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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바란 축복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3. 25. 19:56 Writer : 김홍덕

앞에서 포스팅한 글에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한 사람과 다툰 일은 이상한 것이 많다고 했다. 가장 먼저는 무엇으로 인하여 싸웠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앞에서 설명을 했고, 다음으로는 사람과 싸웠고 환도뼈를 맞아서 야곱이 진 것과 같은 싸움이었는데 야곱을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주었다는 것에서 야곱이 이긴 싸움이 되었고, 가장 이상한 것은 사람과 싸웠는데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면서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으로 <브니엘>이라고 이름 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다. 하지만 야곱이 싸운 상대는 분명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했거나 하나님이 사람으로 야곱에게 오셨다는 것을 야곱이 알았거나 한 것이다. 물론 감으로 찍어도 답은 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왜 그런지를 알고서 그래야 한다. 그러니까 왜 사람을 만났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기는 것을 아주 금기시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고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구사일생의 도움을 받았을 때 가끔 비유로 그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야곱과 같이 그 땅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 만난 일을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말하거나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야곱은 그 형 에서를 만났을 때도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했다.(창 33:10)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로 가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과 같이 대했듯이 사람을 만났는데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 것 같이 사람과의 만남이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고 하는 말씀은 여기에만 있는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야곱의 이 모습이 가진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이 사람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났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이미지 곧 형상이 나타났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축복중의 축복이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곱이 축복해 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한 사람을 놓아 주었다는 것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고, 사람과 다투었는데 하나님을 만났다고 그 땅의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은 야곱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발견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이 사람과 다투었는데, 사람을 만난 만남이 하나님을 만난 만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야곱이 바라고 바랐던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겼다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 이긴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사람과의 다툼을 접어 버리고 항복할 정도로 사람이 하나님과 다투어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와 같은 것일까? 아니면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용기일까? 


사람이 하나님께 얻을 수 있는 가장 간절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하나님께 얻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때로 돈이나 명예에 목을 매고, 또 때로는 자식이나 자기가 하는 일에 목을 매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이 자기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그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과 만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야곱이 겨루던 사람을 놓아 주었다는 것, 하나님을 놓아 주었다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기에 그랬기에, 야곱이 바랐던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만났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사람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났더니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으로서는 자기 존재의 이유를 겨루던 사람에게서 얻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이김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우리의 형상(image)>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것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예수를 믿고,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나누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과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치는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적어도 저렇게는 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성경을 거꾸로 읽음만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야곱이 사람을 만나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기의 일이 바로 축복으로 알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노라 한다면, 가장 큰 축복이 바로 자신을 볼 때, 또 자신이 이야기 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말씀 그리고 삶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며, 야곱이 원했던 축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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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강의 야곱과 겟세마네의 예수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3. 25. 18:36 Writer : 김홍덕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돌베개를 하고 자다가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하는 장면은 유명한 말씀이다.(찬송가 가사에도 나온다.) 야곱은 14년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수고하여 얻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세 떼로 나누어 형 에서에게 보내고 자신만 남아서 한 사람과 싸우게 된다.


사람이 싸움에 임하게 되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냥 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사람과 싸웠는데 그 싸움이 끝나고서 야곱이 그 땅의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싸움은 사람과 하고, 결론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분명 야곱이 상대에게 맞아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결론은 야곱이 이긴 싸움이 되었다는 것도 상식적이진 않다.


