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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모임을 시작합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6. 15. 09:17 Writer : 김홍덕

저의 블로그에 관심을 보이시고, 

신앙의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하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나서, 

여건이 되는대로 모임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무래도 정기적인 모임이 있으면 

시간이 되시는 분들이 자유롭게 찾아오시지 않을까 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개설할 예정입니다.

(대구와 대전에 개설)



장소는 

제가 거주하고 있는 대구와

전국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대전으로 할 생각이며


모임 시간은 

(대전) 매월 2,4째 토요일 오후 1시

(대구)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에 시작합니다.


(상세사항 아래 참조)



다만 이제 시작 단계이므로 다음 사항을 참조해 주십시오

  1. 가급적 참석 여부를 먼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처 : 010-3396-5555 / the.elphis@gmail.com

  2. 모임을 위한 독립된 공간이 아직 없기 때문에
    시작은 대전역 인근 카페/대구의 카페에서 만남을 가지는 것으로
    시작할 계획입니다.

  3. 이제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가끔 모임 내역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오시기 전에 저의 블로그를 꼭 참조해 주시거나
    위 연락처로 문의(확인)하시고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블로그에 공지가 없으면 이 공지대로 진행합니다.)



정기 모임 안내



<대전모임>


2016년 7월부터 


일시 : 매월 2,4째 토요일 오후 1시~4시

- 첫모임은 7월 9일 토요일


장소 : 대전역 앞 <카페노리>

- 장소의 홈페이지 : www.cafenori.com

- 장소는 저도 아직 가보지 못했고, 인터넷으로 조사한 곳입니다.

- 인원이 많아지면 대전역사의 회의실 대여 등을 고려 중입니다.



<대구모임>


2016년 6월 17일부터


일시 :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13시


장소 : 대구(경산) 모캄보 정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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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고, 그 일은 하나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그 형상을 나타냄) 하는 것이라고 하셨으며, 그 영광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고 하셨다.


영광이라는 말이 ‘나타낸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지금도 어떤 시상식에서 그 영광스러움을 대변하는 수상 소감은 언제나 그 상을 받기까지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관례다. 그 좋은 일을 나타나게 한 이들을 나타내고 자랑한다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존재의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의 하나님으로 인식하여 나타내어도 어쨌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을 영광이라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래 육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하였다면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이며, 그것이 또한 하나님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바로 알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그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그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이유와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사람에게 알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예수님도 하신다고 하신 것이다.(요 5:17)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목적을 회복하게 하시려고 늘 일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이 마쳐지는 자리에 이르면 안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알기를 바라시며 그 뜻을 전하시는 일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정하신 의와 뜻 안에 거하게 되면 일하시는 목적이 이루어지므로 안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지창조에 나오는 사람을 지으신다는 본질적인 의미이다.


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가지신 영광이다. 즉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기 전에 먼저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또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나타내실 뜻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 뜻이 있었으니 사람과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전화 통화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전화기를 사지 않음이 그것이다.


그 영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일이자 하나님의 일이며, 예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시려 한 뜻을 나타내셨으니 하나님의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이요, 그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게 하시므로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나타나는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가졌고,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통하여 나타났으니 그 또한 아들의 영광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서 영광을 얻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영광이 나타난 것이라면 어딘가에 나타나는 장소가 있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물리적,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리, 존재적인 자리를 말한다.) 그곳은 다름이 아닌 세상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을 신앙에서 분리하려고 하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곳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초인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면 세상과 삶을 분리하여 하고 또 육신을 부정하게 여겨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두운 신앙인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유리가 가진 이 육신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가지신 하나님의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아들이 나타났으니 아버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영광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광도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과 세상을 만드신 뜻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면 세상이 그를 볼 때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과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 같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난 인생은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을 그 존재의 목적대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풍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선풍기를 내 맘대로 컴퓨터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기에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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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1-2)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화)스럽게 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받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그 목적이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럴까? 영생이라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얼마 정도의 사람이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람에게 유익이라 생각하는데,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곧 하나님의 유익에 관한 일이라는 말씀이 아닌가?


신앙의 여러 가지 문제는 사실 아주 간단한 것이 외곡 되면서 시작된다.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묻는 여러 가지 질문들, ‘술을 마셔도 되는가?’와 같은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성선설, 성악설이나 ‘성경의 하루는 어떤 시간인가?’나 ‘구원 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천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느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문들은 단 하나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 발생하는 의문들이다. 모든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형상도 없으신 영이신 절대자 신이시고, 사람은 그 하나님께서 실존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형상이 있는 존재다.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나타나심과 표현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사람이고 세상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유일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수천 번을 읽어도 알 수 없는 책이다. 반면에 이 하나를 안다면 성경을 읽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의가 자기 안에 있기에 성경을 때로 읽을 때 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읽히고 들리니 언제나 꿀 송이처럼 달고 오묘하고 신비하며 즐거운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영광이란? 독사(δόξα)라는 말이다. 이는 ‘나타나다’, ‘간주되다’ ‘~처럼 보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케오’(δοκέω)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즉 영광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나서 그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여겨지는 것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존재가 하나님과 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것을 보는 이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를 알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딘가 익숙한 말씀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신 말씀이 기록된 창세기의 말씀과 흡사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신 말씀 그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모든 새와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여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도록 하자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뜻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의요 영이시기에 모양이 없지만 그 의와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통해서 표현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도 사실 이와 같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사람 안에 있는 생각과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사람을 찾아가고, 위하는 마음이 있어 수고하여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나 위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상대가 그 사람 안에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즉 그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형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단 하나 이것이다. 이것이 온전하지 못해서 모든 죄와 곤고함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인데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살기에 모든 것이 캄캄하고 어떻게 또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 하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그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순종하느냐는 문제 그 하나만 해결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즉 세상과 만물과 만민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영생은 너무나 쉬운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하심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된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므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역시 같은 의미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면 하나님과 동일한 개체가 되는 것이나, 동일한 능력을 행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콜라가 콜라병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기에 그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의가 사람의 육신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표현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이 계시는 삶과 상태와 존재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듯,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거듭남이며, 영생이다.


이것을 보이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왕이 되고, 신비한 능력으로 육신이 가진 가난과 병드는 것과 정치적인 문제와 또 결혼이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형수가 되어 죄인으로서 죄인의 틀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부르짖는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과 자신의 교회가 세상에서 돋보이는 자리에 이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것을 위하여 고민하고 고민하다 세상적인 방법과 학문을 도입하여 도모한다. 정작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예수님을 죄인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에서 더 좋은 재력과 권력과 신분에 이르러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온 땅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을 이루라고 하신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수고하는 사람은 구원도 영생도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께 예수님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을 주실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 세상을 성경으로 다스리겠다고 생각하는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분이다. 죄인이 되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분이신데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생도 구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멸망의 자신들인 것이다.(요 17:12)


그러므로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과 영생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비밀이 자기 안에 없다면 단언컨대 영생도 구원도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도 열리지 않은 창세기 이전의 혼돈 중에 있는 인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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