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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24 강화도 모임 소식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4. 25. 09:51 Writer : 김홍덕

공지된 대로 4월 23,24일 양일간 강화도에서 모임을 잘 마치고 그 소식을 간략하게 올리고자 합니다.


강화도가 멀긴 멀더군요, 토요일이라 차도 많고 해서 대구에서 6시간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잘 차려진 저녁을 대접받고 8시 경에서 모임을 시작해서 10반 정도까지 이어졌습니다.


참석자 중에는 현직 목사님도 계셨는데, 목사님께 성경을 전하는 색다른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십계명>에 대하여였습니다.(내용은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고 전자책으로 출간 예정입니다.)


특히 모임을 주최하신 곽근태 선생님과 노화자 사모님께서 많은 신경을 써 주시고,

또 주일 아침 예배 때는 특송도 해 주셔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찬송가 88장)


앞으로 월 1회 이상 강화도에서 모임을 가지자고 하셨습니다. 말씀 들을 사람들 아주 많다고 하시면서

참 좋은 소식인데, 한편으로는 너무 멀어서 좀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려 합니다.



이렇게 복음에 대하여 글을 올리는 것은 결국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함인데, 공동체를 위하여 힘써 주시는 곽선생님과 노화자 권사님의 도움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속히 가고 있는 것 같아 놀랍고 감사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특송을 하시겠다고 했을 때 마음이 아주 놀라웠는데,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가 말씀이든 찬양이든 '오늘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기에 계획도, 어떻게보면 기대도 없었던 일까지 일어나서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앞으로는 여건이 되는대로 서울, 대전 등에서 정기적인 모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획 중입니다. 모임과 직접 만나서 나눔을 원하시면 언제라도 연락주시면 개별적인 만남도 가능한대로 추진할 계획이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연락주십시오. 그때 일정을 논의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모임을 주최해 주신 곽선생님 내외분과 또 서울에서 그곳까지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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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라고도 한다. 그의 성격은 급하고 또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버릴 기세로 앞장서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베드로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는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 13:36)

