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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8-17) 빚진 자(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6. 12:0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는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진 자라고 한 것은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한정된 것도 아닙니다. 이는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빚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삶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사람의 존재 목적, 곧 하나님 앞에 있는 빚이 그것인데, 그 빚을 갚는다는 것이 결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그 누가 봐도 ‘아! 저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고 복음이구나!’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복음을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자신을 하나님께서 조성하셨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 곧 모은 사람에게 복음을 나타내는 빚을 갚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금만 신앙에 관심이 있고 또 하나님을 잘 믿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빚을 갚는다는 것, 복음을 전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의 실체에 있습니다. 여기에 상당한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의 삶이란?



빚진 자의 삶을 생각해 보려면, 먼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태도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 그리고 그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과 다니는 사람들이 가진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적선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수고로움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러니 내 말 들으라.”는 식입니다. 수고로움이란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아무리 대단하고 힘들고 창피하고 수고로운 것이라고 해도 자기의 의와 고상함과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지 상대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빚진 자로서 전하고, 종과 같이 섬김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 소위 말하는 노방 전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대적으로 그런 전도 방식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인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1980년 여름에 전국전인 전도 운동 ‘나는 찾았네!’와 같이 말입니다. 노방 전도는 전도하러 나서는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전도하는 것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울역에서 그렇게 전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길거리를 가고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전하는 사람 입장에서 의롭고 힘들고 수고스러운 방식을 선택했다고 전도가 힘들며, 그것을 감당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힘든 사명이라고 스스로 높인 것일 뿐입니다. 듣는 사람, 들어야 할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적선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것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런 전도의 방식과 그런 전도 방식을 생각하는 사고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잡으러 군사들이 왔을 때에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서 그들을 물리칠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하셨지만 결국은 그들에게 끌려 가셨습니다. 즉 그들의 방법,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입니다.


이 예수님의 법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어떤 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방식과 의로움과 원하는 것에 죄인처럼 드리는 예수님의 법은 자신이 가진 복음의 의로움이 부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하는 법이 아닙니다. 의로움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이 주장하는 의로움 앞에 죄인이 되신 법입니다. 


이 법을 알고서 전도를 한다면, 사람들이 원치 않고 시끄럽게 여기는 노방 전도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식 앞에서 죄인과 같이 끌려가서 그들의 의에 의하여 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과 같이 끌고 간 사람이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고 그것이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능력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빚을 갚는 삶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빚진 자라는 것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의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 앞에서 죄인이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에게 빚졌다면 헬라인이 의롭게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므로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다는 의미고, 야만인에게 빚졌다는 것은 야만인들의 선함과 의로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으시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신 예수님의 법으로 빚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그 누구라도 그들 앞에서 빚졌다는 것은 그들의 의로움 앞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생명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예수님의 생명과 같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목적을 빚진 자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멘이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을 앞세워 사람들을 대할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을 앞세워 사람들을 대하면 사람이 믿음 없음을 책망하게 되고,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자라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빚졌다는 것은 사람의 혈통이나 내면의 어떤 다양함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을 인하여 다른 사람, 그가 혈통이 어떠하든, 내면과 생각이 어떤 사람이든, 심지어 신앙이 어떤 사람이라도 죄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의 삶, 그렇게 자기 의가 죽은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삶, 죽은 것 같고 죄인인 것 같은 그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생명과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온전해야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거듭남이고 부활인 것입니다. 빚은 그렇게 갚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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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과 십자가의 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8. 26. 00:48 Writer : 김홍덕

결혼 후 처음 맞이한 명절, 그 끝자락의 일요일. 신랑은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그 시각 신부의 친정에서는 조카 사위 한 번 보겠다고 친척들이 귀향(성) 시간을 늦추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축구는 늘 그랬듯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고 있고, 신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신랑은 축구가 거의 끝날 무렵에서야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마치고 운동장을 나섰지만 그 역시 마음이 불편하다. 교회의 지체들과의 매주 하는 축구 시간이 처가의 친척들과의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에 나누는 인사와 비교할 때 더, 아니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불편하게 도착한 신부의 친정, 당연히 대부분의 친척들은 돌아갔다. 그 시간까지 있을리가 만무했다.


여기까지는 서론이다. 본론은 그 다음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정에 있는 너의 옷가지를 다 챙겨라'

그리고는 정말 그렇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서 그들은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다시는 친정에 와서는 안 될 것 처럼. 교회의 지체들과 노는 시간을 빼앗은 죄를 지은 신부는 그렇게 옷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크라이막스는 여기가 아니다.


이 부부의 일은 그 교회에 소문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다음 예배 후 간증 시간에 부부의 간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신랑의 승리(?)였다. 신랑의 처사가 진정으로 복음적인 것이기에 찬양을 받았고 교회의 다른 지체들은 신랑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한다고 화답하고 칭송했다. 그리고 신부는 진심으로 자신을 돌이켰다. 그리고 그런 신부의 모습에 교회의 지체들이 역시 화답했다.



