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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어떤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하기에 앞서 ‘과연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누가 유익인가? 예수님? 아님 믿는 사람? 둘 다?’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보고서 답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 또 누구에게 유익이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을까? (까칠한 질문을 덧붙인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고상한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유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가지신 분이기에 사람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이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는 것도 사람이 희망하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간절한 것을 구할 때에 마지막에 인장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을 주문 외우듯 말을 하면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는 신호로 여기신다는 식의 자의적인 해석이 고착화 되어 있다.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는 기도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배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이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 ‘예수’라는 고유 명사를 기도할 때 꼭 언급하라는 의미가 본래의 뜻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람 속에서 늘 누리듯 알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전화기는 전화를 하는데 쓰기 때문에 전화기고, 자동차는 자체 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동차다. 특히 유대인들의 경우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짓지 않고 살면서 그 사람을 대변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인다. 그 전에는 대부분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아버지의 이름의 형태로. 이와 같이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다. 그 이름을 들으면 그 존재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서 기도하면 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갑자기 하신 말씀이 아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도 같은 말씀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역시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또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그것을 사람이 구하라는 것이다.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을 사람이 구하는데 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구하면 주신다고 하시고, 이름 곧 그 정체성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름이란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의 정체성을 전하러 오셨다는 것, 그 하나만 확실히 알아도 예수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사람이 회복해야할 그 정체성,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 하거나, 예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예수님을 대하면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계명이 있다.(제 3계명) 이 계명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대함에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대하라는 말씀이다. 남자에게 비키니 수영복을 선물한다면 그것은 그 비키니의 품질이나 가치와는 무관하게 그 남자를 망령되이 하는 것이다. 존재의 정체성과 다르게 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 그러면 주신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을 구하라는 것이고, 그럴 때에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인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다르게 예수님께 소유와 공로에 관한 것을 구하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삶의 모양과 육신의 삶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아무리 그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언급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과 예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망령되게 모독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오신 이유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오신 것이니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 역시 그것이다. 그 전하고자 하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이신 하나님이 그 성품을 형이하학적인 세계, 실존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시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 자리,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고,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자리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서 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관점, 이 법을 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유익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섭리에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시는 것에 택하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택정함을 받은 은혜인 것이다.


생명도 없는 그냥 흙에 불과한 인생,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씨가 심기듯 사람 안에서 이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감사한 삶을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은혜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이 사람에게 영광이 되는 법인 것이다. 이 법을 모르면 감사도 다 헛것이다.


육신의 일은 육신으로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대로 살면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인 것이다. 육신의 일,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일은 다 육신의 수고로 하면 된다. 그러라고 육신을 주신 것이지, 병원에 가면 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된다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일을 기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중의 새를 굶기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돕지 않으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동차를 목적대로 이동하는데 사용하는 운전자가 기름을 넣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생명을 가진 삶을 사는 것, 그것 하나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맞는 기도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체성을 사람이 회복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이유이며 그것이 이루어진 삶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 영광스런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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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성경 좀 아는 사람인데…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3. 10:04 Writer : 김홍덕

사회의 많은 부분이 다소간의 경쟁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전문가적인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한 것은 신앙의 세계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면 목사라는 라이센스의 경우 역시 성경에 대하여 신학이라는 미명 하에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조로 대우하는 경향을 넘어 이제는 아주 목사들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이 힘이 있고 평안하고 대우 받아야 하나님의 일이 잘 된다.>는 감언이설로.


이렇듯 성경에 대하여 좀 안다는 사람들, 또 왜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근거도 없는 바탕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있고 그것을 공부했다는 것만으로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행세하고 대우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행세와 대우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성공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 경쟁력을 갖춘 사람들이 받는 대우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돈 버는 일이나, 정치인과 판검사와 같은 사람들이 대우 받듯 좋은 차에 많은 급여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그 경쟁력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위를 차지하고서 마치 적선하듯이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거나 힘든 사람들로 하여금 의지하도록 유인하는 모습이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소간은 부정적인 표현이지만 사람들의 삶에 엮여지는 그들의 마음이 어떻든지 결국은 적선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새인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그 행태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이미 있는 것이기에 사회 속에서 사회에 있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말해서 ‘나, 성경 좀 아는 사람인데’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과연 성경을 아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알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며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전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세상의 성공이라는 것을 덧입고 있는 것이 만약 옳다면 예수님의 성공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성경을 좀 아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을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신학교는 가끔씩 놀러나 아는 사람 만나러 가 본 것 외에는 강의실 구경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이 내가 무식해서일수는 있지만 적어도 상식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힘든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대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어디까지나 자칭)이나 교회마다 있을 법한 신비한 능력이나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을 감찰하듯 하는 이들이 받고 있는 대우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냥 사형수, 곧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대우를 받으신 분이다. 그런 예수님을 믿고 특히나 그 말씀에 대하여 잘 안다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받는 세상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과연 성경을 아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넘어 때로는 슬프고 분노까지 일어나게 한다.


어떤 것이라도 남들보다 더 가져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삼투압과 같이 그것으로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다. 신앙도 남들보다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또한 좋은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신앙이 좋지 못한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신앙이 좋지 않은 사람을 섬기는 자리에 있는 그 모습은 당연히 더 초라하고 전혀 고상하거나 흠모할 것이 없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니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나은 것은 어떤 것도 없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실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체이시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모습은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수준을 넘어서 터부시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회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그 분이야 말로 사람보다 더 나은 모든 것을 사람들을 섬기시려고 사람이 가진 가장 추악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사형수가 되신 것이다.


