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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었다는 것을 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것의 해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지만 다만 사람들이(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중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 되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지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 것은 이때 시작된 일도 아니고, 이때만의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일, 곧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거의 마지막 촉매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시점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다음에 확정이 되었다는 것은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것과 예수님이 죽으심을 당하는 것은 나름의 연결이 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예고편이라고 할까?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는 “아무나”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 연관성의 농도가 낮아 보일지 모르지만, 나사로가 베다니에 살았다는 것이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한다. 그 당시에 베다니라는 동네에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천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법과 기준으로 볼 때 패배자요 죄인이요 빚진 자(주기도문의 죄가 debt 곧 빚임을 기억)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삶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세상의 가치 앞에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 살고 있다. 사는 집이나 입는 것 그리고 자동차와 같이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삶의 수준, 다시 이야기해서 세상에서 선이라 혹은 이긴 것이라 평하는 기준을 엿볼 수 있는 것들에 신경 쓰는 것이 그렇다. 예를 들어 집에 쓰는 그릇 하나를 사도 ‘손님 오면 꺼내 놓기 좋은 것’으로 사니 말이다.(더 우스운 것은 그렇지만 집에 사람이 오는 것은 다들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외모와 외식(外式)에 대해 자의든 특히 세상의 경쟁이라는 것에 실패하는 타의에 의하여 매겨진 자기 자리를 인정하는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 정말 비참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가 되어 버린 돈에 관해서 본다면, 신용 불량자가 되면 불편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어지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나사로는 그런 삶을 살게 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경제적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은 그것이 안 돼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실은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두다 인간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은 부끄럽고, 어떻게든 연단하고 훈련(바벨탑을 쌓을 때 흙에 볏짚을 넣고 굽기도 한 것 같이)해서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선이며 의고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세상의 가치관이 볼 때, ‘도무지 너 같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그것도 모자라서 매일 죄인들과 지내고, 또 안식일은 전혀 지키지 않는 네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수용하신 것이다.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러지 않고, 이 육신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평생을 수고한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으려 오히려 사람을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께 가서 어떻게 좀 해달라고 기도하고 떼를 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그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난리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셨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의 종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주신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되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때로 사람들의 소리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의도하신 목적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실 때 그 때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하신 바를 이루기 위하여 이 육신의 일을 돌보시기도 하시는 것이지, 이 육신의 일을 돌봐주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잘 도우시는 분인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기려 한다. 이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의 가치관 안에서 볼 때, 병자, 세리, 창녀는 늘 죄인이어야 한다. 종교적으로나 세상적으로 그들이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 가진 삶은 부족함뿐이라서 그것을 극복하려면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종교적 가치관과 세상적인 가치관이 전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죽여 버린, 그러니까 사회적인 매장 시켜버린 동네의 나사로가 더욱이 육신으로까지 잘 죽어 있는데 이를 살려내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이 사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은 부족하니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하듯이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살아야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근간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들의 그 선택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 된 것이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이 죽음으로 민족(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된 것이다.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는 의를 가졌기에 볼품없는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육신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성품과 형통을 나타내는 존재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하신 것,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이는 이 육신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니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존재다.”라며 살리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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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인데, 십자가를 마치 기독교의 권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순 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을 전도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오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모습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주 예를 드는 것이지만 다시 이야기 한다면, 서울역에서 전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이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할지 모른다. 하지만 방법은 자기 기준이다. 그 간절한 마음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더 있고, 계시가 더 있다고 스스로 생각이 들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그냥 가서 이야기하고, 심지어 책망하고, 뒤에서 욕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하기에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라고 포장해서. 하지만 이런 모든 작태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처음 개시 되었을 때 한국 방송사 기자가 북한 여자 안내원에게 ‘해수욕을 갔다 왔느냐?’ 물었더니 ‘갔다 왔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었더니, ‘묘향산에 갔다 왔다.’고 해서 뉴스가 된 적이 있다. 해수욕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해야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참고 신념(이것을 믿음이라고 대부분 착각한다.)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들었는데, 또는 읽고 보았는데, 또는 그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보았는데 자기 마음에 그것이 자기의 정체성이요, 자신의 존재 목적이요, 이 육신을 가지고 저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삶을 주신(창조하신) 목적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그 깨달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삶의 모든 것으로 표현되는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서 그 생명의 본성에 의하여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이상하게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자기의 자리처럼 늘 자기 삶의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런 사람이 서울역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살 찌푸리게 하는 방식으로 전도를 한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다른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그런 삶을 보면 조롱한다.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관으로 언제나 패자를 만든다. 그런데 그것을 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비웃던 그 사람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때 밑에 있었던 백부장이 바로 그렇다. 당시의 군대 편제에 있어 백부장은 실세였다. 천부장 만부장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백부장이 모여야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십자가 밑에 있었던 백부장은 세상의 실세의 표현이고 대변인이라는 것이다. 