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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6-17) 보혜사 성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5. 7. 10:06 Writer : 김홍덕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은 다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신다고 하셨고 이어서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다 연관이 있는 하나의 말씀인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성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셨다. 그 잉태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잉태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것임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과 계획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사람의 삶이 일치가 되는 진리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시기를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하심이 내(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과 연관이 있는 아니 같은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려면 예수님의 정체성에 맞는 것을 구하여야 하고,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구하는 것,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우리의 존재 의미를 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서 예수님께 구하는 무엇은 모든 것은 all of things가 아니라 any thing이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지만) any라는 것은 범위가 있는 어떤 것에 관한 것이고 더더욱 복수가 아니다. 복수가 아니라는 것은 개념과 같이 불가산의 것이다. 그 범위라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무엇을 구하면>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구하는 것>이란 뜻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과 같은 것을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 안에서 구하는 것, 그 정체성과 관련하여 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끔씩 사람들은 자유를 이야기할 때 ‘물고기가 물 밖에 나와야 자유가 아닌가?’ 라는 괴변을 말하기도 한다. 물고기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이든 이야기하면 들어 줄게?’라고 한다고 ‘누구를 죽여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것을 ‘무엇이든’이라고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 관계 안에서의 일이다. 이럴 때 all of things가 아닌 any thing을 사용하는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생성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이유와 원인과 목적과 행동과 본성은 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서 사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 그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집에 있는 전등에 넣으려고 산 전기가 주인에게 구할 것은 전기이다. 어디 가려고 산 자동차가 주인에게 구할 것은 이동하기 위한 기름이다. 휴대전화는 주인이 자신을 산 목적을 위하여 전기와 전파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하는 것은 주인이 먼저 챙기는 것이다. 주인의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주인의 목적에 더해서) 주인이 그 목적의 달성을 더 잘하기 위하여 때로 전등도 닦고, 자동차에 세차도 하고, 휴대폰 케이스도 씌우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그 뜻 안에 있는 것이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하시면 바다도 가르시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바다 가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시고 그것을 믿으라고 바다를 가르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이 그것이기도 하다.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의 존재 목적(하나님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을 설명하기는 자리까지 가시기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것을 몰랐기에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가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령 곧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 아래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고 여김을 받는 존재가 되는(즉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 잉태하심이 바로 성령의 잉태하심이고 그렇게 거듭난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그 생명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또한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성령이고 그 성령이 우리 심령에서 거듭난 생명을 잉태케 하시면 그 생명이 우리 삶을 주관하므로 그 생명이 나를 통하여 표현되는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십자가로 보이신 것, 그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다. 성령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삶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도록 우리 심령에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일을 영원히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보이시고 전하심으로 모든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라’고 하심과 같이 예수님을 볼 때에 성령께서 감동하게 하심으로(잉태케 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육신)이 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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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 블로그에서는 지속적으로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고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좀 특별하게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이유를 가지시고 창조하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 역시 늘 그것이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 역시 같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존재의 의미가 없고, 불사르게 내어주는 의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수많은 여자 또 남자 중에 배우자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이기에 결혼하는 것이고, 아들과 딸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면’이라고 하신 이 말씀의 사랑 역시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오늘 나에게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원래의 뜻 그대로의 의미가 되는 것, 즉 예수님이 나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것이라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지를 가질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여자가 좋아하는 것은 억지가 아니가 그냥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랑이듯.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또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 자기 운명이요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시듯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육신 곧 삶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은 오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지어진 그 존재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되었다면 당연히 그 삶이 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생명이 되었는데 그 말씀 곧 계명을 어떻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개처럼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것은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차원의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즉 서로에게 서로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나타내고 의미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서로 섬기면서. 그것이 새 계명이고 예수님의 계명이다. 그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신 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는 식의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무와 같은 것이고, 사명감이나 신념을 가지고 노력해야하는 의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면 지킬 것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대로 살 것’이라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사람으로 살 것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억측이라고, 또는 너무 알레고리컬 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그 법아래 있다. 달리 생명의 말씀이 아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한다. 모든 생명이 다 그렇다. 심지어 식물도 그렇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명과 본성이 있으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그냥 지켜지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의 법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 계명을 어기고자 해도 어길 수 없는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나의 짐은 가벼우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오라고 하셨다. 또 어떤 때는 내게로 와서 마시면 그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다. 또 어떨 때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또 어떨 때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다 같은 말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나와 같이 하라!’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인 너희들의 운명이고 존재하는 목적이기에 너무 쉬운 것이며 생명의 본성을 따르는 것과 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행복하며 복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다. 이 모든 계명이 예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지켜진다는 의미다. 사랑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생명이 자기 삶의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생명이 살아서 그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안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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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을 지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4. 15:27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가지고 산다. 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는 다양하다. 사회적인 것도 있고 법률적인 것도 있으며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의 규율도 있고 스포츠 세계에선 암묵적인 불문율도 있다. 그리고 종교적인 것도 있다. 아마도 종교적인 것이 차지하는 범위는 넓을 것이다. 법률은 물론 사회적인 것보다 더 많지 않을까 싶다.


