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세겜 땅에서 생긴 디나의 일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5. 20. 12:45 Writer : 김홍덕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딸이 없는 사람도 많고 아예 남자인 사람도 세상의 반인데, 성경을 읽고서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야곱이나 디나처럼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럼 반문하고 싶다. 사람이 실수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나? 그리고 실수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항상 성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것은 사람의 실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가고, 또 야곱을 통해서 한 개인의 신앙이 공동체(교회)의 신앙으로 가기 위해서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처리되어야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야곱이나 디나의 실수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이 실수라면 하나님께서 실수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사람이 실수를 하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리고 괜히 야곱에 대한 관리를 느슨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 하시는 그런 고의적인 경영을 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공동체로 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기에 보이신 것이다.


많은 공동체들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즉 온전한 교회로 가기 위하여 애쓰는 과정에서 반드시 처리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좋은 것을 가져오고 싶은 욕망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교회가 거의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에 자꾸 가져오려 한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도 과학이나 인문학과 같은 다른 학문을 가미한 관점을 도입하려 애쓴다. 이유는 있다. 교인들이 세상에서 그런 것을 보고 또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디나(교회가 갖추어야 할 형식)가 세상의 여자들(세상의 형식들)을 보러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들이 그렇게 하다 보니 이방인에게 강간당한 디나와 같이 교회에 세상의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창조과학회와 같은 것이 그렇고 무엇보다 성경을 공부해야 설교할 자격을 가진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그렇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에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바로 눈에 보이는 형식인 학력과, 경력과 또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긴 경쟁력을 갖출수록 더 좋은 대우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그런 관행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공동체로 가는 길에 누구나 그런 욕심이 있기 마련이다. 디나가 이방의 여자들 곧 세상의 형식을 궁금해하고 보러 갔던 것과 같이, 교회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잘 나가고 좋은 것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세상 속에서 사니 그것을 가져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디나의 일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이 야곱의 속에서 나온 디나에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여정을 설명하시고자 택하신 야곱 안에서 나온 디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결국 아들들이 할례를 빌미로 이방인들을 살육하는 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야곱의 유언에서 보듯 야곱은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곱은 그 일을 주도한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 일이 야곱에게 화를 미쳤다고 한다. 반면에 야곱은 디나가 수치를 당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거나 화를 내거나 하나님께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35장에 들어서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니까 이 일은 실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가는 여정에서 처리되어야 할 것이 처리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들들의 일도 그렇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형식이 아닌 내용에서 비롯된 씨로 인한 생명을 낳는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된 예식인데, 이것을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마치 교회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행실(형식)을 심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밥 먹을 때 기도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십일조 하는 습관이 없고, 술 마시고 담배 피는 행동을 보면서 ‘그런 것을 우리의 규례대로 지키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들이 이미 세상의 가치관을 교회에 가져왔다는 것은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이러한 일들은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인 창세기 35장에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야곱이 벧엘로 가기 전에 자기 식솔들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신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니 모든 식솔들이 이방신상과 귀고리를 다 야곱에서 가지고 오고, 야곱은 그것을 세겜 땅에 묻고서 벧엘로 가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으로 보면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디나의 일이 있기까지 이방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 디나의 일로 인하여 이방신을 버리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가 그것은 온전한 공동체로 가기 위해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일, 즉 이방의 여자들을 보는 것과 같이 세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서 교회에 가져 오려는 일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고 생각이다. (돌아보면 필자도 이 복음을 전하는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실수하시는 셈 치고 세상에서 성공을 보장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그 땅에 묻고 떠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표현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는 것은 야곱의 일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또 온전한 교회를 누리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세상의 것을 신앙 안에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강간을 당하듯 자기 안에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온다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이 나를 엄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 생각을 이방신상을 땅에 묻듯이 버려야 하는 사건이지 할례를 빌미로 심판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곱의 딸 디나의 일은 신앙의 실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서 공동체의 신앙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의 것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디나가 야곱 안에 있는 사람인 것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의 좋은 것을 더하면 교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버려야 벧엘 곧 하나님의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말씀이다. 디모데나 또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와 같은 이들이 목회를 함에 있어 교회에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의 헛된 철학과 초등학문을 가지고 와서 그런 것이 있을 때 더 좋은 복음이라며 그런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 디모데나 에바브라를 업신여긴 일들에 대하여 편지로 강력하게 권고한 것이 그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다.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세겜 땅에서 생긴 디나의 일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5. 19. 11:47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받은 야곱이 그 장자의 명분이 가진 본성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은 그의 우려와는 달리 너무나 해피엔딩으로 마감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 조상의 땅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형 에서가 함께 갈 것을 권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가지 않고 세겜이라는 땅에 장막을 친다.


야곱이 가려고 출발한 땅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지명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땅은 언제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은 하나님께서 정한 땅, 곧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가고자한 곳은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려고 그 험난한 길을 와서 왜 머뭇거리는 것일까?