그 백부장이 자기의 부하들에 의하여 발가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을 보다보니 ‘아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의미가 자기 안에 있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난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를 죽음에 내 몰지만, 그 죽음을 보고서는 자신이 죽인 사람, 자신이 비난 했던 사람, 그래서 세상을 어떻게 살겠냐고 조롱했던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 삶,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죽음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바로 이런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용을 쓰고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믿고 있다 해도 나중에 주님께서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노라.’하실 뿐이다. 이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았다. 살았다는 것은 그 생명이 있다는 것이니까 그것이 거듭남이고, 부활하려면 죽어야 하는데 그 또한 생명이 있었어야 죽는 일이 있는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은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망 가운데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빛을 만나고, 생명이 그 안에 잉태되고 자라서 육신으로 사는 모든 삶을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 곧 세상의 가치관, 또한 심지어 신앙에 관해서라 해도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앞에서 늘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어 당하는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산 것으로,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시기에 살리시는 것,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부활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이 없으면 거듭남도 부활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삶에서 태어남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이니 거듭남이 없는 것이고, 그 거듭남은 세상의 가치관, 신앙적으로 자기가 옳다는 가치관 앞에서 죽어 나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니 죽임을 당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진정으로 산 것이기에 살리시는 것, 그것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 거듭남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 다른 것 이야기 할 것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지,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고 취직하고 결혼하는 문제에 있어 겪는 난관을 해결해 주시고자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런 일에서 겪는 난관은 모두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 겪는 일이지, 하나님께서 돕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부활 신앙은 분명히 귀한 것이고, 놀라운 은혜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에는 없는 것이라는 것도 맞다. 하지만 부활은 다른 종교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처럼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부활신앙, 그리고 거듭남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아는 삶, 그 생명 있는 삶에 관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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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 거듭난 삶의 죽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20. 13:25 Writer : 김홍덕

거듭난 삶이라는 것은 어떤 이단에서 부각시켜 사용하다 보니 가끔은 좀 민감한 단어이기도 하지만, 거듭났다는 것은 결국 그 삶이 예수님과 같은 성품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기에 피가 같고 유전자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피와 살을 먹은 것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거듭났다는 것을 단순히 죽으면 천국에 가는 자격을 얻은 것이나, 아니면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면서 뭔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 주시기도 하는 자격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지만 같은 개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것을 영어적인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은 the Christ이시고 거듭난 사람은 a christ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표현은 이 불로그에 자주 언급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자기 육신이 살 동안의 문제 해결과 죽어서 남다르게 천국에 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으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에 겪는 일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다. 누가 차를 기름 넣어주기 위하여 사고, 컴퓨터를 전기 넣어주기 위하여 사겠는가? 그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관여하시는 것은 우리의 문제 해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살 수 있도록 전기나 기름을 공급하듯 육신의 일을 보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지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사람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가졌다면 다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같은 인간 유전자를 가졌다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사람도 다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양한 삶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이다. (그런 다양성이 필요 없다면 하나님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그만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신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예수님의 탄생, 곧 삶이 시작된 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다 그래야 한다.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로고스(뜻)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성령의 잉태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그것이 자기 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이 자기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성탄이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일이고 자기의 사건이고 자기의 인생이며 삶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었을 때 비로소 거듭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사건 없이 교회에 다닌다고, 아니면 산신령이나 부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기 삶의 문제를 가져와서 기도하고 있다고 거듭났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개념을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만들고 수료한 다음 자격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은 더 황당하지만)


그렇게 거듭난 생명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산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로 느끼지 못하는 문둥병을 고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는 삶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되고 그렇게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면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이 깨닫듯 그 마음에 그 삶이 성령의 감동을 주어 다시 그 사람도 그런 삶으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삶에는 죽음이 있다. 바로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이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을 가진 삶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늘 죄인이 되어 죽어 나가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도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삶이라는 것은 늘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삶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누군가는 치약의 가운데를 짜서 쓴다. 가족과 같은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서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이 불만인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은 끝에서부터 짜서 사용하는 사람이 양치질 할 때마다 치약의 끝을 눌러서 배를 불룩하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편리를 위하여 자기 뜻대로 한 것에 대하여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것은 편리를 취한 사람 앞에 패자가, 또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그렇게 수고하고 섬겨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마음에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되어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런 삶, 그렇게 늘 남이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것 앞에서 육신으로 더 수고하고, 더 희생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고, 이 육신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자기 이익을 구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고, 나의 의가 죽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죽음,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삶에 있는 죽음이다. 이 죽음이 의미가 있는 것은 부활이란 바로 이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죽음이 없다면, 십자가의 삶이 없다면, 사람들과 세상이 자기 가치관을 주장하는 것 앞에서 자기 의가 죽어서 수고하고 죄인 되고 희생하는 죽음(삶)이 없다면 부활은 언감생심 범접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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