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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 거듭남과 부활(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9. 12:24 Writer : 김홍덕

2. 거듭난 삶


거듭남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상태인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는 육신의 생명, 곧 목숨이 살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살았다 혹은 죽었다 하는 것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에게 기대하는 관계, 그것이 회복되고 유지되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창조주의 뜻을 넘어서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야를 만나신 하나님은 바위를 가르는 바람이나 돌을 사르는 불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적인 능력 범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미세한 음성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육신으로 접할 수 있는 접점을 무한 상회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인데 그런 위대한 능력을 사람이 소화하기를 바라시거나 대신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이 있고,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창조의 목적이 있다.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것, 그것이다.


이 육신은 연약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생 전체를 소비한다. 그리고 얼마나 더 육신의 정체성을 극복했는지가 바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가늠 하는 열쇠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미완이나 부족하게 만들고, 살면서 얼마나 극복하는지에 따라 천국에 들어오게 하시겠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부족함이나, 극복해야할 것이나, 단련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이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께 ‘육신이 뭔가 하려는데 안 되니 초인적인 능력으로 나를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식이나 다른 사람이나, 또한 사람들이 도모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것이 보통 이야기 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발버둥에 불과할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육신을 가진 삶의 정체성을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반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은(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권세가 합당한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의 법과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한다. 바로 이런 모든 상태,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상태에서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으로 보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정체성 곧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게 되는 전환,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 거듭난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다른 것이 없다. 거듭났다고 갑자기 사람이 밥을 안 먹어도 된다거나, 하늘을 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방언을 받아야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개가 웃을 일이다. 자신의 삶이 거듭난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성경을 읽고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 지금 내가 좀 하기 싫지만 그래야 하는가 보다 싶어서 하고 있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을 하는 이유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난 것은 생명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육신이 같아도 그 육신을 움직이는 삶의 이유가 달라진 것이다. 유전자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자기는 그러기 싫지만 그래야 된다고 하니 하는 것은 그 어디를 봐도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그 몸을 제어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속에서 생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겉만 칠한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듭난 것은 오히려, 마음에는 성경처럼 살지 않으려는 생각이 들어도 어느새 그렇게 하고 있는 삶,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그러고 있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자식들이 아무리 아버지 같지 않으려 해도 자기 마음 안에서 아버지와 같은 본성이 나오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거듭남이 생명에 관한 것일 찐데 삶의 이유와 사소한 행동 하나의 이유와 의미가 속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닌 것이고, 그러니 그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삶은 성경을 지키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자신의 사는 모습과 자기 안에서 나오는 마음들이 성경대로인 것을 인식하는 그런 삶이다. 억지로 하고, 각오해야 하고, 노력하고 있다면 애석하지만 그런 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이다. 또한 거듭남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사람 밖에 있는 것, 곧 형식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몇 월 며칠이라는 형식에 관한 시간 개념으로 그것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일시가 언제다.’는 식의 표현 또한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런 모든 것은 거듭남, 아니 기본적으로 생명의 개념을 모르는 것이다.


이 거듭난 삶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생명)이 자기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한다. 이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명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준에 의하여 

하나님이 아들이 아니라는 심판을 받아 

죄인이 되어 죽으신 사건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같은 이치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같은데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물고기가 어부에게 잡혀서 땅에 올라오면 사람이 되지 않듯 살아가는 자리, 살아가는 시대와 모양이 아무리 달라도 유전자가 같으면 같은 법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어떤 일에 대해서라도 더 밝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주장하는 것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섬김과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을 배우는 학생이 수학박사가 이야기 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며 무시한다고 치자. 그럴 때 수학박사가 분명히 자기가 맞게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당하면서 그 학생이 스스로 알 때까지 섬기듯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의 자세는 어떤가? 한 마디로 ‘나는 하나님 믿어서 천국에 가는데, 하나님 믿지 않아서 사는 것이 부정한 너희들은 도무지 뭐냐?’는 식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서울역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겠는가? 정말 전도하고 싶다면, 또 내가 믿는 것이 옳다면 그 옳다는 것을 아는 이유로 모르는 이들이 알 때까지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주신 이유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습하는 교회에 대한 비난에 목사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잘 몰라서 그런다.”식의 답변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모르는 아니,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삶이나 그런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어떻게 거듭남이 있겠으며, 거듭난 삶이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거듭난 삶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으로 돌아서므로, 그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안에 있어서 오히려 그 목적을 잊고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예레미아의 마음과 같은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모양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의인(더 아는 사람, 더 밝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 죄인(모르는 사람, 패자, 가난한 자)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는 삶 그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거듭남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오직 이 하나뿐이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은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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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 거듭남과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8. 13:07 Writer : 김홍덕

1. 거듭남


신앙의 여정은 ‘거듭남’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은 십자가의 삶을 살고서 부활에 이르는 여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거듭남도 죽음 가운데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이고, 부활도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인데, 뭐가 다른 것일까?(이 차이를 생각해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명확히 하려면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생명과 죽음에 대한 개념은 육신이 숨 쉬고 살아 있다면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신이 생명을 잃은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은 사람(즉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삶이 주어졌고, 시간이 흘러 그것을 인지한 사람의 삶)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을 산 것으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죽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자신이 살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인 뭔가를 만질 수 있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기 집에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은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존재하게 된 이유,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이 사람임을 인지했다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보다는 “어떻게?”에 삶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존재의 이유는 무시하고 존재한 상태만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굴러가지는 않고 그 모양만 유지하려는 것처럼.