지금 야곱의 형편은 이렇다. 장자의 명분,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정체성의 자리로 가려는데, 그곳에 가려니 육신이 죽게 생겼다고 느끼고 있는 그런 상황이다. 그렇다는 것은 상대는 어떤지 몰라도 야곱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걸린 상황이라는 것이다. 즉 야곱에게는 이 싸움이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이고, 그 문제를 가지고 싸웠다는 것은 그 상대가 야곱의 삼과 죽음에 대하여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 이 싸움은, 한편으로는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야하는 장자의 명분으로 인한 자기 삶의 여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신으로 일구어낸 모든 것과 심지어 자기 목숨을 장자의 명분으로 인한 여정 때문에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즉 야곱에게 있어 이 싸움은 육신의 것을 선택하여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선택하므로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가진 것을 하나씩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형에게 다 보내고 마지막으로 자신만 남았지만,  그 육신마저 하나님이 자기 조상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면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으로 인하여 마음에 일어나는 싸움, 그것이 바로 야곱의 싸움이다. 야곱이 에서에게로 가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은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이 얍복강에서의 싸움은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에게로 돌아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심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지시한 땅, 

 곧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가려 함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십자가로 가심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에게 돌아감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형이 야곱을 죽이려 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함

 얍복강에서 어떤 사람과 싸워서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졌지만 (하나님을)이긴 자가 됨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으나, 결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

 자신이 에서에게 바친 모든 것이 다시 회복 됨

 부활하심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고 우리의 사건이며 우리 신앙의 여정이고 우리의 정체성이며 우리 삶의 목적이고 의미며 본질에 관한 말씀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있다 보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면 자기 눈에 보이는 것, 본질이 아닌데 본질로 스스로 귀하게 여겼던 것을 잃을까 늘 걱정하고 마음 안에서 다툰다. 사람이 남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시키는 것조차 짜증내는 것은 그런 것 하나에 까지 자기의 편리와 가치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소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을 심히 기만하는 것이 있다. 아니 많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러니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를 가난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타락한 교회들이 상용화버전으로 바꾼 것이 바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본질을 얻으러 가는 여정이라면 눈에 보이는 본질이 아닌데 본질로 여기는 것을 다 버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온전한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니 뭐 좀 달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가진 모든 것을 다 자신을 죽이려는 에서에게 바치는 것과 같이, 또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모두 벗어버리신 주님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교회를 위해서는 적어도 이것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서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일 뿐, 믿음도 십자가의 삶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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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있는 곳이나, 또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한 곳이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는 것은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이 명하신 땅이기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지면의 어느 좌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땅은 흙이고, 사람이 흙이며, 하나님께서 정한 땅이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은 유월절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상태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과 야곱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에서가 지키고 있는 본토 아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같은 모양새라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한 땅,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하신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 그것을 야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정확히는 십자가로 가시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십자가야 말로 인간 정체성을 바로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리,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 또한 십자가인 그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에 가는 것에 있어 가지고 가야할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또한 야곱의 여정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돌아갈 때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서 형에게 차례대로 보낸다. 이것은 일면 간사한 모습 같지만, 실상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야곱의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으로 가는 길에는 자신이 육신으로 이룬 것,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 세력에게 다 바치고서 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육신은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신분과 정체성은 이 땅에 가장 쓸모없는 사형수라는 신분으로 돌아가시는 것과 같이, 야곱 또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에게 다 바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간사한 모습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잃지 않으려 조금씩 버리는 것임을 야곱 또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에 가는 길에는 아무 소유를 가지지 않고 가야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소유와 공로를 의(가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안에 있느냐 아니냐에 관심이 있으실 뿐,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느냐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야하는 관계와 그냥 가기만 하는 관계가 있다. 그냥 만나는 것 만으로 충분한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물론 그 때 아들이 아버지께 어떤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풍습일 뿐, 아버지라는 정체성이 아들에게 뭔가를 받을 때 비로소 아들로 인정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직장 상사는 언제나 성과가 있는 것, 소유와 공로에 대한 결과를 가져가서 만나야 하는 관계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갈 때 빈손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뭔가 라도 들고 가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께 기도한 실적이라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만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만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기도의 공로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찾아 왔을 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아! 네가 나의 뜻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느냐?’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연약해서 늘 감추고 개선하려는 그 육신을 가지고서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분이시다. 즉 ‘공로와 소유가 네게 의미가 있느냐?’를 물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그것을 의롭게 여기는 신으로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 자리로 간다는 것은 결국 소유와 공로가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할 본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바로 아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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