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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엄청난 일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이 아프면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믿는 신께 의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자신이 믿는 신과 자신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 


신은 존재(Be)의 신인데 사람은 소유(Have)와 공로(Do)의 신으로서 관계를 형성한 상태(자신이 그렇게 믿는 상태)라면 신과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는데 신께 자신을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뭐랄까? 보수당원이 진보당의 공천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뭐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의 신인데 사람이 하나님께 육신의 소유에 관한 문제, 행위와 행위를 하는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는 것이 바른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병을 나으려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인정하자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금도끼를 얻을 목적으로 산신령께 금도끼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육신의 죽음에서 살리시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을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살리시는 권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육신으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정체성을 놓고 보면, 육신은 껍데기와 형식이고, 사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있다. 이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도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사람의 본질을 살리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살리지 못할 능력이 없을 리는 없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보이신 것을 인정해야하는 것이지, 그것을 예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모습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듭난 생명을 얻어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 이유로 인하여 나사로도 살리시고, 결정적으로 예수님 자신도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은 자도 살리고, 자신도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신 것은 ‘나는 이런 사람(신)이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사를 듣고 보는 모든 이들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뉴스에 나오는 대통령, 심지어 다른 나라 대통령도 우리가 알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와 내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상관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와서 잉태할 것이라고 했을 때 마리아가 말하기를 “사내(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결혼할 정도로 자란 여자가 남자를 모를 리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개념은 남자를 경험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바로 그 안다는 것으로 예수님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내가 상관이 있는 관계가 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지신 분이시기에, 그 예수님이 가지신 목적과 의미가 결혼하여 남자의 씨를 자기 몸에 받아 들여 그 남자의 성을 가진 아이를 낳는 여자와 같이 사람이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을 받아 들여 그 예수님이 보이신 목적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런 삶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곧 부활이다. 세상의 끝 날에 몸이 다시 사는 것도 그 몸에 깃든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지,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육신이 사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의지하는 신으로 믿었던 사람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이 기름 넣어주고, 세차하는 것을 목적으로 차를 사는 사람이 없듯,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은 사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듣고서, 육신을 가진 이 삶의 목적이란 것이 세상의 법과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 육신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존재, 말씀이 육신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과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고, 부활생명을 가진 사람이며, 영생의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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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 자신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다. 길, 양의 문, 빛, 떡, 피와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 자신이 바로 <생명이고 부활>이라고 하신다. 부활이라는 것은 동사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부활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어떤 사람 그 자체가 부활이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그런 말이다. 생명은 그렇다고 쳐도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을 하셨을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 블로그를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하는 것이기도 한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도무지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정의를 하고자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 육신이 사는 동안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이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곧 OO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심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사로를 살리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믿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엇을 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라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예수님께 기도하면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을 가진 인생이 죄가 있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을 때 죄가 사해지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때를 밀어주듯이 죄를 사하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역시 우리의 모습을 보이셨기에 그것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본 모습인 이 육신을 자기의 모습으로 인정하라고 그렇게 십자가에 벌거벗겨져서 달리신 것이지 차비를 대신 내듯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예수님께 돈 문제, 먹고 사는 문제, 직장 문제, 결혼 문제와 같은 것을 기도하고 바라고 주실 것으로 믿는 것은 정말로 가관이다. 그것은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화나고 창피한 일일 지경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또한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것으로 예수 믿을 것이면 그냥 사회에서 아부하며 성공하는 것이 더 빠르다. 그게 목적인데 뭣 하러 교회에서 그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튼 그렇다.


