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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21-22) 저들도 나와 같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6. 25. 11:59 Writer : 김홍덕

신앙이나 어떤 세계에 있어 본이 되는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우선은 부러움이고 더 나아가서 찬양하는 마음이 있다. 여기까지는 감정은 어떠해도 동의는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그 본이 되는 사람과 세계에 내가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놀라운 업적과 성과에 박수를 보내고 부러워하면 다른 곳에 가서 자기가 함께 하는 사람,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허영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와 같아지는 것, 그가 본을 보인 것을 나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고, 또 그 사람이 내 조국, 내 나라를 대표한 사람일 때 느끼는 자부심과 감동은 대단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지만 그 선수와 같이 나도 금메달을 따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고 또 두려워하며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상대가 바다 위를 걷는 존재라면 다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가 그렇다는 것은 믿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놀라운 분과 내가 같아지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든지 아니든지 간에 하나님이 뜻하신 바라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진리이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에 대하여 엄두를 내지 못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 이 기도의 앞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그 영광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셨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그 영광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고 그 영광이 같은 것이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 역시 하나님과 하나이고 그 영광도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하신 이 기도가 자신에 대한 기도라는 것을 감사함으로 믿는다면 그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한 그 영광이 바로 자신의 영광이라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며 행여 누가 자신이 그렇다고 하면 이단이라며 몰아세우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의 기반, 영광스러워지는 존재는 늘 육신이다. 육신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세상의 일원으로서 경쟁하는 중에 세상의 법에 따라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영광이라 생각한다. 육신의 아름다움을 경쟁하는 미인대회에 우승한 사람이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육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긴 자와 패한 자를 결정하는 세상의 기준에 의하여 얻은 승리의 영광이 하나님이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것이 아니면 그 승리의 영광을 왜 하나님께 돌리겠는가?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릴 소산이 아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자신이 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혹자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만든 사람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세계와 경쟁해서 이겼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의 안목에 의하여 이긴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그것은 돛단배 안에서 돛에다 부채질 하면 배가 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그런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의 문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물음에서 보듯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는지가 하나님의 관심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이긴 이김과 성공을 영광으로 올린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것을 영광으로 아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영광으로 아시는 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닌가 하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 관계가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는 행동을 받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 관계의 기본 방향은 사람에서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에서 사람으로이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생명이자 내용으로서 사람이라는 형식 안에 거하심으로 그 형식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지, 어떤 성과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 성과가 세상의 가치관과 법 안에서 육신이 이긴 자가 된 성과라는 더더욱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풍요와 다산의 신, 소유와 공로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의 성격이 육신으로 어떤 것이 이루기 낸 것이라면, 그것이 신앙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기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성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신앙이 된다면 밥을 굶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당뇨병 환자는 다 하나님 앞에서도 죽으란 말인가? 철야를 하고 산에 가서 소나무를 뽑듯이 기도를 해야 무언가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야간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신앙의 높고 낮은, 좋은 신앙과 어린 신앙, 하나님께 올리는 큰 영광과 작은 영광을 나누고 구분하는 기준이 육신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관한 것으로 판단하는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가치관 그 가치관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기도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볼 때, 물 위를 걸으신 일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신의 일을 따라 해야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과 같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예수님은 칭송하고 박수치며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까 하는 것이 남는다. 이는 무엇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만드셨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것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진리로 여기셨기에 그렇게 사셨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 그리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기준이 바로 그것을 아는 것에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의 해답이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유일한 것이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성품이며 그 표현된 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의 전부인가 하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만약 그럴 것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표현했으니 그것으로 족할 텐데 뭐한다고 이 세상의 역사가 지속될 동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라는 육체로 표현하신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삶의 모양이나 능력들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다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삶에 대한 목적과 가치관과 이유와 의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그 말씀이 이 땅에 오신 육신의 내용과 삶의 목적이 되었기에 그 목적대로 바다 위도 걷고, 죽은 자도 살리면 십자가를 직접 몸으로 지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이 표현된 것이다. 그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존재하시고 그 성품이 어떤 분이신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와 그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서 그 육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대로 그 육신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도록, 또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듯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육신이 사는 목적과 의가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영광에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육신이라는 이 형식 안에 하나님이라는 내용이자 본질, 사람의 존재 목적이 성전에 하나님께서 거하심과 같이 거하심으로 그 육신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역사 이래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만큼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하나님의 풍성함, 무소부재하시고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그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눈에 보이는 이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은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하나를 알아야 하나님의 영광도 무엇인지 알고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도 아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영광이 자기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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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예수님의 제자들만을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가 제자들만을 위함이 아니라 제자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함이라고 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19)


