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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8일 모임소식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6. 10. 14:58 Writer : 김홍덕

지난 6월 7,8일 양일간에 걸쳐서 강화도에서 말씀 모임을 가졌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총 8명이 참석한 모임은 강화 석모도의 리안온천에서 가졌습니다.

리안 온천은 아직 준공도 되지 않은 상태로 한옥으로 지어진 체험관을 

무료로 대여받아서 온천과 함께 말씀 모임을 가졌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1) 요한복음 17장 -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2) 히브리서 11장 - 믿음장(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 & 증거를 받은 믿음과 약속을 받은 믿음)


첫날 저녁에는 말씀 모임 이후 참석하신 목사님과 새벽까지 말씀을 나누었는데

목사님의 솔직한 고백(놀라운 일 - 목사가 집사에 고백을)을 시작으로 늦게까지 

말씀에 대하여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임을 주관해주신 곽근태 선생님, 노화자 권사님 부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저희가 모임을 가진 리앤온천은 http://www.seokmoreahnworld.com/을 보시면

시설의 훌륭함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각 객실마다 나무로 만든 탕에 해수 온천이...)


석모도 가는 배 위에서(차도 실는 배는 처음 타봄)


모임을 가진 객실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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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영원히 그것이 아니라면 오래 살려고 한다. 뭔가 혹은 어디에 머물려고 한다는 것은 그곳이 좋다는 것이고, 좋다는 것은 자기 목적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본질로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일어나는 자리에 머물고 싶고,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려고 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영원한 삶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몸이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그 몸으로 영원히 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몸으로 사는 삶이 영원한 삶의 주체라는 것이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이 삶의 터전인 눈에 보이는 세상을 세상과 세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육신이 오래 오래 사는 것이나, 몸이 죽지 않고 영원불멸의 상태가 되는 것이나, 또 육신은 버리고 영만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등의 언급을 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영생에 여러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믿는 것도 아니다.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나 한번 본 적이 있는 것과 같이 아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자기와 상관이 있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혼인하기 전에 천사가 와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 마리아가 말하기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즉 남자와 자신이 상관이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다>라는 것은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고,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의심이 들지만 신념을 북돋우어가면서 믿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남자로 난 사람은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여자로 난 사람은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그런 상태가 바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몸이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이 바로 자기의 삶이 되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안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늘 친밀했던 사람에게도 ‘낯설다’하기도 하고 또 ‘너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하면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본성이 낯설고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닌 느낌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이 어떤 기계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 예를 들어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컴퓨터의 정체성과 목적 및 기능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냥 컴퓨터를 보고서 ‘이것이 컴퓨터’라고 하는 것이나, 컴퓨터는 대단한 연산 능력이 있어서 우주선의 궤도도 계산하고 사람과 바둑을 두어도 이기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컴퓨터를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는 하나님의 정체성, 곧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존재의 하나님께 소유와 행위와 같이 육신의 어떠함에 대하여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너는 어떤 존재냐?’라고 물으실 때에,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삶의 목적과 의미와 내용으로 삼고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입니다.’라고 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거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본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이라는 형식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당연히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영원하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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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6. 6. 10:07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17장은 잘 알려진 대로 예수님의 기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올린 기도문이다. 그 내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기도문의 주제를 정리하자면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두 개체가 동일한 개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 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하나의 존재로 합쳐지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 정체성 그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육신이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씀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와 사람의 육신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늘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셨다. 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오늘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는 깊이 생각지 않고 그냥 믿는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했으니 아들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계획과 의와 뜻)이 예수님의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안에 있는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가 가진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어 하나가 된 존재가 아들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인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이 하나님의 법 위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이다. 이 법이 아니면 예수님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법이 없다. 아들이라 하니 결혼을 통한 아들만 생각하고, 하나가 된다고 하니 동일한 개체가 되거나 둘이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가 되겠는가? 그럴 법이 없는 것이다.


이 법은 선택의 문제와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여러 관점 중에서 보물을 찾듯이 이 관점을 찾아서 성경을 봐야한다는 식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정한 유일무이한 법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법을 절대로 감추시거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도록 하신 적이 없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안목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 법이 보이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이런 저런 세상의 철학적 논리로 부정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명료하게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목적하신 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다. 이미지라는 것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모양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람 안에 있어서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용과 같이 있어서 그것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므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법인 것이다.


이 법은 성경의 가장 기본 골격이다. 성경이 사람을 위한 책이기에 이것은 유일한 뼈대다. 이 하나님의 법을 사람에게 전하시기 위하여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우리의 몸은 성전이라는 말씀도 있고, 우리 몸을 거룩한 산(살아 있는)제사로 드리라는 말씀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이 형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내용으로 자리하기 위한 빈 그릇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를 그릇이라고 표현하신 것이 다른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늘 자기 안에 어떤 것을 채워 만족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갈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빈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너희 안에 거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채워야 할 자리에 들어갈 유일한 내용이고 그 내용이 채워지는 것은 생명의 본성과 같은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형식이자 빈 그릇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채워지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그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존재하시게 되는 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죄가 가진 본질적 의미가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것도 바로 그래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뜻과 의가 사람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있어 본질은 하나님이 자기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삶의 내용이 된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삶이 내용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된다는 의미다. 즉 모든 것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세상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육신과 만물이 아니라, 육신을 살게 하는 이유, 육신이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그 의와 뜻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 본질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지은 집도 모양과 형상이 본질이 아니라, 집을 지으려는 주인이 가진 집에 대한 생각이 본질이고, 사람이라는 육신의 생명도 육신이 본질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생각과 정신이 그 사람의 본질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육신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인줄로 알고서 육신의 건강과 세상에서의 육신의 모습인 외모와 혈통과 재물과 신분을 모든 것으로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 가서 왜 그런 문제를 기도하겠는가?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자에게 가서 구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 가장 절대적인 문제인 것은 당연한 것이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대표되는 육신이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 즉 자기 존재 정체성의 본질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다. 어떤 것이든지 목적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다. 못을 박기 위하여 만들어진 망치는 공사장에서 못질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이름은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대표하는 정체성이기에 사람이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안에 있어 기도하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있으면 모든 것이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지켜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작은 것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면 이것은 전혀 만용이나 교만이나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 안에 거하여 그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으로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표현된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고, 또 그들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듯이 그 제자들의 말씀을 듣고서 육신으로 사는 자신의 인생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사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자 이유며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 역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기도를 성경퀴즈 대회 때, ‘성경의 전 장이 기도문인 장은?’이라고 물으면 대답하는 것으로 알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문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즉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법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회복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때 이 기도문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아마 그것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 소름 돋는 놀라운 은혜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같아 질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은 어리석은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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