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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모호한 말씀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뜻이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는 말씀이다.(예수님은 이전에도 이 말씀을 유대인들 앞에서 하신 적이 있다. 그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었다(요 11:30-31))


이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존재인가?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그것이 어렵게 이해되는 사람들의 생각도 그것이다. 어떻게 다른 세 개의 개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동일한 개체가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에 다르게 보이는 것이 하나가 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시고, 또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라고 하시는 것은 같은 개체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를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생명이 되시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과 뜻을 자기 삶의 존재 의미로 삼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임하시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개념이다. 요리사가 칼을 잘 다루면 ‘한 몸이 되었다’나 ‘혹은 몸과 하나인 것 같이 사용한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도 자기가 물건을 만들고 자신이 그 물건을 만든 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을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다가온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만 제대로 알아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이나, 삼위일체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모든 인생을 대표하시는 분이다. 그것은 어떤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그 삶으로 나타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 뜻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가 바로 아들이다. 그러니 아버지(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이 그 관계를 증명함)와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제와 약간 간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삼위일체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뜻을 가지신 분, 성자는 그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신 예수님,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사람에게 표현되신 예수님을 깨달을 때 그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콜라가 콜라병에 담기고, 콜라를 마시는 사람이 콜라가 목적한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라는 이 세 가지가 하나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몰라도 삼위일체가 이해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어렵다고 겁을 주며 설교하고 공부해야할 것으로 궁리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다른 개체가 하나의 개체(눈에 보이는 형상 같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안목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모든 것은 아버지가 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인 것이다. 이는 콜라병과 콜라가 하나된 것과 같은 것이고, 작가의 생각이 표현된 책이 작가와 하나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것은 다 안에 계신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뜻대로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내가 자의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본성과 같은 생명의 특성을 보일 것이기에,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그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의지와 신념과 생각 같은 것으로 인하지 않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 마음 안에서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면, 싫지만 해야 하는 것이라서 각오를 다지고 억지로라도 해야 될 것 같고, 그래야 한다고 해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거듭난 삶이 아니라는 증거가 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비밀, 생명의 본성 즉 존재의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 성품)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임을 아는 비밀을 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고 삶의 목적이며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같은 개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생각은 다른 생각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일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어야 적정이 풀리는 사람,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옳고 의로운 것이고 생각하는 사람(물론 그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나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봤자 물론 세상적인 관점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이다. 그게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선악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선악과를 먹었고, 나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물론 그게 그것인지 모르는 어두움 속에서 그러는 것이지만. 알고서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어둠 속에 있으니 예수님은 이 비밀을 모르겠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서라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그렇지 못하겠으면 행하는 그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예수님이 하신 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와 뜻이 표현된 아들이시며, 육신의 존재 목적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형식이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내용이라는 것을 모르겠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인데,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라고 하신 <하신 일>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아니다. 왜 그것이 아닌가 하면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선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한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십자가가 도무지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바로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의 정체성을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사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의 일은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일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목적을 위해서는 이 육신이라는 존재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심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압박하는 그것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나타난 것이 그것이다. 세상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부정하다고 여긴다. 육신의 생각은 늘 죄로 가득하고 악한 것이기에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옷(신분)을 입어 자신을 가지고, 생각하여 그것을 극복하려 하고, 손과 발로 그런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심판할 때 그렇게 된다. 세상의 가치관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내 생각이 옳다고 홍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만들지도 않았고 주인도 아닌 세상의 일을 주관하려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일 뿐 전혀 선한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선한 가치를 지키려 한다고 해도.