이 예수님의 기도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단계적)조건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 =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한다고 하셨고,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 역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듯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므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 됨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삶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이 일하시니 자신도 일하는 삶이 되고, 그 삶의 어느 작은 한 부분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내용이고, 삶으로 표현되는 속사람의 전부인데 어떻게 그 육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은 숨 쉬는 동안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떨 끝 하나까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두 종류 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이란 언제나 Be or Not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면 그 생명이지 반은 고양이고 반은 강아지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삶의 어느 순간 또 어떤 부분도 그리스도여야지 그리스도 났는데 어떤 부분은 그리스도답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와 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로서 그 삶의 어느 순간도, 어떤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적이 없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역시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께 구하셨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어떤 분이 온전치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어떤 순간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생명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다 사람이었는데 이 순간이 되기 전 어떤 순간에 개였던 적이 있었는가? 그럴 리가 없다. 개 같은 짓은 했을 수 있지만 그 육신이 개의 유전자로 치환되어 개와 같이 산 적이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생명일진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어떤 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함을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의아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행동이나 소유의 드림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가끔씩 교인들에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험한 일이 생기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욥의 세 친구와 같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니 저런 거야?’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면, 또 그렇게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을 깨어 있는 것이라 위로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행동에 대하여 자신이 없으므로 어떤 순간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했다고 회개한답시며 울고불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하거나 신실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는 선악과 먹은 아담의 안목으로 자기 삶을 보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아니 알아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기도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 된다면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살아 숨 쉬는 어떤 순간, 어떤 부분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 수밖에 없음을 부인하거나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하나이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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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단순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으로 표현됨이 진리라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 유일한 진리는 그것 하나뿐이다.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이 되는 것, 그것이 진리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 하나 때문에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과 육신으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리임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육신 가진 인생의 진리가 그것임을 보이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성정으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사했기에 또 그 예수님이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믿는다. 하지만 여기는 엄청난 맹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으로 범한 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으로 인한 죄를 예수님께서 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기도해서 바라는 것 역시 행동에 관한 것, 육신이 먹고 마시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을 기도한다. 가치관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단언적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자기 행동으로 범한 죄는 자기 육신이 속한 사회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든지 용서를 받든지 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지신 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기 삶으로 표현해야 하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떠난 것, 그것뿐이다. 그것뿐이라고 하니 약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 하나로 인하여 사람이 살면서 짓는 모든 죄가 비롯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고, 자기 안에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살기에 모든 죄가 범해지는 것이다. 그 기준이 설사 성경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보니 자기가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가장 근본 된 죄의 문제는 외면하고 그 죄로 인하여 비롯된 행동이 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니 예수님께서 대신한 죄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예수님 이전의 사람이나 앞으로 태어날 사람이 행동으로 지은 죄는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 이렇게 어두운 것이다. 만물도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사람이 범하는 모든 죄도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 그것이 본질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고 돌이킴이다.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돌이킴이 아니다. 존재가 달라지면 행동은 자연히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사람에게 유일한 진리다. 그 하나만 알면 된다. 그러고 나면 그 정체성이 가진 본성으로 살게 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기에 그 삶은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것인 신앙이고 믿음이며 그것이 진리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셨다.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의 삶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며, 사람에게 있어 유일한 진리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없이 그냥 진리라고 하니 진리라고 믿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생 낭비다.


예수님께서 진리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 곧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이것은 단계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단계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진리인 사람이다. 이것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는 것은 파송장이나 마패를 주어 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진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살도록 하신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에 보내심이다. 성경 들고 먼 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으로 살 동안 육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전하는 것이 보내심이 아니다. 보내심은 이미 받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하나님이 보내심이라고 하였듯, 모든 인생은 육신으로 이 땅에 살게 된 것 그것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보내심이 아니라 먼 나라에 가야하고 삶의 터전을 떠나 험한 자리에 가야 보내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몰라서 그렇다. 육신으로 보내심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라고 보내셨는데, 가장 근본 된 보내심은 외면하고 꼭 몸으로 어디 가야 보내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진리가 되어 그 진리로 삶을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진리이신 이유와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의 목적과 하나님의 말씀(뜻)은 다 한 가지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삶,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그 목적을 위하여 이 땅에 우리가 보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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