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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곧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옷도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해 입혔는데 그러다보니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볼 때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언사가 불평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37:1-4)


그런데,

요셉도 성경을 보면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기에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다른 가족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자신의 꿈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형들의 시기가 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요셉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런 상황, 아버지가 더 사랑해서 채색 옷을 입히며 다른 형제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표현되었기에 형제들이 이미 마음이 불편한데 불에 기름 붓는 격으로 그 형제들에게 형제들이 미워하는 요셉을 섬기게 될 것이라며 꿈 자랑을 하고 있는 이 요셉의 모습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이 시간에 한 번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 나오는 요셉과 예수님을 비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이 땅에 보내시었는데(창조하셨는데) 예수님의 처음은 보통의 사람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채색 옷을 입었지만 요셉은 그냥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듯,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지신 것이 아닙니다.


잠깐 이 부분을 언급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듯 우리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과 같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 초자연적인 기적 자체가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예로 든다면,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능력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었다고 하는 인생을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신데, 그 능력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이기에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육신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그때 살아난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든지, 아니면 지금도 정기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해보면,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하여 당시 유대의 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계셨고, 그것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첨언한다면, 성경에서 옷은 보통 신분을 말합니다. 채색 옷은 예수님께서 얻으신 신분, 백성들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 여김을 받은 그 여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아주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인 이스라엘이 채색 옷을 입혔기에 형제들이 미워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말씀을 행하시므로 사람들에게 선지자로, 또 메시아로 인정받는 상황이 되었는데 같은 민족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아주 싫어했다는 것이 요셉과 예수님이 공통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12형제들 중에 11번째 아들입니다. 다른 형들이 볼 때 요셉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형들은 이미 장성했기에 가사(목축)에 도움이 되고 있었지만 요셉은 그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형들의 안부나 확인하는 정도 밖에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나 공로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어린 동생일 뿐이었는데, 그렇게 한 것도 없으면서 집을 위해, 또 아버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형들이 그 어린 동생에게 절하게 된다고 하니 참 가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잘 안위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율법을 잘 지키고, 또한 백성들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온 나라가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까 힘쓰고, 금식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하나 나와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목숨을 다해 지키고 있는 율법은 막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하니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셉의 일과 또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의로워지려고(인정받고 복 받으려고)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취하고 있는 삶의 모양이 결국 그들이 가진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무엇이 가치가 있느냐의 관점이므로 그것은 결국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으로 자기 삶의 채근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혈연이나 사회 조직에서 그렇게 주장을 하고 요구하며 심지어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관, 이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께 무엇을 하여야,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가치관의 뿌리가 행동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그 공로를 자신들과 비교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교회에서 또 기독교 신앙의 세계 안에서 늘 그것이 기준이 됩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

성경을 얼마나 보느냐?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

교회 행사에 얼마나 참석하느냐?

