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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하신다. 그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은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셨다. 즉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상에 있는데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구약의 율법에서 사람이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 중에 물고기에 대한 규례가 있다. 이 규례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오징어를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바다(큰 물 – 세상)에 있는 고기에게 비늘은 바다와 자신의 몸 사이에 경계가 있고 구분이 된다는 것이고, 지느러미는 삶에 방향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이 된 존재(거룩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개인 신상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록하는 것이 세상과 구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이건 쉽게 동의하겠지만,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앙은 구분되지 않은 것이라면 아마 양심이 있다면 힘든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모든 삶이 세상의 일반적인 삶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나 그 삶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도 육신을 가진 사람이 가진 모든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욕심도 있고, 분냄도 있고, 성욕도 있고, 짜증도 내고, 공부도 하고, 밥벌이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거룩함과 구분됨에 대하여 식욕도 절제하고, 성욕도 절제하고, 화도 참는 절제와 금욕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세상과 분리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 해야 구분에 이르는지 정확한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어떤 수준으로 유지하여야 합격이라는 것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Be or Not이라는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으로 보면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줄인다고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쨌든 1%는 있는 것이나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금욕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그 논리 안에서도 망한 자가 되는 것이다.(이것이 율법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거룩함이란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추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절제하고 억누르는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삶은 세상과 구분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도 모르면서 자기 맘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겨 금욕하고, 또 사람과 세상에 대하여 자기 맘대로 정의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모습일 뿐인 것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모든 삶의 모습과 육신의 본성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일하지만 그 육신에 대한 안목, 그 육신을 보는 관점, 그 육신이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지 모르면 세상에서 거룩한 삶에 대하여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모르는 것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대상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졌기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살지만 육신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이 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누구나 드러내지 않았지 다 가진 본성이고, 또 누구하나 예외 없이 자기가 그것을 선택해서 가진 자가 없다. 만약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지금 사는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 육신의 기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 배설이나 배고픔이나 고통과 같은 것을 선택하겠는가? 그런 것은 모두 자기 의사와 무관하지만 사람이 가진 본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의 모습과 본성을 사람이 부정하게 여겨서 금욕적인 삶을 살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고상하게 구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부정하게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그 하나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위로서의 범죄가 파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부정하게 보는 중에서 비늘 가진 물고기와 같이 구분이 되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다면 이는 어떤 일을 위하여 아주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 온전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유일한 의와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이 사람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형식이라는 것을 믿고 알며,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겠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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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아버지가 주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다고 하셨다. 하지만 정작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보전되기는커녕 예수님을 믿는 이유로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제자들을 지켰다고 하시는 것일까? 또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는데도 기쁨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기쁨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이 충만히 가지게 하려고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 이 기도를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말씀은 철저하게 무엇이 본질인지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을 보전하고 지키겠다는 말씀도 아니고, 기쁨 역시 육신의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기쁨을 생각해보면 사람에게 있어 육신이 고통 중에 있는 기쁨이란 없다고 볼 수 있다. 때로 마사지와 같은 것을 받을 때에 압통 이후의 시원함을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그런 것을 가지고 육신이 고통 가운데 있는 기쁨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새벽마다 나가서 축구를 한다. 그렇다고 축구라는 것이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같이 편하고 기쁜 것이 아니다. 육신은 죽어라고 뛰어 다니지만 그것이 좋고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축구가 좋은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이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것에 자기 육신이 수고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 육신은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데 쓰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에 대한 욕망에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놀라움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육신의 능력을 뛰어 넘어서, 걷어서 가지 않아도 일이 되고, 수고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생기는 것을 신앙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주신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즉 구원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육신이 편할수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근무시간이 짧지만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가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와 달라고 신앙하는 것이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런 것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을 축복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로 여기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말씀과 이 성경은 육신의 세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현상계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로 나타난 것은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의 모든 물리적 세계로 나타나게 된 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한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으로 회복한 사람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이 자기에게 의미가 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영의 영광을 표현할 형식인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고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육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할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육신의 삶을 보전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육신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에 자신들의 육신을 소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심으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이 나타난 것과 같이.