그런 가치관에 의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는 발가벗겨져서 달리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셨다. 신분도, 생각도 손과 발의 행위도 사람이 가진 본래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 가치관으로 사람의 존재를 심판하면 마냥 죄인일 뿐 아니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려 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사람의 정체성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고, 그렇게 죄인이 될 때, 자기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인정할 때(죄를 시인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용납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연약함, 세상적인 가치고 패배자가 또 죄인이 되는 그 모습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는데 자비나 사랑이 있겠는가? 이겨야 하고, 자기의 주장을 펼쳐야 선한 사람이 되는 세계에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의 의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세계는 언제나 희생이 따른다는 놀랍게 채색된 논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심지어 가정에 까지 사회와 세상 전반의 기초가 되어 있다. 희생하고 섬기는 것은 이기고 나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가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헛소리나 베풀고 동냥하듯이, 자기가 이긴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의 일부로서 노릇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는 것,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잉태하심)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인생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중에 하나님의 성품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임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인생이 알도록 하신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형식이요 성전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의와 뜻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의가 육신 가진 자기 삶과 하나가 되는,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된 아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일이라도 믿으라(자기 것으로 순종하라)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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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7-9) 아버지를 본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29. 11: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고 난 다음에 이어서 하신 말씀은 “그러니 나를 따라 오너라”와 같이 길이나 진리나 생명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것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사람들이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길이고 진리며 생명이신 근거와 목적은 오직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가는 것을 위함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하는 육신의 일의 기로에서 결정을 할 때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이 길이라고 하심을 의지하고, ‘무엇이 사실인가?’하는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죽고 난 다음에 영원히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한다.(생각하게 된 동기는 다른 게 아니다, 이 말씀의 본질을 그렇게 육신의 문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목사들(세상의 방법대로 시험치고 이력서 내서 시무하는)이 그렇게 설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아버지를 만난다는 것이고, 그 만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진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므로 이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빌립은 그러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께로 가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빌립과 제자들은 예수님과 오래 있어 예수님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아버지께 온 자들이건만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말씀 하나에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생각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험에 합격한 것이나 취직이 되는 것과 같은 것, 그리고 조금 고상하게 선교하는 것과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을 만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그 형상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없다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닌 것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선교나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맹점이 있다.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고 전도고, 외국에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사람이 모인다고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 복음은 결국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과 이미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자신도 그런 삶이 되는 것이 전도고 선교지 몸이 교회에 나온다고 전도가 아니다. 더욱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사람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일이 잘되게 해 달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정도로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신앙인은 별로 없다. 누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물론 객관적인 믿음이지만)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전하고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부정하게 여기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을 형식으로 표현해줄 존재로 여기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율법을 지키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거나, 돈이 있어야 사람답다거나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위치에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보기 좋다거나 하는 사람 + 어떤 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시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이 육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으신 것임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존재의 이유로 받아들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삶으로 표현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육신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지켜서 행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기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수고와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가 정확하게 인식이 된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주님으로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만나졌다면 “하나님 당신은 나의 존재 이유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믿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자기 삶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죄인 같고 연약하고 부정해 보이는 이 육신, 세상의 가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발가벗겨져서 못 박히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 육신이 바로 자기 운명이고 하나님이 조성하신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간 자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사람의 처소, 곧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둘 자리라는 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자리로 가는 길도 예수님이고, 사람이라는 존재 정체성의 진리도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정체성에 거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신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자로 여기기에 예수님이 생명이신 것이다. 이러한 법이 아닌데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아는 것은 다 도적질과 같은 것이다. 즉 육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길)이 예수님께 있다고 하거나, 예수님이 모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라고 하거나, 예수 믿어야 죽어서 영생한다는 식으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다고 뇌까리고 부르짖는 것은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께 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여기면 필연적으로 사람에게 어떤 것을 더하고 요구하게 된다. 아니면 영지주의처럼 육신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해야 한다.’가 생겨서 법이 되고 교리가 되고 사람을 압박하는 것이다. 술 마시면 안 된다. 십일조 해야 한다와 같이 have to와 must가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사람의 부정함을 극복하는 목적과 이유와 목표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것은 신앙의 맹점을 지나 허무한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의 가치, 종교적인 가치로 볼 때 부정하고 연약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은 하나님께서 그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적합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 자기 운명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겠는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겠는가? 그 마음으로 사는데 어떻게 성경이 지켜지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 자람이요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난 것임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로 온 사람이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된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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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다는 것과 기적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4. 28. 13:39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가끔 공상을 한다. ‘복권이 당첨된다면…’ 같은. 그런 상상은 종류도 다양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상상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기적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일들이다. 그러니까 상상을 한다는 것은 기적을 바래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삶에는 <귀찮다>는 것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 사람과 다투는 대부분의 갈등은 이 귀찮다는 것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다. 쓰레기를 좀 버려 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는 남편이 느끼는 첫 생각이 아마 ‘귀찮은데…’일지 모른다.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람이 못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사람을 괴롭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사람의 육신이 하는 것이라는 것은 다 어떤 관점으로 보면 귀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은 그런데 쓰라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기적이라는 것은 귀찮은 일이 단번에 되는 것일지 모른다. 산을 옮기려면 푸념할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당장 삽을 들고서 흙을 파서 옮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육신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상상을 한다. ‘말 한마디로 하면 안 될까?’와 같은.


그렇게 보면 기적이라는 것은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곧 육신의 귀찮음을 넘어서겠다는 소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적과 귀찮음은 그렇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육신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바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적과 귀찮음의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를 설명하는 좋은 주제가 될 수 있다. 만약에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육신 없이 가능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장기 두시다가 문득 ‘땅위의 사람들을 구해볼까?’ 생각하고선 말씀만 하셨으면 되었을 것이다. 온 세상을 말씀만으로 만드셨으니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닌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번거롭게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즉시도 아니고 33년이나 살고 난 다음에 그렇게 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기적 곧 과정과 귀찮은 수고를 생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사람이 변해서 죽을 자리에서 구원을 얻는 것 보다 더한 기적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역사는 육신이 필요한 일이었다. 육신의 일이라는 것은 결국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는 것에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공로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귀찮은 수준이 아니다. 육신의 목숨을 버려야 되는 곳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귀찮은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도했더니 이루어 주셨다!’고 외치는 것이 과연 영광인가 반문할 수밖에 없다.


쓰레기를 버려 달라는 아내의 귀찮은 부탁은 수용하지 않으면서 주를 위하여 죽을 테니 선교지로 갈 수 있게 후원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과연 신앙이겠는가 말이다. 죽을 각오로 선교를 가고 싶다면 먼저 육신을 선교비를 마련하는데 쓰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선교 후원을 거절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을 돕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전에 말이다.


반대로 아내는 과연 쓰레기를 버릴 수 없어서 남편에게 부탁할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다. 많은 경우 부탁해봤자 결국은 아내들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남편이 그래줬으면’하는 바람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그 시도나 부탁을 들은 남편이나 둘 중 하나는 수고해야 쓰레기가 없어질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섬김이 있는 것이다. 육신을 소비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육신 가진 사람들의 사회와 삶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이 죄는 우리가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대속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굳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아도 될 법한데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고, 그 구원은 육신 가진 삶의 정체성을 보이심으로 우리 육신을 왜 주셨는지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사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기적을 바라고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분되고 차별된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귀찮다고 여겨지는 그 일에 육신을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고, 그것이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다. 그렇게 귀찮은 일을 멀리하면서 기적을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오히려 기적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남을 섬기는 일에 이 육신을 소비함으로 기적 중의 기적인 사람이 변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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