교회에 봉사는 얼마나 하느냐? 등등


이런 것들을 늘 판단합니다. 딴 것 볼 것 없습니다. 위의 내용들은 주보에 다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했는지 알리고, 또 남이 얼마나 했는지를 보라고, 또 그것이 누적되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관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보았듯이, 지금도 신앙이라 교회가 요구하는 것 또 성경에 기록된 것을 얼마나 몸으로 행위로 또 소유로 지켜내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관점, 그 가치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가치관과 생각은 모든 행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공로와 소유의 드림)=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고, 교회 시스템이 그렇게 운영되고, 주보에 공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가치관이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또 누가 아프거나 하면 옆에서 가장 먼저 권면하는 말이 “하나님께 뭐 잘못 한 것(Do or Have) 없냐?”고 물어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혹시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봤다면, 어디 좋지 않은 곳을 가는 곳을 봤다거나, 그런 공로의 신앙에서 볼 때 해서 안 되는 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면 스스럼없이 ‘그것 때문에 그렇다.’고 단정하고 소문을 냅니다. 이것은 소문을 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심지어 나름 영발이 있다는 사람들의 행태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하고선 예를 들면 ‘십일조 잘 하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 하나님께 해야 할 <행동>을 잘 하고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면 떳떳할 사람이 없습니다. 행위로 의로워질 사람이 없다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욥의 세 친구와 같이 사람이 곤고하게 된 이유가 ‘너의 행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나 신앙이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는 형들의 관점,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과 제사장의 관점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순종하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는 가장 근본된 것은 사람 자체로는 온전치 않다는 것입니다. ‘막내급 요셉이 하는 것도 없이 형들과 아버지의 절을 받는다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것도 모자라서 율법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육신으로 사는 인생의 일이 잘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람이 행동으로 얼마나 성경을 지키고 교회에 공로를 쌓고 재물을 드리느냐에 종속된 것이라는 신앙은 전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 그 자체는 온전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요셉의 일과 또 예수님의 일을 볼 때 생각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이라는 것, 또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행위로 의로워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로서 의로워진 사람, 그냥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또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 그 자체로서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 그 하나가 삶과 신앙에 있어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요셉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것을 계속 이야기 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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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을 마치면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8. 4. 09:27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을 이제 마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이라고 저자인 사도 요한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요한복음을 읽고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한 부분 부분을 두고 그것이 어떤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요한복음을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대하여 쓴 글 중에 수 없이 많이 언급한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요셉의 아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게 평범했던 예수, 목수의 아들이고 흠모할 것이 없으며, 건축자가 볼 때 버린 돌이며, 멸시 받고 천대를 받는 예수,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동일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너무 평범해서 그 행실이나 신분이나 가진 것으로 볼 때 어느 것 하나 경쟁력이 세상의 최고인 것 없는 그런 인생들, 그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보이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면 요한복음 아니라 어떤 성경도 읽고서 그렇게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을 믿지 않는데 괜시리 인생을 허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은 너무 위대해졌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소위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이 세상의 경쟁력이 뛰어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 받고, 천대 받고,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는데, 지금은 세상의 경쟁방식에서 이긴 자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고 가르치고 그렇게 기도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과 가르침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의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사도와 동일한 목적으로 이 요한복음에 대하여 포스팅 해 왔습니다. 이는 지금도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반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바로 알고자 하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르침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은 상태로 접하실 수 있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시간, 달력의 시간으로 지금이 AD(주후)의 시간이고 그 시간대를 살고 있으니 마냥 지금이 신약의 시대 곧 복음의 시대이고, 4복음서와 신약의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그 기록한 목적이 이 세대에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AD 3,000를 살고 있어도 자기 안에 예수님이 오신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구약시대의 사람이고 천지가 창조되기 전의 사람입니다. 천지가 달리 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려야 천지가 창조된 것이고,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신약의 시대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대로 복음을 이야기해야할 이유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이나 또 신약의 성경이 오늘 자신의 육신이 AD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자신에게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그만한 낭패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인생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데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보다 더한 낭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시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인생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은 그것을 보는 모든 인생 역시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순종하고 믿게 하려 하심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추하고 연약하고 심지어 그 마음에서 늘 악한 것만 나오는 이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아들로 부르심을 받기 위한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과 같이 자신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모르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생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과 같은 생명을 가졌기에 그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오늘 이 땅에서 해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즉 인생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이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돌아보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문장력이기에 마음에 있는 것을 글로 잘 표현하지 못해서 스스로 약 올라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비단 요한복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포스팅시 느끼는 것입니다. 살펴보면 오탈자는 물론이고, 문맥을 흩트리는 조사나 접속사도 많습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고치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의 시대적 설명이나 단어 또 사건의 전말에 대한 해석이 부족하거나 심지어 틀렸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기준은 신학이라는 점에서 저는 자유합니다. 신학이라는 것 그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고백이지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한 의로움을 가지게 된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이지, 성경을 객관적으로 또 알고리즘 상 서로 상충되지 않게 해석하는 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청이가 빠진 바다가 인당수든 동해나 서해 바다든 심지어 그것이 갈릴리 바다라고 해서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청전을 기록한 이의 의와 뜻이 잘 전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효자가 되는 것, 그것이 고백이지 학문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객관적으로 또한 일반화된 이론에 기대어 풀어가는 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기에 때로 성경에 대하여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접근이 틀렸다고 해서 제가 쓴 글에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국어적으로 잘 풀어내지 못한 것은 제가 그 만큼 잘 알지 못하거나 또 잘 준비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라는 점은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 자리를 빌어 양해를 구합니다.