제자들 중에는 야고보와 같이 교회시대 초장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사도 요한과 같이 육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육신이 살아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사람도 있고, 또 바울과 같이 살 동안 그 육신의 모든 수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모한 사람도 있고, 또한 제자들과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자기 육신의 삶을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에 소모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육신은 심한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우리는 만드신) 뜻에 그 육신을 사용하고 드리는 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본 받아서 많은 사도들도 그 육신의 삶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소모하고 드린 것이다. 그렇게 삶을 영이신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표현하면서 살다보니 어떤 이는 죽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육신의 모든 수고를 복음을 위하여 소모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했고, 또 루디아와 같이 자기의 집과 사업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도 했고,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또 자신은 할례를 중시하는 할례당이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유스도라는 사람과 같은 이도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그 삶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표현하는 것에 소모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성공을 바탕으로 다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공하는 사람을 돕고 후원하는 일에 매진한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와 공로를 성공과 선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을 성공과 선함으로 삼고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바알과 아세라가 할 것이다. 그것은 그냥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고 모욕하는 것일 뿐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된 사람, 그리고 육신의 삶을 소모하고 수고하는 어떻게 보면 힘든 삶이 기쁨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자기 운명인 사람들이다.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연어가 죽음을 무릎 쓰고 출생지까지 가서 알을 낳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을 때 뜻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같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되고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운명이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니 모든 것은 생명의 법과 같은 것이다. 노력한다고 생명이 되는 것은 없다. 생명은 생명의 본성으로 낳아지는 것이다. 날 때부터 생명이지 노력을 더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노력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물을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에게 물을 일이다.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공로, 풍요와 다산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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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에 대한 단상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6. 19. 10:15 Writer : 김홍덕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유명한 말씀입니다. 신앙이란 자고로 순종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하지만 물에 던져진 생쥐에게 있어 순종은 어떤 것일까요? 물에 던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아니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문제가 많고, 또 말씀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뿐 아니라 한탄을 하면서도 그 교회가 시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순종일까요? 그러니까 물에 던져진 생쥐는 물에 던져진 자신의 상황과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약한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듯 순종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아니면 생명으로서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살려고 발버둥치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바른 길을 가지 않고 있다고 느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할 노력을 것이 아니라면 떠나는 것이 순종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순종을 <시키는 것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외부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잘 따르는 것을 순종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에 던져진 생쥐가 외부에서 자신에게 강요한 상황에 순종해야 순종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언뜻 생각해도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순종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순종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 나오는 뭔가가 있도록 어떤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땅이 농부가 뿌린 씨앗을 받아 들이면 그 씨가 땅 속에서 자라 흙이 생명이 되는 생명의 본성,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본성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기에 먼저 듣는 것이 있고, 그리고서 그 들은 것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종이라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된 그 생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할 가장 기본적이고 유일하며 가장 큰 순종은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순종하면 그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 안에서 발현되는 것에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밖에서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일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고, 또 편차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하고 싶거나 하기 쉽고, 어떤 것은 반대로 하기 싫은 것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순간-힘이 있고 상황이 될 때-에는 어렵지 않지만 병 들고 힘이 없을 때나 또 정신력이 약해서 의지를 북돋우기 힘들때는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사람 밖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때로 순종이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자기 밖에 있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르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는 그것을 할 마음이 부족한데 몸으로만 억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릇(흉내)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몸으로 해 내었다고 해도 순종이 아니라, 외식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 안에 있는 본성에 대한 순종은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로 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변 볼 때는 서서 누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 본성이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생명은 위기에 처했을 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에 던져진 생쥐는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말씀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없는데 교회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니는 것은 어떤가요? 그것 역시 순종이 아니라 그냥 외식일 뿐입니다. 자기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나,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을 빌어 육신의 일의 평안을 구하는 목적을 위하여 외식하는 것일 뿐, 순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불순종의 자식입니다.


물에 빠진 생쥐가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종일찐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교회에 다니게 된 상황을 받아 들이는 것이 순종이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의 아들입니다. 순종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 그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에 거역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의 모든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 그 DNA를 거역할 수 있는 생명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순종하라고 하셨다면 언제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위하여 노력한다? 웃기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오직 <Be or Not>입니다. 노력해서 어느 정도는 하고 안 되는 것은 구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순종하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그 뿐입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순종한다? 그건 다 불순종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반인반수가 아닙니다. 일정 부분-그것이 많거나 적거나 무관하게-은 되는데 어떤 것, 어떤 상황에는 안 된다? 그런 순종이나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살거나 아니거나 그 뿐입니다.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럼 순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이 없는데 다니고 있습니까?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방종입니다. 진정한 순종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 나라의 의가 내 생명이 될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어기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생명으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 하나님을 어기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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