라고 대답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대답에 가만히 있을 베드로는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목숨도 버리고 가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오늘 밤 새벽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답을 하셨다.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금>의 상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갈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베드로의 마음으로는 당장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버릴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의 귀를 칼로 자르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으로 보면 뭐 공무 집행방해 정도는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 용기로도, 또 각오로도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자기 자리, 자기 능력이 안 되는데 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부인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사람들은 많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각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다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념을 가진 좋은 신앙을 괜히 삐닥하게 보는 것 같지만 신앙은 신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순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한번 수용하는 것 더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신념으로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베드로는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심문 받는 뜰까지 따라 갔다. 그리고는 먼발치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것을 보다가 옆에 있는 여종이 ‘너도 저 사람과 한 패가(제자가) 아니냐?’는 말에 ‘아니라’고 세 번 부인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베드로의 부인은 어쩌면 여종과의 대화 그대로 솔직했다. 베드로에게 있어 매 맞는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매 맞는 예수님과 자신이 한 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예수님과 매 맞는 예수님은 다른 분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 사람들의 가진 신앙의 상당한 부분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내어 놓겠다고 장담하는 신념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방향성이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겠다는 방향성.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나님께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보내시면 가겠다고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대단한 신앙인 것 같지만 방향이 잘못되었다.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잘못 경영하고 있는 세상인데 내가 가면, 나를 보내주면 그것이 바로 잡힐 것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능력이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나 신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자리는 신념이나 의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이다.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일이ㅣ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다들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있고, ‘하나님의 일이란 이런 것’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결론까지 가지고 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죽으면 안 되는 분이라는 결론이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나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육신을 순종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고 사람이고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하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세상을 바꾸는 것도, 또 믿는 사람이 육신으로 살 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한 가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다른 점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이 땅에서 남들 보다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믿음의 실체가 아니다. 단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시는 자리에 지금 가지 못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독립시키고 왕이 되어 가난과 병마들을 다 이겨낼 메시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베드로는 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런 기대를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그런 그의 모든 기대도 다 없어지기에 예수님은 자기가 목숨을 바쳐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 한 예로 목사들이 토요일 결혼 예식 주례를 기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일날 설교 준비에 지장을 준다는 것 때문이다. 그런 발상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러진 않을 것이다. 예배 의식과 목사라는 사람, 또는 말씀 전하는 사람이 다치거나 피곤해지면 말씀이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 심지어 그런 생각을 셀프 공천처럼 스스로 하는 이상한 목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다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리는 것이다. 말씀과 계시에 더 밝은 사람이 희생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복음이 전해졌고, 게시와 말씀이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종과 같이 섬기는 그 십자가의 섬김 없이는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다들 밀알을 지키려고만 하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예수님이 가신 자리인 십자가는 복음이 죽어야 복음이 전해지는 세계다. 목사를 보호해야 교회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발을 씻기는 섬김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믿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사형수란 멍에와 바꾼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은 교묘하지만 정말로 안타깝고 답답한 것이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핍박하거나 저주해서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마치 지금 교회를 위해서 목사는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상석에 앉고,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좋은 설교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세상의 방법으로 시험쳐서 된 목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종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 가려면, 예수님의 길을 가려면,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한 알의 밀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사보다 왜 순종이 나은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왜 책망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도무지 어디로 신앙이 갈 것인가?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가지도 못하는 신앙과 신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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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1-35) 새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20. 10:4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과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그 갈등의 핵심을 <계명에 대한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주를 이루었다. 안식일에 대한 것도 그렇고,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에 관한 것이 그랬고, 또 수많은 것이 그랬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아로 비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또한 안식일에 대하여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유대인들에게 단순한 자극을 넘어서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 일에, 그 말에 대항하고자 하는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도전적인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자충수(?)가 되었다. 그 일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끝자락에 서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마당에 제자들에게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명, 율법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들과 갈등을 겪다 패배해서 십자가를 지러 가는 순간을 맞았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새 계명>을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사랑>이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세상에 널렸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개념이 흐려져 있다는 의미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사랑을 <의미>라고 말했다.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 사랑이고, 상대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들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 사도가 열거했다. ‘천사의 말을 하고’로 시작해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을 말했다. 그런 행동들은 세상 사람들이 숭고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모든 행동들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부여하신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은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반이 나와 다른 이성을 가진 존재인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이기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의 존재 이유가 되시기 때문이고, 사람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사랑도 당연히 이것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다른 사랑을 전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니 당연히 그 말씀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고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과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고,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뜻과 목적을 사람에게 전하므로 사람이 그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을 모르면 제 아무리 대단한 희생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 사랑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새 계명이고,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모든 규범을 지키는 행동,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율법이든 계명이든 또한 그것을 지키는 어떤 행동이나 모습이라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의미를 모른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바다에 몸을 던져도 효도하는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심청전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섬김을 하는 행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기 때문에 군복을 입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발을 씻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먼저라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행동을 자꾸 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이다. 율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지켜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모른 체.


생명의 세계라는 것,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가 실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은 성경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있는 자는 그냥 살기만 하면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말씀과 교회의 설교는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고, 생명이 있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깨달으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방향이 반대인 것이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행하고, 생명이 없는 말씀은 밖에서 안으로 변화가 될 것이라고 속이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생명이 없는 가공품, 제조된 것들은 밖에서 안으로 만든다. 자라지도 않는다. 더 크게 되려면 새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생명은 자기 정체성에 맞는 것만 먹으면 안에서 밖으로 점점 커지고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자는 그렇게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말씀을 지켜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이 새 계명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새 계명인 것은 이전에 없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사랑하셨으니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새 계명인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사랑 때문에 생긴 것이며, 이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하나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랑, 율법과 계명은 넘쳐나지만 그 존재의 핵심인 이유와 본질이 바로 사랑이기에 이것을 보이시려고 섬김의 길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원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시려 함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세상이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는 존재가 되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전하고자 하신 뜻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 것이고, 그렇게 사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같이 서로 섬기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듯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당연히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랑은 밥 퍼주는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 계명인 것은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모든 계명의 이유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사람이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사랑이 있으면 그렇게 신념으로 지키려 하는 모든 계명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살아질 것이기에 계명이다. 지키려는 계명이 아니라, 무심한 척 사는데도 계명이 그냥 지켜지는 삶, 그것이 바로 새 계명, 바로 사랑하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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