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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여러 번의 선교 여행을 다녔고 그 끝으로 언젠가 로마에도 꼭 가려고 했습니다.(행 19:21) 로마는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계의 수도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라는 것을 전한 바울 사도로서는 로마에 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소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누구에게 복음인지를 전하는 것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누구’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입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했습니다. 이를 두고 <선민사상>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가 만난 예수님과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복음(福音)’이 무엇이냐? 부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한 마디로 좋은 말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좋은 말인가? 그것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이 복으로 여길만한 아니 여기는 소리, 소식이 복인 것입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에게 기대치 못한 목돈이 생긴 것과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생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생에게 복음인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복으로 여길까요? 많은 사람들이 재물이 생기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 복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것을 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또 운동선수들은 이기는 것, 금메달을 얻는 것을 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것들이 복이 된다는 것은 맞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복이냐는 것입니다. ‘건강이 모든 사람에게 복이지 않느냐?’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생길까요? 자살하는 사람에게 건강이 복이겠습니까? 누군가 금메달을 땄다면 또 누군가가 경기에 이겼다면 누군가는 은메달을 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패자들 역시 금메달과 이기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경기에 임했고 진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에게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전하시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복된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 인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소식이 간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생일대의 핵심적인 소망이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 모든 인생에게 간절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을 믿고 또 성경을 읽고 알고자 하는 이유는 인생이 가진 문제들 그 중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나는 누구며, 왜 사는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인생이 뭔지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자기 맘대로 되는 사람이 신을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인생이 힘들다고 이야기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에게 의탁하는 모든 것은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왜 사는지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자신에게 복음이 되지 않기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어두움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매 세상이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모든 인생에게 복음으로) 오셨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이 아니라 다른 것이 자기들의 복음이라고 여기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 스스로가 어떤 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우상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냐 하면, 사람들은 돈을 복으로 여기고, 또 명예를, 또 어떤 이는 금메달을 따는 것이 복음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런 것들을 얻으면 자기 삶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돈과 명예와 같은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왜 모든 인생에게 복음일까요? 이것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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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다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8. 10. 12:26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들 셋을 얻고 장자에게 아내를 얻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들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므로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 동생 오난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계대결혼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둘째 오난은 형수에게서 얻는 후사가 자신의 후사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형수의 몸 밖에 사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또한 악함으로 보셔서 오난까지 죽이셨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있었음에도 전통에 따라 다말을 셀라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셋째 아들도 죽게 될까 염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셋째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을 때에 창녀로 위장을 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게 그 화대에 대한 증표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말이 잉태하게 되자 유다는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심문할 때에 다말이 자신을 잉태케 한 자의 증표로 유다의 물품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때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쌍둥이)이고, 베레스는 예수님의 혈통에 속하게 됩니다.(마 1장)


