생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언급은 숨 쉬는 동안, 그리고 블로그와 모임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동안은 끊임없이 전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의 본성이고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죽여 버렸다. 이유는 세상의 가치관과 안목으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들이라 보냈는데 세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맞짱을 뜨겠다는 것이니 하나님과 동급,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그런 억울한 죽음이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완전히 운명하셨다. 육신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육신이 소임을 다한 것이다.(물론 부활이 남았다.)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음이 어떤 상태인가?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가 죽음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죽으셨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 아들이 심판을 받으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지금 많은 신앙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하여 뭐라고 하는 세상의 입들은 그 가치관이 일단 성경적인 가치관이 아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이다. 애굽의 피라미드와 같이 소유와 다산에 있어 더 가지고 더 이룬 자가 의로운 가치관을 가지고서 하는 말들이다. 그런 심판과 말들 앞에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해야겠는가? 당연히 그 비난과 심판 앞에서 죄인이 되고, 또 창으로 찔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던 예수님과 같이 끌려가고 손해 보는 상황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현상은 어떤가? 세상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교회를 또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을 비난하면 어떤가?


더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그렇다고 외면하듯 상관하지 않으면서 포용하는 척하고, 어떤 이들은 사탄의 도전이라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매면 안 된다(상관하면 안 된다.)’ 고 한다. 그러니까 창으로 찔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같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다르면 생명의 정체성도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고 찔러도 반응할 수 없는 상태로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역시 말할 것도 없이 같은 상황이다.


운명하신 예수님을 군병들이 창으로 찔렀더니 그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다. 이것을 두고 사람의 시체를 찌르면 물과 피가 나온다고 볼 것이 아니라 했다.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은 말씀과 생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이고,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죽으신 예수님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찔렀더니 말씀과 생명만 나왔다는 것이다. 뭐 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심판하면 말씀과 생명 밖에는 내어 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그 육신이 죽으니 말씀이 나왔다는 것이고, 그 말씀이 바로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이라고 말씀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도 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그것이 아니라고 의가 꺾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할 때 세상이 그것을 비난하고 더 나아가 죄인 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죽음으로 몰고 갈 때 “사탄아 물러가라!”며 외치는 것이 아니라 아무 반응 없이 죽어서 오직 말씀과 생명만 내어 놓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과 피. 말씀과 생명, 그것은 세상을 향한 능동적인 외침이 아니다. 세상이 창으로 찌르는데 죽었으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찔렸는데 말씀과 생명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세상의 가치관과 법과 안목으로 예수님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인이라며 십자가에 매달았더니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을 향한 계획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예수님이라는 육신으로 나타났는데 그 육신을 죽였더니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물과 피를 흘리셨다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다고 하고, 자신은 죽고 하나님은 산다고 말하지만 정작 세상의 가치관이 도전해 오면 반응이 나타난다.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도전하느냐?”며 덤비고 “사탄아 물러가라!”외친다.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보고서 세상의 그 누구도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누군지 알겠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겠는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 받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창으로 찔러도 반응할 수 없는 죽은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가치관이 도전해 오면 벌떡 일어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친다면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이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미지(형상)를 나타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을 심판할 때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고, 또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찌를 때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 그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니 찔렀을 때에 물과 피, 곧 말씀과 생명 외에는 나올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역시 그럴 수밖에 없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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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것은 그 의미가 있다. 피는 생명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뼈는 의를 나타낸다. 덧붙이자면 그래서 뿔도 의를 나타낸다. 뿔은 뼈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의는 내용이다.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또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만들어 내는 것 그 모든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의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의는 모든 표현된 세계의 근원이고 아버지와 같은 것이 바로 의다. 에스겔서에서 뼈가 군대가 되는 말씀도 결국 의가 있으면 살이 붙어 군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죄수는 쉽게 죽지 않았다. 십자가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말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며칠 동안 살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죄수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또 죽음을 당기기 위해서 뼈를 꺾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한 두 강도의 다리는 꺾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때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뼈를 꺾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전하시기 위하여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아들 예수가 사형수가 되어 죽어가는 순간을 사실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남기신 것은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지만 의도하심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뼈가 꺾이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육신이 상한 것이지 의가 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형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되셨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송사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문할 때에 고발하는 자들의 고발이라는 것이 고작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에 다시 짓는다고 했다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건 로마의 총독이 볼 때는 그냥 사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사기로 나라를 팔 것이 아니라면야 그 정도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실 동안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발에서는 아무 답변도 않으셨고, 오히려 괜히 예수님을 치는 자에게 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하실 정도로 떳떳했다. 그런데 단 하나,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이냐?”라고 했을 때 그 질문에 답을 하신 것이다.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유대인들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과 같은 신분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행실과 율법을 어기는 상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마저 침묵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 자기 육신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라는 그 하나님의 의는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꺾이지 않으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십자가에서 의가 꺾이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셨으니 뼈를 꺾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죽으심이 바로 의를 보존하시는 역사하심인데 그 뼈가 꺾이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죽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육신을 어떻게 쓰다가 하나님께 갈 것인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육신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는 존재다.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의인데 그것이 꺾일 리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뼈는 예수님의 의를 의미한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이시다보니 그 의에 대하여는 굽히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심문을 받고 있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지 않으신 것이다. 즉 의가 꺾이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동네 이장 아들도 못될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한 것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고, 또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삶이지만, 그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 때는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느라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때는 신념 같은 것 필요 없다. 그냥 그렇게 된다. 그 하나님의 의는 우리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죽은 자와 같이 되어도 꺾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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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6. 7. 20. 09:49 Writer : 김홍덕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좋은 키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늘 있었는데,

그래서 언젠가는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사 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일반 키보드보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지만, 

원하는 품질을 제공해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경험이 없으니...)

그러나 드디어 장만....


타이핑하는데 적어도 손가락에 힘은 들든다. 소리도 경쾌하고..(청축이라 더한듯)

일반 키보드에 비해 책상면에서 키패드까지 높이가 좀 높은 것이 생소하지만

타이핑에 도움이 될 것 같다..(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건만...)


별일 아닌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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