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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 앞에 조아리기도 하고, 또 섬기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이 수고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대상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섬기는 마음은 섬기는 대상의 바라는 바와 같아야 제대로 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정말로 잘 생각해본다면 그 사건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이 육신으로 살 동안의 문제에 관한 것과 연관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자꾸 언급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육신으로 살 동안의 평안과, 그 평안에 대한 대가로 드린 예물과 공로로 인하여 천국에서 다시 평안하게 산다는 것에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즉 섬김의 대상의 정체성을 알고 그 정체성에 맞게 예수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 있는 자리>라고 하시는 것은 어떤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가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또 예수님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육신의 삶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으로 믿으면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다 거짓말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시각은 <자리>라는 것이 공간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밀이 죽어 밀이 나듯,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열매로 많이 나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자리란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 말씀도 하셨다. 그것은 자기가 볼 때 살아 있는 것, 즉 자기 기준으로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혹은 영혼)은 세상에서의 삶, 곧 육신의 삶을 말한다. 이 생명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적 안목의 표현이다.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에 따라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 즉 육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는 우선 <자리>라는 것을 공간의 문제로 본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만물 곧 눈에 보이고 나타난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 안에서 자리는 언제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교회에 주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더 문제다. 예수님이 교회라는 건물에만 귀신처럼 있다는 생각이니 보이는 것을 본질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을 더 확정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렇다고 쳐도 교회에 육신이 가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또는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밥 먹을 때 기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육신의 행동을 용납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은 또 어쩌랴?


예수님께서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그 밀알로 인하여 많은 밀알이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생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예수님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백 년 전의 사과나, 오늘 우리가 보는 사과나 그 길이 다 같은 것과 같은 것이다. 백 년 전의 사과나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사과나 다 ‘사과’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이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과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사과는 한국에 있는 사과나 미국에 있는 사과나 모두 사과라는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다. 사과라는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고 할 때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자신이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섬김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교회에 가서 청소하고, 또 성경을 읽는 것으로 부족한지 손으로 쓰고, 산에 가서 나무를 뽑을 듯이 기도하고,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전도하고,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교회에서 장로와 같은 직분을 얻어서 그 자격이 없으면 맡을 수 없는 교회학교 부장 자리 하나씩 맡아서 일하는 공로를 섬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 마디로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밀알과 같이 죽으심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육신의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밀알로 죽으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며, 육신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들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 모습이 자신의 운명이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 심령에서 생명의 본성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명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섬김의 삶일 진데 육신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내려놓아진 예수님을 섬긴다면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육신의 어떤 것(돈이나 세상의 지위)이 있어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거짓말인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심령의 생명 그것이 밀알과 같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도 그 생명이 된 사람의 삶,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같은 생명의 집합과 이름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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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 옥합을 깨트린 일이 있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다. 그 때는 유월절이라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을 보자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아주 성대하게 맞았다. 그 환영이 대단했는지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이 서로를 보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이 다 쓸 데 없는 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그런 그들이 불과 며칠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환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것도 한 번도 짐이나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 모습은 ‘호산나’라며 외치는 환호에 집중하다 보면 참 초라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기 쉽다. 예수님의 그 모습은 참 초라한 모습이었다. 다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기대로 인하여 예수님을 크게 맞이하느라 그 모습의 의미를 잊었던 것이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시나 지금이나 나귀는 짐을 실어 운반할 때 이용하는 가축이다. 나귀의 목적은 고기보다 인간의 짐을 나르는 것이 더 우선되는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섬기는 동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나귀를 예수님께서 타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이제 자기들을 해방할 메시아’로 또한 왕으로 환영하고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를 타신 것이다.


예수님을 열열이 환호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신 것을 환호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환호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하고, 또 병들고 가난한 삶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을 있음을 오병이어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에서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낼 왕으로, 메시아로 환호하고 영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마음 혹은 목적과 같은 것이다. 다들 세상에서 예수님을 힘입어서 이긴 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힘입어서 자기가 가치롭게 여기는 일들을 이루고 얻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적인 가치까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세상의 권세에 져서 심문받는 꼴이 되고 나니 사람들은 분노했다. 자기들의 기대를 저버린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친 것이다. 차라리 강도를 살려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 기준으로 보고, 자기 기준으로 열광했었던 것이다. 정말로 눈이 바로 달렸었다면, 자기들의 기대를 이루어줄 왕을 맞이하려는 것이었다면, 황금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이를 맞이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섬김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주님을 자기들의 기준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이 정치적인 왕으로서의 예수, 민생을 해결할 신적 능력을 가진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기대하고 자기들의 기준으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환영했듯이 지금도 예수님을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자기들 맘대로 규정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규정하지 않았다면, 빌라도의 뜰에서 매 맞는다고 죽이라고 외칠 필요가 없을 테고, 예수님을 그런 신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기도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해서 환호하며 환영하기도 하고 또 지금 믿고 있기도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셨다. 다시 말해서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때껏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는 하나님의 의의 섬김을 보여주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 해결도 아니고, 정치적인 왕이 되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보이신 곳은 십자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또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행동으로 말씀으로 보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서 정치적 해방,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메시아로 인식했다. 예수님의 겉모습만 본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만 본 것이다. 그래서 오병이어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에 ‘기적을 인함’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신을 깨트리고 그 안에 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향유 옥합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버리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자꾸 형식에 관해서, 눈에 보이는 기적과 같은 것만 보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육신을 옥합과 같이 깨트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이다.


