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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므로 유대인들의 공분을 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거나 또는 예수님이라고 하면 바로 이단시 한다. 지금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지금 이 시대의 누가 자신을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사실 문제가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있었고, 지금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나, 오늘 누가 자신을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의 문화적 충격은 거의 같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 당시가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때는 종교가 정치, 사회와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가 성경을 읽고 자신을 하나님 또는 예수님과 하나라고 하는 것은 합당한 것인가? 그 문장 자체만으로 답한다면 그것은 “Yes!”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예수님을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목적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싶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 아니라, 아무리 발악하고 주장해도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신 의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콜라가 든 병을 보고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이단의 교주들이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하면서 타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은 가졌으나, 그것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많은 교회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단을 나무랄 자격이 있는지는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든 피조물이다. 콜라병이 콜라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 같다. 콜라병은 콜라가 아니지만 안에 콜라가 있는 동안은 늘 콜라로 통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과 의가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인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하나님과 같이 대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신 시편 82:6절의 말씀과 같이 사람을 신(하나님)이라고 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내가 말하기는 너희는 다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시 82:6)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시자 거세게 저항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모든 것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인 것인데 무엇을 인하여 돌로 치려 하는지 반문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 10:38)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은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하신 일은 믿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일은 다 아버지로 인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만 믿어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 것이고 하시면서. 이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일들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으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일을 믿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면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확신과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임을 아는 것과 같이 믿는 믿음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외칠 수 있고, 그렇게 외치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보여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외식하는 자의 안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는 눈 떤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이 시작된 시작이고, 하나님 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려 한다면 이 육신의 삶이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육신의 삶이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육신도 연약하고 부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연약함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인생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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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믿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그 분들을 대하는 것이기에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의 문제나 해결해 주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이유,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가장 온전한 이유는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마땅한 믿음의 이유는 오직 하나,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도 또 왜곡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인생의 문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 역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왜곡된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원죄로 규정하신다. 이런 문제의 근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안목이 육신의 삶이라는 현상계에 맞춰진 까닭이다. 이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형식이기에, 이렇게 표현된 근본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기에, 그 눈에 보이는 세계에 일어난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또 그러다보니 그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 생각하며, 그런 이유로 육신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이 진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어긋난 생각의 궤는 단 한 가지를 부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이 가진 이 육신에 대한 개념, 그것이다. 이 육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준으로 보니 이것저것 다 부족하고 연약하여 부정하는 것에서 모든 것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도.


이러한 생각은 모든 죄의 근본이다.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인간의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원초적인 죄악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거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셨는데 사람은 하나님 거하시려는 육신을 가진 자기의 삶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그 안에 자신들이 생각할 때 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영광과 공로와 소유와 더 강한 육신의 능력이 가진 승리를 채우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사람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교회에 와서 떼를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라며 자신이 하는 일을 지지해 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거나 또 자신과 경쟁하는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면 이단이라고 하고 불경스럽게 여긴다. 바로 그 모습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유대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면 놀라기나 할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은 너무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이 육신을 가진 삶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육신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은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나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과 같이 천둥 번개를 일으키고,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걷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눈에 보이는 삶에 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에서 사람이 겪는 문제를 이겨내고 해결하고 넘어서며 컨트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한다고 자기 삶의 문제를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하려 하겠는가? 그냥 열심히 살지.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고 또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다. 하나님 노릇, 예수님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내용이 되어 형식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이 되는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잊었다면 몰라도 그것을 믿을 찐데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사람으로서 최고의 영광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것, 곧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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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즉 목숨은 결국 소진 된다. 그 목숨을 버린다는 개념에 대한 일반적으로 고착화된 것은 단숨에 버리는 것만을 생각한다. 신앙 안에서 본다면 순교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고, 자기 맘대로 죽기도 힘든 이 삶이 소진되는 것, 결국 죽는 것은 목숨이 결국은 버려지는 것이다. 다만 이 삶에 대하여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만 남는다.


사람들이 가진 목숨은 일생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일생이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삶이 주어졌으니 그저 살고 있다. 그 안에서 누구는 좀 더 열심히 또 성실하게 살고, 또 누구는 체념적으로 살기도 하고, 또 누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살기도 한다. 삶의 모양보다 먼저는 왜 사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나서 삶의 모양이다. 그리고 나면 모양은 목적에서 나온다.


목숨은 어차피 버려진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 그 목숨이 자신에게 왜 주어졌는지를 아는 이는 목숨에 대한 권세가 있는 것이다.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목숨에 대하여 자살도 할 수 있고, 또 육신이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육신을 어디에 소비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바로 목숨에 대한 권세라는 것이다. 이 목숨, 육신을 가진 삶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주어졌으니 그냥 사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목숨이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이 육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삶이다.


예수님과 같이 목숨을 버리는 것,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대하여 오해한다. 십자가는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형틀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하신 것은 사람이 어떤 것 앞에서 죄인이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가치관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마을 동장의 아들도 어림없다. 초라한 목수의 아들에다, 죄인과 창녀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길만한 것이 없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과 안목이다. 이 블로그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옳은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세상의 경쟁에서 져서 죄인이 되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연약한 존재인 사람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패배자고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곳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느냐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라고 스스로 규정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 초라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죄인이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으로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조롱의 대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면서 또 십자가는 사모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임을 아는지 알 수 없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죄인이 되는 인생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십자가에 달리신 죄인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숨이 있는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반하는 죽음과 같은 삶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죽음을 성경에서 성도들의 죽음, 신앙을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날마다 죽노라!”와 같은 말씀 속의 죽음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을 난처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역 광장에 모여서는 부흥회하듯 찬송을 부르는 것은 아주 난감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예수 믿기에 욕먹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 비난 앞에 서는 것을 예수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착각이다. 미안하지만.


예수님을 믿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 바보처럼’과 같은 말을 듣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 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 때문에. 신앙이 없다며, 그러면 지옥에 간다고 남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수고를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으로 인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서 그것이 바로 목숨을 관장하는 권세다.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 목숨은 그렇게 소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삶이 주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은 삶에 대한 권세가 없는 것이다. 삶에 떠 밀려서 사는 것을 어떻게 권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삶이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어떤 목적에 자기 삶을 소비하는 삶이 되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목적을 모르고 살면 아무리 삶이 능동적이라도 주권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목적도 모르면서 능동적으로 사는 것은 잘하면 잘할수록 더 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아는 삶,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고, 그것이 또한 자기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삶을 그 목적대로 살아간다. 즉 그 목적 안에서 삶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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