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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세요?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7. 7. 11:36 Writer : 김홍덕

많은 신앙인들의 공통적인 관심사 중의 하나는 아마도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지?’와 같은 의문을 적어도 한 번쯤은 가져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가진 분들의 대부분의 난관은 답을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좀 더 하나님과 친한 신분이라고 생각이 되는 목사에게 가서 결정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요.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불문율과 같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과 거의 같은 동의어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는 문제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어느 대학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와 같은 선택의 문제들, 그리고 당면한 문제, 난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주어졌을까?’와 같은 경우들, 심지어 어떤 실패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정으로 인하여 저렇게 되었네!’라는 수군거림까지. 다양한 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듯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뜻>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같이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다 사람일 것이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질문의 의도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육신과 육신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 하기는 하는데, 정작 사람으로 이 땅에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가 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모든 의문들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생소한 물건이나 제품을 만났을 때 가지는 첫 의문이 바로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물건의 존재 이유를 알면 사용법은 쉽게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그 존재의 이유를 알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또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이 땅에 살게 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헤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이유를 알면 그 존재의 용도도 아는 것이고 용도를 안다면 상황마다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도 명확해지는 것이니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힘든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존재의 이유를 아는 것이 바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리고 당연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늘 궁금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 즉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어두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것에 있어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을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느냐>가 핵심이며 그것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고 보면 하나님께 무엇을 할까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을 것이고,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찾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과 사물에게 있어 뜻은 어쩌면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 그것이 그것을 향한 유일한 뜻입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을 본다면, 휴대폰 스마트폰에 대한 주인의 뜻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입니다. 그것이 휴대폰을 향한 유일한 뜻이고 모든 뜻입니다. 휴대전화의 기능은 어떤 것이라도 주인이 가진 소통이라는 뜻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여기선 어떻게 하라는 거지?’라며 뜻을 찾으려 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휴대폰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향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입니다. 적어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뜻을 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다면 살아가는 순간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뜻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을 안다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한데 그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본성 안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하는 바가 있어 물건을 만들면 그 제품 안에 추구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기능은 다 들어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람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그것이다. 그것 하나만 알면 살아가는 순간 당면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안에 있는 본성, 그것을 따라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살면서 어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하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상기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남에게 가서 물어 봐야 한다면, 또 존재의 하나님께 행위에 관한 것을 존재 문제의 해결 없이 묻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아직 모르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나를 보내신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신 목적이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 하나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 별로 궁금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생수와 같이 늘 필요할 때 마다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때가 되면 생각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르겠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이 땅에 살게 하신 뜻 그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묘연한 것일 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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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모임 안내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7. 6. 07:04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운영자 김홍덕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공지된 바와 같이 

매월 2,4째 토요일에 대전에서 가지기로 한 정기 모임을 

예정대로 금주에 진행합니다.



장소는 기존 공지대로 '정오숙 집사님' 오피스텔에서 진행 됩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대전모임>


2016년 7월부터 


일시 : 매월 2,4째 토요일 오후 1시~4시

- 첫모임은 7월 9일 토요일


장소 : 대전 주은오피스텔 309호

- 위 장소는 정오숙 집사님 소유의 오피스텔입니다.

- 주소 : 대전 서구 둔산동 921번지(대전 정부청사역 인근)

- 주차 : 주차는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하시면 됩니다.(309호 가신다고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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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나니 예수님을 파는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병사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내가 그다.”라고 답하신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유다는 세상 군대와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에게서 병사들을 얻어서 예수님을 데리고 왔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잡는 것은 세상의 힘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잡으려고 할 때 잡으려는 대상을 제압할 수 있는 것, 잡으려는 대상의 특성에 적합한 것으로 잡으러 간다. 새를 잡을 때 함정이나 덫으로는 잡을 수 없고, 물고기를 총으로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을 잡을 때 세상의 군사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 세상의 법인 육신의 능력으로 서로 겨루어 이기는 세계의 법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로마군대나 제사장들의 관점과 동일하게 예수님은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예수님을 칭하는 호칭에서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찾느냐?’고 했을 때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답한다. 나사렛 예수… 그것은 그 시대, 그 사회의 패자들이 사는 동네인 나사렛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세상의 법으로 볼 때 패자요 죄인인 예수를 찾는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여 죄인이라 여기는 가룟 유다가 그 관점과 가치관대로 세상 힘의 상징인 군사를 데리고 와서 당시의 천한 동네요 패자와 죄인들의 동네에 속한 예수, 즉 죄인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에 <내로라.>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패한 자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데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죄인이 되어 죽으셨다. 아니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수용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왜냐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도 의인이 되는 것이라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체시고 아들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해서 죽였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주인이 보낸 아들을 죽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이 세상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죄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 기준은 다름이 아닌 선악과다.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준 그 기준 자체가 선악과다. 그리고 그 선악과에서 규정된 선으로 보면 예수님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악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고, 행동이 경건하고, 세리와 창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그렇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부정한 자와 같이 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준이라 생각한다는 것은 나타난 것,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보이지 않고 나타난 율법만 보였기에 그것이 본질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외면하고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자기들 맘대로.