그랬더니 처음으로 예수님의 기적이나 육신의 어떠함으로 인함이 아닌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온 것이다. 바로 백부장의 고백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았다는 것이다. 즉 육신이 되기 전, 아니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깨어진 옥합 밖으로 향유의 향기가 날리듯이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 안에 있는 것임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아닌 육신 안에 있는 것임을 아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다. 이는 육신은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것은 다 그 안에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한 유대인들과,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앙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섬김이란 바로 신앙이 없는 이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이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눈에 보이는 세계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할 때, 그렇게 죄인이 의인을 죄인 만들려고 하는 그 주장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섬김인 것이다. 그 섬김이 없다면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불러 눈에 보이는 세상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섬김은 나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생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으로 취급 받는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의롭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인데, 그것을 나타내심에 있어 ‘내가 하나님이니 시키는 대로 해!’가 아니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의에 순종해서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섬김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의에 순종한다는 것은 곧 죄인이 되고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된다는 것은 예를 들어 경제적 관점으로 보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보면 몹쓸 사람이 되는 것이며, 세상의 법률로 볼 때는 죄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되는 자리와 상황에 닥쳤을 때에, ‘어디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이러냐?’가 아니라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서 옥합이 깨어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섬김이고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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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성경대로 사는 것’,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과 같이 다양한 것들이 있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시간표의 과학, 수학, 영어, 국어와 같이 다양한 과목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어려워진다. 이런 모든 것은 사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의 다양한 모습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예수님이 가지셨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하나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생명이 안에 있으면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도 같은 생각이시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 당연한 이야기고,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만드신 창조주의 성품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생명이 가장 귀하다면, 예수님 당시 처녀들에게 목에 걸고 있던 향유 옥합은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었다. 사람도 옥합 같은 육신 안에 향유와 같이 담긴 영혼의 정체성 그것이 더 귀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안에 있는 정체성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안에 담아 둔 정체성, 곧 삶의 목적과 무엇을 귀한 것으로 여길 것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과 같을 때 진정한 향유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생각할 때 아무리 귀하다고 여겨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귀하지 않다면, 그것을 옥합을 깨듯 육신의 수고를 들여서 표현해 낸다 해도 오히려 악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담긴 것이 향유와 같이 귀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관과 동일할 때 비로소 향유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마리아가 깨트린 향유가 가룟유다에게는 낭비(악취)로 예수님께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다 전해져야할 향기로 여겨졌던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마리아가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장사를 기념했다고 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향유와 같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고 그 귀한 것이 육신을 소모해가면서 향기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때 사람 안에 있는 향유와 같이 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존재의 이유임을 아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옥합을 깨트리듯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니 깨어진 옥합 안에 있던 향유가 방안에 퍼지듯이 온 세상에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이기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일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전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자리에서는 이 마리아의 사건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 옥합이 깨어지듯 육신이 소모되고 수고하며 모두가 자기가 옳다 하는 사람들의 의 앞에서 죄인과 같이 죽어지는(깨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답시고 자기 기준으로 늘 복음을 전한다. ‘내가 예수님을 아니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식이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의 말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망조가 들 듯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은 복음을 가진 자의 방법과 생각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지 않은 자가 생각하는 대로 복음 가진 자를 대하고 죄인 취급하고 뭘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그것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옥합이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 귀한 향유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 귀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무엇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얻은 것, 그것이 사상이든 재화든 심지어 신앙생활의 공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 어떻게 귀한 것이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제쳐 두어도 ‘존재의 신께 소유와 공로를 드림이 정말 하나님께 귀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 또 40일 금식기도와 같은 신앙의 공로와 같은 것을 하나님께 향유와 같이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그 목적을 표현해 낼 때 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폰으로서의 기능이 잘 될 때 귀한 것이지, 못 박는데 잘 된다고 귀한 것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무엇이 향유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향유는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을 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무리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충만하여도 그것을 옥합을 깨트리듯 자기 육신을 소모하고 죄인이 되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그 섬김이 없다면 향유도 아무 것도 아니고, 옥합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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