많은 종교인들(이 블로그의 성격상 기독교로 한정할 수 있음)이 스스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지키려 노력한다. 주일날 일하는 것, 욕하지 않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 것 등등 십계명이나 또 성경 말씀들을 그리고 교회가 요구하는 것들 그리고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지키려 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문제는 그게 녹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일조, 정확한 십일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어이 없이 어렵다.(십일조를 왜 하는지? 목적은 제외하고 단순히 하는 행동으로만 볼 때도) 세전 수익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세후 수익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때로 무임승차를 제공 받거나 누군가에게 대접받은 커피 한잔 한 끼의 밥과 같은 것은 또 수익으로 봐야 하는지, 수익으로 본다면 그것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고 정산해서 십일조를 할 수 있을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내지 않는 것은 또 어떤가? 해가 질 때 까지 화를 품지 말라고 하신 성경을 다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단 5분의 운전이면 화를 내는 것은 마치 맡겨 놓은 것을 찾은 것 같이 나의 일이 되는 것을 어떻게 다 이겨낼 수 있을까? 아마 행동으로 화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지켜낸 사람도 없고, 어떤 각오를 해도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다 지켜낼 사람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여기에 괴리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의 성능도 모르시는 것인가? 할 수 없는 것을 사람은 다 아는데 왜 요구하시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고 여기고 더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려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뭔가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 살 동안 조금이라도 더, 한 가지라도 더 지켜내려고.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지켜내는 삶은 단 한번만 지켜내지 못해도 다 도루묵이 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교회는 말한다. 성경을 인용해서 이렇게. “깨어 있으라.”고.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매진한다. 다시 실수하기 전 그 짧은 순간에 죽거나 주님이 오시는 행운을 바라면서 평생을 그렇게.


하지만 단언컨대 그 방법으로 구원이나 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위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3:23)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난폭 운전을 생각해보자. 운전하는 그 많은 순간들 중에서 같은 도로에서 자기 옆에 함께 달리는 차보다 내가 먼저 가야할 이유가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살다보면 정말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교통 위반으로 인한 딱지나 심지어 위험마저 감수하면서 그래야 하는 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그렇지 않다.


만약 사람 안에 운전을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빨리 달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어쨌든 이유가 있다. 자기 운전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서나, 아니면 남이 자신을 화나게 했거나 차의 성능을 만끽하고 싶거나 그것이 취미거나 등등. 하지만 자기 옆에 가는 차 보다 더 빨리 가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운전하는 마음의 핵심이라면 그냥 갈 것이다. 그러면 교통법규를 그냥 지킬 것이다.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켜내는 것도 이것이다. 갖은 말씀과 계명을 하나씩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의지와 신념보다는 자기 안에 그것을 지켜내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하나가 바로 생명이다. 말을 해야 사람이다.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 사람이다. 생각을 해야 사람이다. 직립 보행을 해야 사람이라고 하는 그 많은 조건들을 지켜내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 사람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으로 태어난 그 하나만 있으면 사람이 되는 그 어떤 조건도 만족하고, 사람이 행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도 그냥 다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 성경을 지키는 것 그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단 하나의 이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남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생명으로 인하여 성경의 모든 말씀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생명의 법이고 거듭남의 비밀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말로서 예수님이 주님임을 고백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게 구원을 받았다면 성경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는 식의 구조를 가진 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말씀이 사람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의 생명으로 잉태되고 거듭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성경의 말씀이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 생명의 법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그 삶은 신념으로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심령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법이다. 그 생명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신앙은 노력이나 신념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고 있다면 자기 안에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은 그냥 생명이기만 하면 그 생명의 본성은 억제할 수도 없이 그냥 표현되고 지켜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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