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요한복음 17:24-26) 아버지의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3. 12: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고 하셨다. 이는 여호와라는 이름, 단어가 이 땅에 알려졌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와 동일하게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다는 의미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넘쳐나지만, 사랑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남자, 또 여자가 있지만 그 중의 한명과 결혼해서 사는 것은 여자와 결혼하고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 나에게 여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사람 또 나에게 남자로서의 의미가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사랑은 상대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 상대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헤어지면 삶의 의미가 없다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에게 존재의 의미고, 또 그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 사람들이 어떤 물건이나 일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씻고 빨고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의 존재 이유, 삶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의미다. 


이것을 짧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사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람에게 끊임없이 알게 하시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또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정체성은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정체성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다. 아들은 자기를 알아야 아버지를 안다. 즉 아버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며 그 관계성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 즉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정립이 되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해질 때 그 사이에 사랑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인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신 분이라는 의미와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또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예수님의 육신으로 표현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와 이유와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다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비추어 생각한다. 육신의 일을 헌신적으로 돕고 수고하는 것과 같은 것을 사랑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그런 모든 사랑의 표현은 사랑에 대한 의미가 표현된 것이지 그것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 자신의 삶에 있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 헌신적인 것이지, 관심이 없는 일은 전쟁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게 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사람이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또한 사람이 알았다는 것이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며, 정체성이며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의미 있는 관계, 곧 사랑하는 관계이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예수님으로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아버지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다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든 인생에게 중요하고도 중요한 이유는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도 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심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존재로 지음 받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펜더 곰의 아버지가 거위가 될 수 없다고 했듯, 세상을 살 동안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믿기에 하나님이나 또 다른 신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문제 해결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이 그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나타나게 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존재에 맞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 의이신 분이지, 나타난 것을 보고 그렇게 하면 내면이 바뀌는 법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가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살고 있는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 받기 원하고, 또 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때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고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삶의 목적, 즉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그 본질로 착각한 세상에서 인정하는 법대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도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세상이다. 세상의 법을 자기 삶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교회에 다닌다고, 눈만 뜨면 성경을 보고 외우듯 한다고, 육신의 삶을 팽개치고 교회 일만 돌본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관한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어떤 세계에서나 항상 나보다 이긴 자가 있어 나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의 법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아는 자는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자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것이고,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세상을 오래 살면서 세상이 원하는 법을 좇아서 나이 들도록 살고 나서 보니 그 법으로 그렇게 이기려 애쓴 자기 삶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도전하는 중이고, 나보다 더 이긴 자는 세상에 충만한 것을 보면서 자기 삶이 허무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모른다고 하고, 늙어서 인생의 의미를 ‘무(無)’라 하고 인생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인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기에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순종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체성을 아는 것 또한 당연하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이 기도의 주제다.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며, 하나님이 아버지시며, 하나님을 알고, 이름을 알리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 하나님의 이름과 정체성을 알고, 자기 존재의 의미가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이 안에 있는 인생이 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에 그 목적을 이루시려 십자가로 가시면서 하나님께 창세전부터 가졌던 그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구하시는 것, 그것이 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자기 삶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하나님이 자기 삶의 의미와 내용이 되시고 자신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나타내므로 사람들이 그 삶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아들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그 목적이 우리 삶의 의미다. 그 의미가 깨달아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복음 17:24-26) 아버지의 이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 09: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하시는 기도의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음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있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없는 과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만 봐도 적어도 예수님 당시 이전 4,000년 정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것은 모세 시대부터라고 쳐도 아담의 아들 아벨이 죽은 뒤에 다시 얻은 셋을 낳았을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고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했다고 하셨을까? 이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은 불렀지만 그 정체성은 몰랐던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버지는 물론 아들의 정체성까지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주로 범죄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신원미상’이라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을 발견되어 수사를 해야 하는데 그 피해자의 신원, 곧 정체성을 모를 때 ‘신원미상’이라고 이름을 부여한다. 마치 그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주관하는 신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라고, 또 모세를 통해서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은 알고 불렀는데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었던 정체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범죄 피해자에게 원래 이름이 있는데 신원미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알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한한 일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그 세계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일을 다 이루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보고하듯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은 무엇인가? 예수님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님 이전에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렀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 그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뜻이 표현된 존재다. 아버지 안에 있던 눈에 보이지 않고, 형상을 가지 않은 뜻이 아버지와 동일한 존재로서 표현된 존재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형상을 사람으로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사람으로 나타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 사람을 지으신 의와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자신은 하나님의 어떤 의가 자기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인지를 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로 알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아는 것이며, 세상과 다르게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신 것은 물 위를 걸으시는 일로도 아니고, 오병이어의 사건도 아니며, 죽은 자를 살리신 일로 인함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신 사건은 오직 십자가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실패자로서 사형수가 되어 못 박히시니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 세상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안목은 하나님의 관심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안목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진 이들과 신앙은 세상에 넘쳐난다. 산신령에게 비는 것이나 부처에게 비는 것이나 심지어 돈을 믿는 것이나 자기 힘을 믿는 것이나 모두 예외 없이 그것이 목적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자기가 믿는 것의 위대함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는 무례한 신앙이 바로 세상에서 잘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시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밑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한 사람들과 같은 시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세상의 법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과도 같은 신앙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시각과 같은 것이다.


그런 가치관과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 정체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로 아는 것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를 알게 하신 십자가와 반대로 향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법으로 실패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는데, 많은 사람들(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무리 입으로 불러도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알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복음 17:24-26) 아버지를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 07:00 Writer : 김홍덕

영화 쿵푸펜더에서 펜더 곰의 아버지는 거위로 나온다. 그건 만화이기도 하고 또 그 만화 역시 3편에서 결국 펜더는 펜더 아버지를 만난다. 즉 아버지는 결국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알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아는 자신의 정체성, 그 안에서 결국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세상은 세상이 가진 어떤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 가치관, 그 안목과 정체성 안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의 자식들(요 17:12)’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은 결국 멸망이라는 것 안에 갇혀서 살기 때문에 그들의 아버지 역시 멸망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가진 가치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아버지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에게 ‘너는 누구냐?’를 물으시는데, 사람들(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은 하나님을 찾아 갈 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드릴지를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공로와 소유를 교회에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자기는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로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으로 믿으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그 신은 자기의 우상이요 자기 하나님일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응답하시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더니 사업이 잘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하나님을 믿는 세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닌 것이다. 길 가다가 다른 인종의 사람이 다른 언어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응답하는가? 그렇지 않듯, 존재의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누구라 하는 지에 응답하시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것에 반응하시는 분이시지,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답을 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성공은 되면 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자기 하나님, 자기 우상을 더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도 하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터부시하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이 다른 정체성을 가졌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펜더 곰 아들에 거위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만화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펜더도 거위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자신을 볼 때 스스로가 봐도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시 자신을 보니 하나님은 참 존재의 신이심이 우러나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육신으로 살 동안 필요한 것들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려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공로와 소유의 신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어디 하나님 앞에 자기 가진 십분의 일을 드려서 뻥튀기 하듯 자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잡신으로 섬긴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의 정체성이 바로 풍요와 다산 아닌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신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신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누구라도 아버지를 알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아버지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과 정체성이 같은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니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아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셨기에 세상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아셨던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법 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 정체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그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이라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 땅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십자가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내려오셔서 그야말로 세상의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 가치관 안에서 이긴 자가 되어 영광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럴 능력이 없는 것 또한 아님에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던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은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체성도, 자기 정체성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단순히 부르고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의 정체성과 자기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관계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것은 길가다 아무나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같은 정체성, 같은 세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