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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4. 28. 12:52 Writer : 김홍덕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한지도 제법 되었네요. 가끔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제가 본격적으로 이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한 2014년 초에 마음으로 '3년 안에 이 블로그의 글로 인하여 신앙의 전환을 가져올 사람 한 명만 만나도 성공일 것이다'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신앙의 안목을 전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저도 알고 있기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시고 또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만남도 가지게 되다보니 어느새 20여분 가까운 분들을 직접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저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 확신하게 되는 일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이 만남에 대한 소혜를 적어볼까 합니다.


신앙이란 삶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행동=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행동하게 하는, 살아있는 생명 그것입니다. 그 생명이 안에 있어서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듯 신앙은 결국 삶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또한 사람과의 동행이고 관계입니다. 그것은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을 알지 못하고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 신앙은 어쩌면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기에 육신의 삶이 얼마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서로 만나는 만남이 신앙을 증거할 것입니다. 제 블로그를 보시고 마음에 변화가 있으신 분들이 아직 뵙지 못했지만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아마 다들 그 마음에 깨달음과 안목의 전환을 주변에 계신 분들께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호응을 얻으시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마음의 부족함, 자신이 새롭게 보게 된 성경 말씀과 오늘 나의 이야기로 이해된 성경말씀을 나누지 못하는 그 부족함을 같은 안목을 가지신 분들끼리 나눔으로 생명이 풍요롭게 되는 것이기에 만남이라는 것이 유익합니다. 다만 모든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해야 한다'고 말씀 드릴 수는 없지요. 필요가 느껴지시는 분들 부터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도 가능하면 커뮤니티가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려고 늘 생각중이고 네이버에 카페도 만들어 봤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가 블로그나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과 같은 것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고 외부에 용역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마음 같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습니다.(이점은 양해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강화도나 서울 그리고 국토의 중간 지대인 대전 등에서 만남들이 생겨나기를 소망해봅니다. 개별적인 만남도 좋은 것이고, 마침 제가 하는 일이 나름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일이라서, 요청이 있으시면 제가 가능한 시간을 내어볼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만남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언제라도 연락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락처 : 전화) 010-3396-5555 / 메일) the.elphis@gmail.com


PS 1. 가까운 시일에 대전에 한 번 갈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PS 2. 5월 연휴와 같은 때나 주말에 대구로 오셔도 좋습니다.