이 사건은 우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아들을 얻는 것이라는 점에서 부도적적으로 보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면 아마 롯의 두 딸이 자기의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각각 아들을 낳은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이 낳은 아들들은 이방 족속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다말이 낳은 아들 베레스는 예수님의 혈통에 속하게 되며,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다섯 명의 여자 중에 다말이 속하게 되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여자가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의 후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의 뜻을 시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이 여자와 같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듭난 생명을 얻어야하는 운명을 가진 모든 사람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말과 롯의 두 딸이 차이가 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거듭난 생명을 얻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그 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는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로 인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인 다말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백성인 남자의 아들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반면에 롯의 두 딸은 자신들의 의가 아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롯의 큰 딸이 동생을 꼬일 때에 하는 말이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창 19:31-32)라고 말을 합니다. 롯의 두 딸의 일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세상의 도리를 좇은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이고, 다말의 일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후사를 얻고자 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이 가하냐?’는 것일지 모릅니다. ‘딸과 아버지보다야 낫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보고 ‘나보다 옳다.’고 했습니다. 다말이 잘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입니다.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는데 예수님께 낫게 해 달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따라가니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 15:26)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라고 답하고 간구하였더니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며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나,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 것이나 우선 보기에 그 부정함의 차이가 있어 보이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에 있어 행실이나 행위가 그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과 의로움을 따질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거듭나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되는가?’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되냐?’ 라든가,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막 해도 되냐?’와 같은 것들입니다. 먼저 말씀을 드릴 것은 온전한 믿음은 아무 짓이나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뭐든지 맘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과 항변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하면 안 되니 하는 것>과 <할 수 밖에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사람이 그 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DNA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해야 뭔가가 된다니 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때로 못 지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이 그렇습니다. 거듭난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적질하고 간음할 방법이 없습니다. 개가 ‘야옹’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성경대로 살아야 자신이 목적하는 것, 천국에 가는 것이나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자기 의지로 해야 하지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 둘 중에서 누가 더 도덕적이고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물론 유다와 다말의 일은 범상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말이 바란 것은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가 되었기에 그 후사를 이으려 했을 뿐입니다. 롯의 두 딸과 같이 세상의 도리를 좇은 배필을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정해진 혈통 안에서 후사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세상의 가치관을 채웁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그래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부자가 되고 더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이라 여기는 세상의 도리를 좋은 배필을 구하고 삽니다. 롯의 두 딸의 모습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낳은 모든 후사는 다 이방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롯의 두 딸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자신들의 아버지의 후사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후사를 잊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세상의 도리였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에 와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의 가치인 재물과 명예(세상의 도리)를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와 그 신앙이 이방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말은 달랐습니다. 그가 좇은 것은 세상의 도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집안의 여자로서 유다의 후손을 낳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기에 자신이 창녀의 차림이 되고 또 그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본분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도 어떻게든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아들과 같이 다시 후사를 얻을 수 있는,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세상의 가치관을 다 버리고 그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존재인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요셉의 사건이 전개되는 중간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과 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상관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일은 어떤 일인가?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되는 과정의 시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 참 생명을 가진 교회 공동체는 어떤 사람들로 시작되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말과 같은 사람,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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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보는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8. 8. 10:43 Writer : 김홍덕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 즉 거듭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 곧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생명 공동체라는 것은 인위적인 규칙이 다스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본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공동체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흐름이 천지창조와 아담, 노아의 홍수 등을 거쳐서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의 여정이 시작된 이후에 그의 아들 이삭이 낳은 쌍둥이의 동생 야곱이 다시 그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서 정착하고 사는데 뜻하지 않게 야곱 곧 이스라엘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되고, 정작 그 아버지인 이스라엘은 아들이 죽은 것으로 아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잠시 난데없이 유다와 다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요셉의 일은 결국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이 애굽에 들어와서 사는 계기가 되고, 그 이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종살이 시키게 되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라를 이룬 나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혈통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준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유대인이 아닌 민족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저의 말과 같이 할례나 혈통이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작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양은 다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의 혈통이나 관습에 있지 않다고,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작 신앙의 모양은 성경을 형식으로 지켜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셉의 일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인하여 이 땅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지와,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어떤 의가 삶을 다스리는 사람인지를 요셉을 통해서 또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요셉과 예수님의 일이 오버랩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성경의 주제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관한 말씀이니 당연히 모든 말씀은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셉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 아버지와 형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팔아 버렸듯 예수님께서 팔리시고 또 이스라엘에게 있어 죽은 아들이었던 요셉을 만남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해 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우와! 하나님께서 예수님보다 수천 년 전의 사람인 요셉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예언하시고 그대로 실현됐네!’라는 감탄을 하고, 그 놀라움이 성경의 신비함이라 생각하는 것에 그치면 곤란합니다. 성경에 천하에 둘도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의 일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지구 반대편에 어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을 객관적 지표로 확인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경을 사람들에게 왜 주셨을까?’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불가사이한 것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그 문명과 과학으로 증명하는 숙제로 성경을 주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자랑하시려고 주셨을까요?


이야기를 달리 해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심청전을 이야기 해 볼까요? 그 저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저자가 심청전을 쓴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라도 심청전을 읽고서 심청이와 같이 효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심청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 모든 드라마와 문화는 그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 그것을 접하고 소비하는 사람과 관객들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또 그 삶에 있어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창작하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드셨기에 그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본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려고 심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성경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욥기를 어려운 성경으로 보는 것도 그 안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이라는 학문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리 상세하게 알아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 앞에서 그 지식을 뽐내는 것 이외에 쓸 일이 아무데도 없을 것입니다.


요셉에 관한 말씀을 읽고 또 들을 때에 <오늘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야 요셉이 절묘하게 예수님을 표현했구나?’가 아니라 ‘이 요셉의 일도 나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말씀이구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모든 말씀의 주제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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