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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은 30, 곧 당시 종의 몸값에 팔아 버린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팔 자를 가리키는 빵을 주시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곧 밤이 되었다고 했다.(요 13:31) 예수님을 판다는 것은 영혼의 밤을 맞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을 종과 같이 팔아 버리는 사람들, 예수님을 자기 삶의 곤고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만들어 버린 모든 가룟 유다와 같은 신앙인들의 심령은 다 어두움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나가고 나니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었다고 하셨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 13:31)

가룟 유다가 나갔다는 것, 그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종과 같이 여기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아마 자신이 예수님을 종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인가? 아니면 사람에게 유익인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다면 하나님이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단지 자기가 도운 사람이 세상에서 자기가 만든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서, 그렇게 더 나은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형상(이미지)을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렇게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목적이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며, 하나님이 유익이 되시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역시나 하나님이 만든 다른 사람보다 육신이 더 잘사는 것을 도와주시려고, 아니 그런 하나님임을 믿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주 예를 들 듯이, 차를 사는 어떤 사람도 차를 세차하고, 광내고 기름 넣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사지 않는다. 그것이 그럴 찐데,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차를 씻고 닦듯이 먹을 것, 입을 것 대령하시려고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가 육신으로 이 땅에 살 동안에 남들보다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성경 어디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 하나님께 “밥 주세요, 돈 주세요, 좋은 여자 주세요, 좋은 직장 주세요. 그래야 제가 하나님의 교회에 더 헌금 많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 곳에 기부할 수 있고, 좋은 직장으로 시간이 많으면 교회에 가서 청소라도 더 할 수 있자나요?”라며 자기 육신의 것을 구하는 그 믿음,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종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가 종의 값 은 30에 예수님을 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은 다 가룟 유다의 신앙이고, 그 신앙은 바로 어두움의 신앙인 것이다. 즉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흑암이 혼돈하는 세계에 머물고 있는 그런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 그렇게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것이고, 예수님을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램프 요정으로, 종으로 여기는 신앙이 자기 안에서 나가고 나면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 땅에서 다름 사람과 경쟁에서 이긴 것을 영광으로 아는 세상의 법으로 이겨서 그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마음이 사람에게서 떠나고 났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천지창조의 아침을 맞았다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그릇과 성전으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데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영광을 얻는 것이다.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존재가 영광을 얻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경쟁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내가 여기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나, 전 재산을 교회에 드린 사람을 보고 ‘와! 대단하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라며 칭찬하는 목사들의 가증한 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히려, 세상의 법으로 이겨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가치관으로 볼 때 너무 볼품없는 목수의 아들이 겁도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죽여 버린 그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인간의 본성,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정체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본 모습, 세상의 경쟁에서 이긴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는 부끄럽고 극복해야할 인간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요 존재의 목적이며 그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그 연약한 사람의 모습(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좋은 그런 존재인 사람의 본 모습)을 자기의 존재 목적으로 삼는 것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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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발을 씻기실 때에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라고 하셨다. 자신을 팔아버릴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제자 중의 한명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다. 좀 이상한 것이 있다면 ‘(떡)한 조각을 떼서 주는 사람’이라고 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까지 하셨는데도 다른 제자들이 누가 예수님을 파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씀을 하시는데도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자라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만찬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혹시 내가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인가?’라는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자신이 그 사람이 아닐까 염려했을까? 그것은 지금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자기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일이 있은 후에> 내가 그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부터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3:19)