저에게 요한복음은 아주 깊은 감명을 준 말씀입니다. 특히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이 한 마디로 그날까지 알고 있었던 신앙의 체계가 다니엘의 환상 속의 동상을 산산조각 낸 돌맹이 하나와 같이 다가와서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기에 그것을 전하시려고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셨고 나 같은 인생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살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나누고자 했는데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이어서, 쓰다 쉬고 또 그러고 있는 창세기를 비롯해서 로마서 그리고 십계명 등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욥기와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들도 포스팅 할 계획입니다. 그 중에서 로마서와 십계명은 제가 육성으로 녹음을 해서 보내드리고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메일을 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만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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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세 번의 질문과 대답 후에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신 내용이다.


이 말씀은 아쉽게도 원어적인 이해가 필요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셨는데 그 중에서 먼저 하신 두 번의 질문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Agape’이고, 마지막 세 번째에는 ‘Philia’라는 단어라고 한다. 반면에 베드로의 대답 속에 있는 사랑은 모두 ‘Philia’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두 번 먼저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 두 번의 질문에 자신은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을 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시고자 마지막에는 “네가 나를 필리아, 곧 친구처럼 사랑했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을 한 것이다.


이 대화는 아주 묘하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라 여길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물으신 아가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느냐는 물음에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너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 안에서 나를 보고 사랑했느냐?”라고 물으시니 베드로는 “그것이 아니라 세상의 안목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라고 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그 관계와 의미로서 예수님을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모습을 보면 ‘저 예수님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계집종이 물을 때에 그렇게 답을 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어부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그런 안목과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자기 죄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어떤 안목으로 봤는지를 고백하고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 예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잔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베드로가 알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이것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마지막 교정? 아니면 화룡점정, 그것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나다나엘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믿었고,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그런 생각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변화 없는 그들의 마음이 이끈 대로 자기 육신이 먹고 사는 일로 돌아가 버린 그들에게 찾아 오셔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한 마디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의 버전으로 하면, “너희 몸은 산제사로 드려라”가 될 것이다. “너의 삶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것이다. 인생에게 가장 바른 것,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그 뜻 안으로 너의 삶을 던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가페의 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는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사랑이니 그 사랑 안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 관계가 바로 바다 같은 세상에 떠 있는 배와 같은 인생에게 가장 바른 것(오른편)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 앞에 제자들은 “주님이시다”고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주 앉아서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다. “네가 나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관계있는 존재로 여겼느냐?”고, 그랬더니 베드로는(사실 모든 제자들은) “주님 그것이 아니라 저는 예수님을 인생의 안목으로 봤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인생의 안목과 하나님의 안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이제 베드로는 이전에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왜 저러고 계시는가?” 의문에 빠졌던 베드로가 아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 존재인지,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지(어떤 사랑과 안목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바라던 것, 제자들이 하나님의 안목을 알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를 바라신 예수님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상호 간에 온전해 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뜻 하신대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대신하는 그리스도가 되었고,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로 갈 수 있고 제자들이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부활 바로 이후에는 이런 관계가 아니어서 만지지 말라고 하심)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면서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어야 실체로 보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존재로서 또 사실과 진리로 여겼던 안목을 가졌기에 그런 물질세계가 풍성해지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던 안목을 가졌기에 예수님조차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필리아(친구간의 사랑)로 보던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이 어떤 차이인지를 알게 되는 것, 여기서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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