이러한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 세겜이라는 땅에서 겪게 되는 유명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야곱의 유일한 딸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다.(창 34장) 사건의 전말은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야곱이 머무른 이방인의 땅 세겜 땅의 여자를 보러 갔다가 그 땅의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 추장이 디나를 강간하고 연민하여 자기 아내로 삼고자 하나 야곱의 아들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자기 누이를 욕보인 족속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딸과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한 다음 다들 할례를 받아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칼로 살육하고 디나를 데리고 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명한 사건이다. 더욱이 야곱이 유언을 할 때도 이 사건을 주도했던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강하게 언급하기도 했다(창 49:5-7) 그러나 나름 반전이 있다면 야곱이 딸 디나의 일이 있기 전에 이 세겜 땅을 사서(창 33:19) 나중에 그곳에 묻힌다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이 반전에 관한 것은 여호수아(24:32-33)에도 나오고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도 나온다. 이것이 바로 세겜 땅에서 있었던 사건의 전말이라면 전말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들 말한다. 먼저는 야곱이 자기 길을 바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고, 그 딸 디나도 이방인이 궁금해서 돌아다니는 실수로 인하여 심각한 일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틀린 해석은 아닐 수 있지만 문제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왜 막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일이 나와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로 듣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먼저 사건 자체로만 본다면, 세겜이라는 땅은 ‘언덕’, ‘어깨’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어원들에 대한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산과 비교에 중간 정도, 머리 아래쪽의 어깨를 가리키는 의미, 즉 반 혹은 다 차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세겜이라는 말을 ‘반만 믿는다.’는 뜻을 가졌다고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 조상에게 명한 사람의 자리에 이르는 여정을 눈앞에 두고 반만 믿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딸이나 여자는 언제나 내용을 표현해 내는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 블로그에서 말해 왔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여자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육신으로 여자에 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의 안목이다. 여자란 남자의 성씨(혈통)를 가진 아들을 생산하는 존재, 즉 의와 뜻과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을 뜻한다. 그래서 의와 뜻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늘 여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신부로서 맞이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딸 디나는 이방인들을 보러 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인 디나가 남자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여자들을 보러 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방인의 여자를. 이 말씀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러 간 것이나 여자를 보러 간 것이나 같은 의미이다. 내용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사람이 내용이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일인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여자는 의당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 낼(결혼하면 바뀜) 혈통을 가진 남자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을 구하여야 하는데, 육신의 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구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살 동안 육신이 겪게 되는 일을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일들의 미래가 어떤가? 아니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아름다움이고, 이방 땅의 여자들을 구경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사람들도 다 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신앙은 모두다 야곱의 딸 디나가 이방 여자들의 모습을 보러 나갔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식 문제, 사업 문제, 교회의 행사 문제와 같은 것을 구하는 신앙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방 여자를 구경하러 갔더니 딸 디나가 이방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다. 즉 이방 족속의 씨를 자기 내용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간을 당했다는 것은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돈 달라, 밥 달라, 세상에서 하는 일이 주님의 이름으로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은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신앙의 정체성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는 것을 굳이 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계속)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복음 15:1-8) 포도나무의 과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5. 18. 12:35 Writer : 김홍덕

신앙의 열매는 무엇일까? 아니 열매란 무엇인가? 열매는 그 생명의 정체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열매나 2세가 바로 그 생명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과가 열매인 나무는 사과나무고, 낳은 것이 사람이면 그 부모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열매는 생명 정체성이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매는 생명이면 열매를 맺는 조건은 다 갖추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아이를 낳는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돈이 일정 부분 있어야 된다거나 하는 조건은 없다.(사회적으로 그런 관념이 있기는 하지만 생명 자체로 그런 것은 없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정말로 바보들의 합창이다. 그렇게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믿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이나 다 바보들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바보들의 합창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본성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열매를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하신 말씀이 자기 믿음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기도해야 하고, 성경 봐야하고, 교회에 와서 봉사해야 하고, 십일조 해야 하는 것을 동반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열매는 그냥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다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늘의 태양과 비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땅? 그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러니까 예수님이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가지는 포도나무에 속해 있고 또 가지에도 포도의 DNA가 있어 역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와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동일하게 바라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면 세상에서 좋은 것 누리거나 만드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면 포도를 맺는 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겨우 그 정도 못하는 것으로 뭐 걱정이냐?’ 싶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딱 잘라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사람은 포도나무의 열매가 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포도를 맺는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잘 만들어진 스마트폰이 주인을 만나서 통화를 하고 인터넷을 하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전시만 되고 있다면 그 스마트폰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밥 먹고 일하고 또 그러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러기 위하여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해도 포도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냥 버려진 존재일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포도나무에게 구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포도를 맺는 일, 포도라는 이름을 표현할 과실인 포도를 맺는 것에 관한 것 외에 구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 것도 없다. 반대로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하여 포도나무에게 구하는 것을 포도나무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그런 것은 아예 없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 열매가 달리는 곳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지라고 하셨다면 사람은 포도가 열리는 존재라는 의미다. 포도는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농부가 포도를 얻기 위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표현되기를 바라시며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면 지은 모든 사람들(가지들)이 그 삶에서 포도(그리스도라는 정체성)가 열리시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