제자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길은 달랐다. 적어도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실 때까지는 그 괴리의 여운이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떠났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는 우리 아들들을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하던 시점에 표면화된 예수님의 길과 다른 제자들의 기대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리는 것에서도 나타났었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다 여종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베드로의 비겁함으로 알지만, 사실 베드로는 성경 전반을 통해서 볼 때 자기 목숨을 구걸하려고 비겁하게 구는 그런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인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열심당원으로서 품속에 칼을 품고 다닌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레지스탕스와 같은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베드로가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스승을 부인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수와 너무나 다른 모습의 예수님의 모습, 채찍에 맞고 있는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었기에 모른다고 했고, 자신이 그렇게 목숨을 바쳐 따라다니며 주님으로 고백한 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자신이 용서되지 않아서 울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베드로의 배신은 유다의 배신과는 전혀 다른 배신이었고, 단 하나의 열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용맹함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오순절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하실 때에 모두들 자기가 예수님을 팔 사람이 아닌가? 근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꼭 집어 이야기 하는데도 알아들을 정신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세배데의 아내의 기대와 같고,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품속에 감추고 다닌 베드로의 기대와 같은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유대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시키고, 백성들이 처한 가난과 병에서 해방시키실 주님으로 오심을 믿었던 그 기대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호로 맞이한 유대인들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뜻과 다른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오늘도 넘쳐나다 못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이 되어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세상에서 성공을 기도한다. 하나님이 또 예수님이 도우실 때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설교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 믿음을 위하여 새벽에도 기도하고 밤 새워 기도한다. 그게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좀 더 고상한 신앙이라 자부하는 신앙들은 얼마나 마음이 갸륵한지 자신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도 걱정한다. 동성애가 세상을 망칠 것이라 걱정하고 이슬람이 세상을 망칠 것이라 걱정한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지 모르니 하나님께서 나서 주셔야겠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나서겠다고 각오한다. 정작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 버리는 것은 하지 않고, 또 자기가 잘났다며 떠드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나님의 경영이 위태하게 되었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제자들의 기대와 같은 것이다. 아니 실은 제자들의 기대보다 못한 것이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과 세상을 사랑하심을 온전히 믿는다면 이 세상이 잘못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신이며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믿을 찐데 하나님 앞에 자기 육신의 공로와 소유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가룟 유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가룟 유다를 배신의 아이콘으로 이야기하는 정도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가룟 유다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 자신은 배신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자기 기대와 약속과 신뢰를 저버린 사람을 가룟 유다라고 칭하는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있는 가룟 유다, 그 가룟 유다가 가룟 유다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하여 제자를 선택하셨는데 어쩌다가 잘못 뽑은 한 명,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내용일까? 하나님의 아들도 제자를 뽑는 일만큼은 제대로 못했다거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기 위하여 작전상 제자 중의 한명에게 사탄의 마음을 심어서 그 뜻을 완수하셨다? 와 같은 것이 가룟 유다의 일의 본질일까? 그러니까 그것이 가룟 유다의 본 모습이고, 가룟 유다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본 내용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룟 유다에 대한 모든 것이 틀리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그것이 다가 아니라면 가룟 유다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 그것은 비단 가룟 유다만의 일이 아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도 같은 배신을 했다. 자기 맘대로 예수님을 규정하고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예수님을 팔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와 같은 마음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모두들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육신의 삶에 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신 주님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대, 자기 맘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규정한 마음과 예수님의 정체가 다르다는 것이 나타날 때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한낱 노비의 몸값으로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자신이 기대했던 예수님과 다른 모습의 예수님이 왜 그 모습인지 알려고 한 차이가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으로 기대하고 믿었던 예수님이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거나 기대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으로 더 알려고 하고, 계집종이 예수와 한패가 아니냐고 할 때, 정말로 솔직하게 ‘저렇게 매 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는 정녕 내가 모르노라’ 대답하는 고백, 곧 죄(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죄)를 고백할 수 있어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온전한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 기대했듯, 예수님이 시험을 잘 치게 해 주고, 부자 만들어 주는 세상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그런 것이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정확히는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았을 때) 어떤 이들은 예수를 버리고, 한낱 종의 가치로 팔아버리고, 어떤 이는 ‘왜 내가 아는 예수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다른가?’를 알고자 하는 돌이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당시 종의 몸값인 은 30에 팔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돈 가지고 오고, 세상의 성공을 가져오는 램프의 요정처럼,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안목, 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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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대로 제자들이 할 것을 부탁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요 13:20)

라고 하셨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신 섬김을 부탁하시고,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서 그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심히 경계한다. 이것은 물론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내가 예수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많이 한 탓에 경계하는 것이 누적되어 그런 면도 있지만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인 탓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가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보자. 그 말씀이 ‘앞으로 너희들이 모일 때는 항상 서로 발을 씻기도록 해라’라는 말씀일까? 그것을 그렇게 받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행동을 따라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성경을 대할 때에 그 말씀을 그대로 행동으로 지키려고 한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수익의 1/10을 헌금으로 내라고 한다. 그런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도무지 1/10의 기준은 뭔지, 또 수입은 어디까지가 수입인지도 알 수 없는 미련한 인생들이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면서 1/10의 기준과 수입의 정의에 대하여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도 그렇다. 열매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 체, ‘예수 믿으니 9가지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열매가 뭔지는 알고 그러는가 싶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니,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니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원망뿐인데도 행동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억지로 하면서 행동으로 그렇게 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된다는 궤변으로 가르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인척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단언컨대 영접이 뭔지 믿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다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함을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개체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 ‘너희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것과 같이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신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섬김으로 서로를 섬기는 이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섬김은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바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은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 이유가 그 이유를 안 이후의 삶을 변화시킨다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섬김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필연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잉테되고 나는 것이며 낳아진 이상 그 생명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기 삶의 이유와 목적과 의미가 된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의 삶을 영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이 되려면 한 사람의 삶이 자신에게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구원자로 영접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전환이 있어야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시려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규정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계명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규정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자기 맘대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듯이 사람을 연단하고 훈련하고 사람이 가진 육신의 한계, 어리석고 부족하고 연약함을 넘어선 공로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사람의 모습을 스스로 부족하다고 또 부끄럽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율법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라고 지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또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규정한 인생들이 멸시하는 육신을 가진 체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죄인이 되고,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공로로는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심으로 보이시고, 또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으로 도 세상의 가치기준을 이길 수 없음을 가시관을 쓰심으로 보이셨고, 또한 세상의 신분이나 권력으로 이길 수 없음을 발가벗음으로 보이신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가 세상의 가치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그 십자가의 모습을 보고 들을 때에,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 자기 삶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성령께서 감동하게 하심으로 말이다. 그것이 성령의 잉태하심인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섬김이 바로 자신이 섬겨야할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고서 또 다른 사람이 그 섬김의 삶이 바로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듯이.


바로 그렇게 될 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가 열려야 비로소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적선을 베풀 듯이 하거나, 또 교회 안에서 신앙적 우위를 스스로 점한 직분을 가진 자나 또 신비한 은사를 가지고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훈계하며 교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듯, 더 가지고 더 알게 되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가지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가지지 못하고 모르는 자들이 가지고 알게 되도록 하는 것은 적선하듯이 하는 것도 아니고, 훈계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다면,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종으로서 주인의 발을 씻기듯이 예수님을 모르고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주인과 같이 섬기고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신앙이 없음을 심판하고, 훈계하듯 하며, 꾸중하고,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며 뭔가 대단한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지 신비한 능력이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두움일 뿐이다. 괜히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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