만약에 율법에 명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질이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을 싫어하셨을까? 심지어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망각이라기보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확신한 것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따라서.


그 기준으로 보니 예수님은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길만한 것이 없는 분이셨다. 그 함축적인 표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인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저 모습은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고 자기가 정한 선악의 기준대로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 기준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것에 순종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법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인생은 세상의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을 보이시고, 그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전하신 것이다.


반면에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가고 있다. 먼저는 예수님 이름(정체성)으로 기도해서 세상에서 경쟁력을 가지려 한다. 예수님께 기도해서 건강해지려 하고, 상위 대학에 가려하고,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 한다. 물론 나름의 명분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소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그 경쟁력으로 교회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또 사회에서의 죄도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좀 더 고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행동이 경건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을 보신다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은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행동이란 중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라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행동을 바꾸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성경을 읽고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참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상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스스로 죄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죄로 규정한 것을 마구 행하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세상의 법, 경쟁해서 이겨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이긴 자요 하나님께 영광이라 생각하는 그 법 아래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모든 법에서 이긴 자는 없다. 어디서 어떤 법으로 인해서든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돈으로 이긴 자가 건강에선 지는 자가 되고, 명예에서 이긴 자가 자식 농사에서 진 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법인 것이다.


그런 법 아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의 모든 것에서 조차 의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의 모든 행동의 결과인 공로와 소유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스럽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고 안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며 이생의 자랑인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세상의 법을 이겨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라고 유혹한 것은 끊이질 않았다. 금식 후 사탄이 그랬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랬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세상의 법으로 너를 못 박은 상태를 이겨보라고 유혹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정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에 유혹을 받았는데 이긴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강아지에게 ‘야옹’ 소리를 내어 보라는 것과 같은 유혹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은 것은 유혹을 신념으로 마음 다 잡고 이기신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능력이 있음에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전하신 복음과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하나님께 세상의 삶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떼쓰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갈 능력을 발휘하자는 유혹이다. 세상에서 죄인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 세상에서 죄인이 되면 안 되고, 예수님을 믿는 자신도 세상에서 조롱거리나 패자가 되면 안 되며, 교회가 세상보다 뭐가 나아도 나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런 존재임을 알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은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에 순종하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법으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했다.’며 사형시킨 그 십자가에 순종했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가진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 영화 밀양의 살인범과 같이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했으니 세상에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세습되는 것을 비난하는 세상의 여론을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그 유괴 살인법이나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이 육신의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사용하심과 같은 용도이다. 예수님의 육신은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됨을 순종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 육신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세상의 법으로 우리를 죄인 삼을 때 그 법 앞에 우리 육신을 내어주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 이 육신의 사용법이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 우리를 죄인 삼으면 죄인이 되어 수고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세상에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몸을 좀 수고하고, 한 걸음 더 걷고, 한 번 더 일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고,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못한다는 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같은 교회의 성도가 신앙이 없음에 그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수고할 생각은 않고 입으로 심판하는 신앙을 영적 전쟁이니 거룩한 일이니 심지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어둠의 자식들의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으로 군사를 데리고 온 유다가 ‘당신은 나사렛 예수’ 곧 죄인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니 이 이제 죽어야겠다는 그 주장에 자신을 맡기셨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 것인가? 오늘 자기 주장, 자기가 하나님인양 살아가는 세상과 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주장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어디 감히?’라고 하는 것인 신앙이겠는가? 아니면 죄인처럼 그 주장으로 인하여 수고하고 자기 육신을 그것에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땠는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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