이 블로그에서는 항상 <생명이란 목적을 이루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필자의 독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기본 개념이다. 사람들도 기능을 다하고 있는 자연을 보고 <자연은 살아 있다.>라고 하고, 시각이 맞는 시계는 ‘살아 있다.’하며, 어떤 물건이라도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으면 ‘맛이 갔다.’ 혹은 ‘죽었다.’고 할 뿐 아니라 버린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진 ‘살았다.’와 ‘죽었다.’의 개념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개념을 가진 이유는 바로 생명과 죽음을 그렇게 보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육신과 같은 실존의 기능성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존재의 목적에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기준이다.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기능이 존재 목적에 수렴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고, 죽음으로 여기시는 것은 육신이 살았다고 해도 그 육신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좇아 살지 않는다면 육신의 기능과 호흡의 유무와 무관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또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육신으로 생명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모른 체, 눈에 보이는 것을 삶의 본질로 알고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삶을 소비하고 있다면 죽은 것이다. 심지어 육신의 삶을 해결하는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죽은 삶이다. 오염되어 수술에 사용할 수 없는 칼을 의사가 들고 있다고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을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를 보고서 깨닫게 되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창조 목적을 아는 삶이 시작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심령 안에 자리하게 되는 것을 성경은 씨를 심는 것,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것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 안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잉태하심이다. 생명이 속에서 잉태가 되려면 뭔가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 씨가 땅에 심기듯, 결혼한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몸에 받아들이듯 사람이 뭔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일을 듣고 보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으로 깨닫게 하는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는 이도 있고, 도덕적 성자로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인 것이다.


그렇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육신으로 사는 자기의 삶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전에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삶을 살던 것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이다. 그러니까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던 자기 삶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같은 육신, 같은 모양이지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 사람이 볼 때 너무 연약하고 부끄러운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으로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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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 돌을 옮겨 놓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6. 11:1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가 장사되어 있는 무덤 앞에 가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방식은 굴에 시체를 넣고 돌로 막는 방식이었다.) 그리고는 무덤을 막아 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만류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고 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하시니 나사로가 수건에 쌓인 체 걸어서 나왔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 장면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돌을 옮기라고 하셔서 옮겼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돌을 옮기신 것이 다르다는 것 정도 외에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나사로의 경우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더 공감이 되는 사람이니 말이다.


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늘 율법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돌에 새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인다. 그것은 율법을 어겼기에 율법으로 심판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탄이 말하기를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율법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해 보라는 의미이다.


돌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은 사람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먹을 수도 없고,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 율법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나왔을 때 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늘 율법의 기준과 논쟁을 하셨다. 그리고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다.


그 논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사람을 향하여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메시아라고 하신 것 그 모두가 다 율법과 예수님의 논쟁이었다. 유대인들의 가친관 안에서 그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율법의 조문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세리와 창녀와 문둥병자들과 먹고 마시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나, 생명은 없으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스스로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법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사람이 부족하니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먼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사람의 모습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만드신 사람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정의한 것이 죄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람이 행동으로 행한 공로로 의롭게 여기시는 신으로 치환하여 모욕한 것이 죄며, 마지막으로 사람의 겉모습, 곧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여긴 것, 그것이 죄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보다 더 의로운 것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율법이 완성된 존재라는 것을 알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이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사탄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두움이고, 빛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앞에서 포스팅 한 글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남매들을 사랑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베다니라는 죄인들의 동네에 살고 있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베다니나 나사렛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들의 동네다.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와 같은 이들이 사는 곳, 문둥병자가 있고, 온갖 병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하고 더럽고 죄인의 동네였다. 즉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다 패자들이요, 죄인들이요, 율법의 기준으로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는 죽은 자들의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 예수님께서 늘 머무셨다. 왜냐하면 그 곳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으로 심판 받아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은 율법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육신으로 지켜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을 심판하면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베다니와 같은 죄인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게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머물렀고, 나사로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율법, 돌로 상징되는 그 율법으로 무덤을 막았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나사로가 시체인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 시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난다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죄인이 되어 죽은 사람이 된 자, 그리고 그것은 시인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것, 곧 부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율법의 관점, 세상의 가치관, 그리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보는 안목과 같은 것으로 볼 때 죽었다고 할 수 있고, 패자고,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오히려 사람이란 그런 세상의 관점 앞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나, 자신들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의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다 보니, 세상의 법으로, 율법의 가치관으로 죽은 사람, 돌에 갇힌 사람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다 보니 죽은 자가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죽은 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것을 확정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의 삶을 죄인으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며 율법을 지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육신을 입고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놋뱀과 같이 들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순종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만든 사람의 모습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부끄럽고 죽어야 마땅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말씀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고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으로 사는 자기 삶을 늘 부인한다. 항상 육신 이상의 능력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러다 안 되면 교회나 신전을 찾아서 신비한 능력을 구하고, 자기 육신으로 이루지 못할 본질도 아닌 세상의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담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로 가둔 율법이 자기 가치관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나사로는 자기 정체성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정한 자기 정체성, 곧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보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다니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모습, 모든 인생에게 기대하는 모습인데, 그를 돌로, 율법으로 가두어 시체로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자기 삶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과 부활은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에 만드신 목적 안에 있고, 그 목적을 표현할 때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시간을 알려고 산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을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처럼. 그 생명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가둘 수 없다.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이 어떻게 사람이 볼 때 죽어야할 기준 아래 죽은 자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고, 예수님도 돌에 갇히실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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