        - 대구가 볼 것은 없지만 그래도 몇가지 먹을 만한 것들은 있습니다.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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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겠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이 제자들과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자신들은 가기 힘들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는 주님은 갈 수 있지만 자신들은 갈 수 없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것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보는 안목이 증명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치적인 왕이 되어서 오천 명을 먹이시던 능력으로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각양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만 보고 있다 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처소>도 몸이 거할 곳으로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자신들은 예수님과는 눈에 보이는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 ‘갈 수 있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련하시겠다고 하신 처소는 몸이 거할 곳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둘 수 있는 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둘 수 있는 정체성, 곧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둘 수 있는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처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설명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자들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부족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서’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나면’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사람이 거할 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제자들(사람들)이 거할 처소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도마는 물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라고. 이에 예수님께서 정말로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다. 이 말씀은 너무 유명해서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제자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길과 물리적인 빛 그리고 생물학적인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과 빛 그리고 생명이 무엇인가? 차가 달리는 길이 길이고, 전구에 들어오는 빛과 햇빛이 빛인가? 그리고 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해지면 ‘앞이 캄캄하다.’, 혹은 ‘길이 안 보인다.’와 같은 말들을 한다. 또 어떤 기능을 이용하려고 구매하거나 만든 물건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맛이 갔다(죽었다)’라고 말들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과 빛과 생명은 바로 그것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어디로 가져가야할지 모르기에 길이 필요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빛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때로 사람들이 말하듯,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이 자기 존재의 이유, 삶의 목적과 의미가 없는 죽은 것과 같은 삶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회복한 생명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시기에 길이고 빛이며 생명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과 빛과 생명은 모든 인생이 거해야할 자리(처소)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아는 자리에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하는 빛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생명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삶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사람을 지으신 이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지었다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목적과 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사람, 즉 창조주로서 가진 의와 뜻을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셨기에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나타내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아들이기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가지신 이가 바로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께로 가면 처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알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의 자리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정체성)을 떠난 것이 죄이니, 자기 자리를 회복하면 구원인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자리니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도 그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LOGOS: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다.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삶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예수님의 모습, 그것이 바로 사람의 자리 곧 정체성이며, 사람이 살아야 할 길이고, 인생의 모든 것을 밝히는 빛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시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로 보여주신 자리가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는 것은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는 것이다. 사람이 거할 자리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생명인 곳 바로 아버지의 집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제자들과 같이 근심할 것이고, 또 예수님이 마련하는 처소가 천국의 부동산 하나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서 잘 살려면 헌금하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우리의 처소는 인간의 자리이다. 인간이 창조 목적대로 있을 때 자기 자리에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다. 십자가는 죄지은 사람과 벌 받는 사람 다른 대속이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길이고 빛이고 생명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때, 길을 알고 빛 가운데서 밝으며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는 수고의 공로가 아니다. 소유를 드림도 아니다. 십자가는 사람이란 공로와 소유의 법으로 보면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자리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율법도 지키지 않는 저런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죽인 것이나,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해야 천국에 가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산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길과 빛과 생명이신 것은 사람들이 존재의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섬기는 하나님과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이 이반된 죄와 수고 가운데서 있다 보니 방황하고 어둡고 사망 가운데서 길과 빛과 생명이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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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3) 근심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27. 12:02 Writer : 김홍덕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유명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무엇인지 잘 이야기 하지 않는다. 거저 세상에서 걱정하는 일들,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한 일들이 어떻게 될지 염려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잘 해 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로서, 또는 신념을 돋우는 말씀으로서 이 말씀을 믿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이르자, 제자들이 가진 두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가진 두려움은 단순하게 자신들이 따르는 주님이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시니 그 공백으로 인하여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 두려움은 자신들이 믿었던 예수님과 아버지께로 갈 것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이 다르기 때문에 가지게 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서 어쩌면 이 두려움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할지 모른다.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로 예수님을 믿던 안목과 생각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뜻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겪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시험을 쳐놓고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것과는 세계가 다른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체성이 이 땅에서 자기 육신이 살 동안 겪게 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임을 믿는 것에 기반을 둔 사람은 이 두려움이 뭔지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이 해당되는 삶의 여정이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실 것인데, ‘지금은 너희가 내 가는 곳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든 신앙인은 적어도 한번은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정말로 같은 예수님인가 근심해봐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망 가운데서 난 범죄 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듯,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고, 그렇게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우상)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닐 것 같지만 이것은 명백한 일이다. 사람들은 육신을 가졌기에 육신으로 모든 것을 먼저 인식한다. 그리고 그 인식은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기 전(모든 사람이 이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까지는 누구나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눈에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교회는 또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그런 가치관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근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제 서야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 아니지 않을까 눈치를 채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근심은 바로 그 근심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과 아버지께로 간다고, 너희는 지금은 올 수 없는 자리로 간다고 말씀하는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 빠져든 근심, 그 근심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음과 같이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기대와 신념일 뿐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제 너희의 생각대로 나를 믿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이는 것이 너희가 나를 믿는 믿음으로 삼아라.’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말씀이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서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누구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처소가 집이나 방과 같은 물리적, 지리적 장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 거하는 처소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아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들이 많이 거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아들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이 처소는 <정체성>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처소는 장소가 아니가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에 하늘나라에 들러서 하나님 아버지께 집을 확장하시라고 한 다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생각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처소를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처소를 장소로 생각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곳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깨달은 깨달음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이 되는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늘어난다는 것, 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십자가를 지기 전)은 아니지만 이후(십자가를 지신 후)에는 너희가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믿는 대상의 모든 뜻과 의와 행동의 결과를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이다. 아버지의 모든 뜻이 육신이 된 존재가 아들이 아닌가? 아들은 숨만 쉬어도 아버지의 DNA가 나타나는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아들의 정체성이 제자들과 또 오늘 우리의 정체성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떼쓰지 말고.


그렇게 될 때, 즉 아들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이 되면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니 그러면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 집에 거하지 않으면 어디에 거하겠는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처소를 설명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집에 자리가 있다. 집에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아들이 거할 자리는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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