이 예수님의 모습과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받고 있는 대우, 아니 굳이 대형교회가 아니어도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사회적인 경쟁시스템에 의하여 시험을 치르고 좋은 스펙과 경력으로 목사가 되고 되려는 사람들이 받는 대우, 그리고 소위 계시가 밝다는 사람, 영적으로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이들이 사람의 삶을 가르치듯 하는 지위에 스스로 오르고 또 받는 대접들의 어느 부분이 예수님과 닮았을까?


그렇듯 전혀 예수님과 무관한 아니 극과극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먹고 살고 예수님을 잘 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세상적인 성공과 궤를 같이 하는 성공의 삶을 누리고 추구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한 것을 애달아하면서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런 삶의 모습들이 굳건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보며 세상적인 시스템과 같이 경쟁하여 종교적인 자리에 이른 이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그렇게 설교하고 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이나 무당에게 의탁해서 굿하는 사람이나 구하는 것은 다 똑같다. 살 동안 육신의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고 죽어서 천국 아니면 극락에 가서 영원히 아니면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것 그 뿐이다. 단지 서로들 자기들이 믿는 신이 더 잘한다고 홍보할 뿐이다. 더욱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신에게 그것을 의탁하는 것을 미신이라 치부한다. 자기 꼴도 모른 체.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그런 잡신들과 세상의 문제들과 싸우고 뒤치다꺼리하는 신으로 절대적인 강등을 시켜 모욕하고 있다. 그것을 믿음이라 운운하면서.


어떤 것을 더 가졌다면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가진 이유 외에는 더 가질 이유가 없다. 예수님의 모습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시려고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더 가진 이들은 가지지 못한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가지지 못한 모습이 되고 그렇게 대접 받는다. 예수님이 죄인대접을 받으신 것처럼.


그런 이유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가진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죄다. 있을 것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가 딴 게 아니다.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니, 더 가진 것이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한 자리에 있지 않다면 다 죄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대하여 아는 것이든, 영안이 밝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신비한 능력이든, 교회가 가는 방향이든, 살아가는 일에 관한 것이든, 돈이든, 명예든 그 무엇이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같다.


이제 누가 성경을 아는 사람인지 정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행동을 가이드 하는 것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인가? 또는 영적인 안목, 성경에 대한 밝은 계시가 있어 남다른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성경을 알고 신앙이 좋은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문제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다. 그것을 남을 가르치고 두렵게 하고 눈치 보게 하며, 뒤에서 험담을 하는 것으로 나타낸다면 아는 것이 독이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은 사실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같은 생명이라면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고양이는 배를 타고 태평양 한 가운데 가도 ‘야옹’한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그 생명은 어떤 상황, 어떤 사회에서도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남을 유익하게 하고 섬기는 것을 위하여 살 것이다. 육신은 결국 그런데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성경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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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유명하고 벅찬 말씀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한편 막막한 말씀이기도 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하신 일=기적>이라는 기초 위에서 생각을 하면 이 말씀은 절대 이룰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살리고 그 자신이 무덤에서 육신이 부활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으니, 그보다 더 큰 일을 <예수님의 일=기적, 혹은 평범한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공식 위에서 예수님보다 큰일을 한 사람은 이때까지도 없었고, 앞으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일은 보통 생각하듯,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일은 우리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따라 오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데, 만드신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조차 모르거나, 미완으로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정보를 넣어야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일은 앞의 글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십자가>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보이신 곳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이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의 자리로 사람들을 이끄시려는 일을 하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면 예수님도 일을 하시는 것이고,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자기 자리로 가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또 전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육신의 일이 잘 된다고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일을 듣고 읽을 때에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아들도 유대인의 왕도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죄인이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습 역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예수님과 동일하게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 사람은 달라진다. 누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법을 좇아서 살겠는가? 그러니까 세상에서 경쟁(심지어 신앙마저)하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선한 사람, 이긴 사람이 되는 그 법으로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다시 그 법을 좇아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세상의 법과 같이 이겨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 때 선한 사람이 되고, 이 육신은 그런 법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기에 이 육신 가진 삶이 그렇게 연약하고 부정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해낼 형상이요 아들로 삼으심을 아는 사람의 삶이란 진정으로 남을 섬기는, 아닐 그럴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삶을 보고서 ‘저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그 사람도 자기가 본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일한 생명이 되는 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생명의 법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 예수님의 일이야 말로 진정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양을 먹이는 일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일과 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우리에게 유익인 것이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일을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보다 큰 일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게 되는 조건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된다고 쳐도 어떤 것이 더 큰일일까? 그것은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이지만, 우리는 그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예수님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원래부터 흠이 없으신 분이라고 했다. 그것은 예수님은 원래부터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가치관이었던 적이 없었던 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가치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과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로서 살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돌이킴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체성,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면 패자가 되는 그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는 자들이기에 예수님보다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짐은 정말로 쉽고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 하고, 하나님의 주신 육신의 삶은 부정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며 흙에 짚을 더하고 불에 굽듯이 자신을 단련시켜야만 하늘에 이를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나고 배워서 자기의 의로 살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이대로가 온전한 것임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예수 믿기 어려운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이것을 알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그 운명대로 살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부가 같이 살지만 남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자가 알 수 없고, 여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남자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세상에 다들 섞여서 같이 어울려서 어떤 이들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악을 쓰고 살고 또 그러지 못해 분해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삶이 정말로 온전한 것임을 알아 감사하고, 섬기며 남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 삶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심지어 신앙도 그렇게 이기려 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십자가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고, 또 더 큰일을 하게 되는 생명을 가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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