다시 돌아와서 보자. 예수님은 때로는 빛이라고도 하시고, 문이라고도 하시고, 길이라고도 하시고, 진리라고도 하시고, 생명이라고 하시고 부활이라는 등 자신을 그런 것이라고 하셨을까? 이러한 것들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데, 종합적으로 보면 세계가 바뀌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보고서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깨달으면 새로운 세계가 인식되기에 예수님이 빛이시고, 문이라는 것도 다른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며, 길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이라는 빛과 길과 문을 지나서 이르는 자리가 사람의 원래 자리,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의 나리이기에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사람에게 진리인 사람의 자리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살아있다고 여기시기에 그것이 생명인 것이다. 몸이 숨 쉬고 살아 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이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은 시계가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불과하다. 시계는 겉모습이 멀쩡해야 산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맞아야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듯, 사람도 육신이 멀쩡하고 팔팔하게 돌아다닌다고 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을 때에 비로소 ᄉᆞᆫ 것, 곧 생명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보고서 그 예수님이 바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을 믿게 되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이신 것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빛을 만나 이전에 알지 못하든 사람으로서의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나, 예수님이라는 문을 지나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에 이르는 것(문을 지나는 것은 그 문이 정한 자격을 가졌다는 것)이 다 사람에게 진리고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진리이다. 예수님께 직장이나 결혼이나 사업 문제의 길과 해답을 얻는 것이 길과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빛이시면 자신도 빛을 보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길이면 자신도 길을 아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문이면 자신은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이 진리면 자신도 사람으로서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이 되며, 예수님이 생명이시기에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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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 부활의 목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11. 13:31 Writer : 김홍덕

부활, 그것을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최고의 차별성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이 부활이라 생각한다. 마리아처럼.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간혹 ‘그러면 화장한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난센스다. 설사 하나님의 부활이 그런 방식이라 치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 정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의심하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부활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다.


물론 부활은 약속하신대로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정의되는 모든 것, 마지막 날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다시 산다는 것과 같은 것을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것으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몸을 다시 사용해야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때 다시 사는 것이지, 살려 놓았는데 이전과 똑같은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면 굳이 살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아예 새로운 사람을 하나 더 만드시는 것이 더 낫지. 그러면 새롭기라도 하니.


부활이란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면 왜 다시 살리겠는가? 새롭지 않다면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그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산신령께 빌던 것을 하나님께 빈다고 달라진 것이 아니다. 신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비는 그 당사자는 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한식 먹던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것으로 식성이 바뀐 정도의 달라짐이지 정체성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부활이란 그런 달라짐이 있어야 부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부활은 반드시 거듭남을 전재로 한다. 거듭남이 없는 부활은 없다. 다르게 남이 있어야 다르게 사는 것이 있는 것이다.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삶을 살지만 그 가치관이 다르고, 빛이 비췸으로 다른 세계를 인식하게 된 생명과 안목을 가지지 않았는데,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쳐도, 남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도 그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고전 13장)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활을 단순하게 사람이 다시 사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부활은 명백하게 이유가 있다. 다시 살아야할 이유가 있어 부활을 하는 것이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부활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의 정체성이야말로 진정으로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목적 안에서 볼 때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기에 살리신 것이라는 것이다.


나사로 역시 마찬가지다. 나사로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보다 좋아했던 사람이라 살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유라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들은 아직 살고 있어야할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전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으로 여기는 삶이고, 살아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생명이 없는 사람은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듭남과 부활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산신령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던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같은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 안목이 달라졌다는 것,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것은 같은 육신을 가지고, 같은 모양으로 사는 것 같지만, 이전에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알고,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산신령이든 찾아가서 이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던 신앙을 벗어 버리고, 이 육신을 주신 삶의 목적과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세계가 열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열려야 이 육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살아서 믿으면 죽지 않고, 무른 죽어서 믿으면 다시 산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죽었다는 것이 육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육신은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사는 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부활의 삶이 바로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삶을 산다는 것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말씀이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램프의 요정으로 여기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이 가진 육신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는 무능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 모습이고 자기 정체성이며 그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이 있으면 육신의 삶이 달라진다. 거듭난 삶이 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삶이 된다.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육신의 삶을 위하여 존재하는 모양새이지만, 육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삶이라는 것을 알면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사용한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고, 부활 생명, 새 생명을 주시는 이유인 것이다. 이런 이유가 없는데 새로운 삶을 주실 이유가 없다. 새로 살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이나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데 뭣 하러 죽은 놈까지 살려서 그러는 꼴을 보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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