평범하지 않은 듯한 이 이야기는 실화다. 그리고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을 때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 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 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난 그냥 지나갔다. 어쩌면 적어도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지나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이 더 옳으냐를 떠나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적어도 내 마음의 빚이다.


오늘 문득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묵상을 글과 또 녹음 파일로 표현하면서 그때 완연하게 동의되지 않았던 그 마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실화의 어디에서도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을 신앙적으로 볼 때, 아니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시공간에 사람이 더 함께하고 기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야구로 비유한다면 안타를 친 것과 같다. 안타를 친다는 것은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점수로 승부를 가린다. 안타가 중요하지만 안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사랑하며 또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나타나는 한 형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한 형식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행동 습성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저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구나!" 라고 탄성을 내게 하고,

"이 신앙은 나도 가지고 싶은 신앙이구나!"라는 감동을 주어

신앙 가진 사람을 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깨닫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 속의 신랑은 의로웠다. 아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처가의 식구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하는 의로움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의로움은 죄인이 된 적이 없다. 기껏해야 발을 동동 구르는 신부의 눈치를 보며 분이 난 마음 그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인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로움이 의로운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냄,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로움이 세상의 군병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신앙적 의로움이 죄인이 되지 않은 것이다. 죄인은 고사하고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더 의롭기에 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신랑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는 죄인이 되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렇게 자신은 원치 않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세상적인 가치관(새 조카 사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랫사람이니 그를 봐야겠다는 것)에 끌려 갔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부가 '남편은 교회 사람들과 축구하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법이 절대로 없는데 이렇게 친척들이 불러서 왔노라'했었으면 어땠을까? 그것이 어떤 열매를 가져오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십자가의 도를 보여준 것이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제는 교통함이 단절되어서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신부의 친척이나 가족 중에서 그 신랑의 신앙을 보고서 그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은 없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의 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가진 신앙의 의로움은 절대 손해보거나 손상 당하지 않으려 한다. 흔한ㄴ 예로 교회 가는 시간에 뭔가를 하지 않으려 하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을 친구로 둔 이들은 교회에 가지 않음에도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신앙을 가졌기에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 없는 사람들의 끊임 없는 양보와 이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세상의 임금으로 세우고 백부장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된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인줄로 알고 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보는 의롭지 않는 이들의 주장에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육신의 사용법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은 육신 가진 삶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 도를 가지고 산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을 오늘 자기 삶 속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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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8-17) 빚진 자(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8. 25. 16:11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기에 그 복음을 받아들인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에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일면 생각하면 듣는 사람에게 복음인데 전하는 사람이 감사할 일이 무엇인가 싶겠지만 바울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기를 전하는 것으로 삼았으니 누군가가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 정체성을 두고 있는 바울 사도와 같은 이들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나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세계로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돈을 꾸었거나 아니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에 이렇게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체감 상 당연히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빚>은 어떤 빚인가요?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나오는 죄를 영어 성경에서는 debt 즉 빚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킹제임스 버전-최근 버전은 주로 sin으로 기록) 이것은 옛날에는 죄 지은 자나 빚진 자나 다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자는 그 죄 값을 다 치를 때까지 빚진 자와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당시 헬라인이나 야만인과 같은 이들에게 뭔가 갚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요되는 비용을 자신의 기술인 천막 깁는 노동을 하여 벌어서 충당하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갚은 것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용역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에 조명을 밝히기 위하여 전구를 하나 샀다면 그 전구는 나에게 빚이 있습니다. 내가 그 전구에 대한 계획과 구매하거나 만든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전구는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전구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전구는 죽은 것입니다. 목적 안에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목적이 있었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빚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행하실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인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빚진 자인 것입니다.


그 존재의 목적,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진 빚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연상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보고서 ‘저 사람의 삶과 말을 들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겠다.’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또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혈통으로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또 그 사람의 삶이 모양이 어떠한 사람이든 무관하게 자신은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전하고 살아 내어야 하는 빚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진 빚인데,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이 교회를 세우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 들였으니 바울 사도는 빚이 탕감 받은 것과 같아서, 그 채권자이신 하나님께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인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바울 사도가 전한 이 로마서의 비밀을 알고서 그 놀라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우리가 로마서를 대하는 바른 모습일까요? 아니면 로마서를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로마서를 잘 아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다 유치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런 것은 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감탄하라고 한 고백이 아니라, 이 로마서를 보는 모든 사람도 다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에 ‘바울은 정말 겸손한 사람이야’라든가, ‘바울의 안목은 정말 놀랍고 로마서는 정말로 대단한 책이야’라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로구나!”하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없는데 하나님께 빚을 갚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 아래 거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빚진 자라는 것을 안다면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삶이라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이루어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 존재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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