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요한복음 17:24-26) 아버지를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 07:00 Writer : 김홍덕

영화 쿵푸펜더에서 펜더 곰의 아버지는 거위로 나온다. 그건 만화이기도 하고 또 그 만화 역시 3편에서 결국 펜더는 펜더 아버지를 만난다. 즉 아버지는 결국 나와 같은 모습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알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아는 자신의 정체성, 그 안에서 결국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안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세상은 세상이 가진 어떤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 가치관, 그 안목과 정체성 안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의 자식들(요 17:12)’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은 결국 멸망이라는 것 안에 갇혀서 살기 때문에 그들의 아버지 역시 멸망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가진 가치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아버지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에게 ‘너는 누구냐?’를 물으시는데, 사람들(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은 하나님을 찾아 갈 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드릴지를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공로와 소유를 교회에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자기는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로 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으로 믿으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그 신은 자기의 우상이요 자기 하나님일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응답하시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더니 사업이 잘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하나님을 믿는 세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닌 것이다. 길 가다가 다른 인종의 사람이 다른 언어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응답하는가? 그렇지 않듯, 존재의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누구라 하는 지에 응답하시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백하는 것에 반응하시는 분이시지,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답을 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성공은 되면 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자기 하나님, 자기 우상을 더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도 하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터부시하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이 다른 정체성을 가졌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펜더 곰 아들에 거위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만화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펜더도 거위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자신을 볼 때 스스로가 봐도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시 자신을 보니 하나님은 참 존재의 신이심이 우러나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육신으로 살 동안 필요한 것들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려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공로와 소유의 신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어디 하나님 앞에 자기 가진 십분의 일을 드려서 뻥튀기 하듯 자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잡신으로 섬긴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의 정체성이 바로 풍요와 다산 아닌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신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신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누구라도 아버지를 알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아버지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과 정체성이 같은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아시니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아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셨기에 세상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아셨던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법 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 정체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그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이라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 땅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십자가에서 초인적인 능력으로 내려오셔서 그야말로 세상의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그 가치관 안에서 이긴 자가 되어 영광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럴 능력이 없는 것 또한 아님에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던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은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체성도, 자기 정체성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단순히 부르고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의 정체성과 자기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관계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것은 길가다 아무나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같은 정체성, 같은 세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 곧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같은 세계에 사는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는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사람을 주었다는 것은 소유를 이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다. 성경은 존재 규범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가 핵심이고 유일한 주제인 것이다. 누구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만 정해지면 행동은 그 정체성에 맞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정체성이기만 하면 성경은 어길 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성경의 말씀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정체성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이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또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의 개나 지금의 개나 사람을 따르는 본성은 같은 것이다. 개니까 그런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본성을 지닌 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기도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서 되는 경지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고 훈련한다는 것은 같은 생명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같은 생명으로 났는데 같아지려고 노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생명이 어디 노력으로 되는 것인가? 그냥 나는 것이지?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기도의 모든 내용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 그것 하나만 있으면 그냥 되는 것이다. 그것도 금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영광을 주셨다면,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한 영광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것이다. 생명의 본성인데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평생을 그 영광을 피해 다니려 해도 어쩔 수없이 영광이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보게 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다. 단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는 것, 그리고 제자들이 그 생명으로 거듭났으니 그 영광이 표현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어떤 행동들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디 그런 표현이 있는가? 그런데 지금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듭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력하여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첫째 그 영광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런 생명을 가진 정체성이다. 그래서 장로가 되려고 교회에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또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가상히 여겨 직분을 주는 꼴이 생긴 것이다. 같은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은 거듭나지 않는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아니라 노력해서 영광에 이르는 세상의 법을 자기의 삶의 법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몇 번을 절을 하면 신이 들어 준다거나, 주기도문을 몇 번 외우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이나, 교회에서 정한 행사와 시키는 일을 잘 참석하고 따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 뭐가 다른가? 그것은 전부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이 있다는 법에 의거한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살아가다가 어떤 순간 자신을 보면 예수님과 같이 살고 있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고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자기 삶의 내용이 되고,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르게 살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나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래서 거듭남이라고 하고, 생명이라 하며, 사망과 생명이라 하시며, 부활이라 하는 것이다. 성경의 이 모든 말씀들은 다 생명에 관한 단어고 말씀이 아닌가? 생명의 법이기에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눈을 감고 다녀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보면서 살게 된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사람에 도무지 없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으로 난 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개로 만들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이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숨 쉬는 어떤 한 순간 예외 없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정체성으로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우면 그도 영광스럽다. 한국의 바나나가 노란색이면 아프리카의 바나나도 노란색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거룩하시면 그 사람은 똥물에 뒹굴고 있어도 거룩하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시니 그들도 하나님과 하나이다. 몸이 어디 있던지, 삶이 어떠하든지. 그런데 하물며 영광이랴?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체성이 정립이 되면 그 정체성에 맞는 자리가 생긴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신다고 하셨듯이. 존재는 항상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자리가 있다. 부엌칼은 언제나 부엌에 자기 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떠나 있으면 주인은 항상 그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곳이 자기 정체성으로 인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같이 그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같아지기를 기도하셨다. 즉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과 의와 뜻을 나타내는 존재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으로,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당연히 아들에게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논리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사람들이 복권을 사고선 그것이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며 즐거워한다. 복권을 샀다는 것만으로 당첨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이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으로 부르는 것은 같은 것이다. 복권은 자기가 가진 번호와 추첨번호가 일치할 때(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때) 복권이지 그렇지 않으면 휴지 조각에 불과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역시 그렇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자신의 정체성이 동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는 믿음이 소유와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믿음이라면 그것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린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회 청소하고, 성경 읽으면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복을 주시고, 또 죽어서도 세상의 개념과 같이 부자로 안식하며 살게 한다는 식의 믿음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남자에게 비키니를 주는 것이 모독이듯이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림이 어찌 모독이 아니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기적으로 왕이 되는 것도, 부자가 되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또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 하지만 이 육신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심히 좋은 존재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같은 존재니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죄인의 틀에 매달려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모습이 바로 자기 모습이라고 깨닫는 사람도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존재,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다. 부엌칼이 부엌에 놓이게 되는 것과 같이. 그것이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식이다. 어떤 것이든 자기 존재 정체성의 자리에 있어 그 존재 정체성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안정된 것이고 안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회복이며 그 상태가 바로 안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이 거하시는 자리에 거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 가려해도 주인이 늘 그 자리에 둔다. 부엌칼이 다른 곳에 있으면 주인이 언제나 부엌으로 가져다 놓음과 같이.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