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양의 문은 양이 아닌 세계에서 양의 생명을 가진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양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이란 하나님의 양, 즉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그것을 모르는 신앙인을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신앙인이 바로 믿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옳지 않다. 다만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또 자기가 인생에서 겪는 문제의 해결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것 그것만으로 자신들이 양의 문으로 들어갔다고 여기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의 문제를 기도하고 의탁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TV에 나오는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그를 아는 것만으로 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나를 알아야 비로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 수 있는 동질성 있는 관계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즉 존재의 목적이 양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의가 바로 예수님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본 통치 이념, 혹은 나라의 기본 의(義)가 바로 하나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역시 그런 사람이어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문을 지나는 것은 문 저편의 세계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에는 경비가 서 있는 것이다. 문 너머의 세계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의 문을 지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목숨이라는 것과 생명이라는 것은 다르다. ‘물은 생명’이라는 말은 있어도 ‘물은 목숨’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목숨은 육신의 생명 아니 목숨을 말하는 것이고 생명은 한 개체의 육신에 관한 것에 한정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신 것은 육신을 그것에 사용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목숨을 버린다고 하니 무조건 단숨에 버리는 것, 순교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의 정확한 표현은 목숨이 붙어 있는 육신을 가진 삶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용된다는 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드시 (목숨이)죽기에 다만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선한 목자는 양의 세계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목자는 목숨을 순교하듯 단숨에 버리고, 어떤 목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 가진 삶을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양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하여 자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가 목숨을 바치는 그 의미를 아는 양이어야 양의 문을 지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양의 세계, 양의 문 너머의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란?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음성)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곳은 십자가다. 그러므로 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고, 양의 문을 지난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자기 목숨을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알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잘못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라 모두들 꺼려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그 부담스러움을 무릅쓰고, 또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욕먹을 것을 알지만 총대 매듯 가서 말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것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육신을 그렇게 소모하는 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말도 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 한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이 화를 낼 정도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로 인하여 죽이려 할 때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순순히 끌려가서 죽으셨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총대 매듯 말을 할 때는 그 말로 인하여 반발할 때에 그 주장 앞에 죄인이 될 것이 아니면 말을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려는 생각이 없다면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의 자칭 목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이 목자로서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듣지 않는 이를 심판하는 것이다. 자기가 설교한 대로 하지 않는다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선한 목자라면, 설교가 아니라 그 삶을 보고서 그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살아내는 것이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삯꾼 목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 도둑이고 강도다. 그들이 양을 들먹이는 것은 양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서 괜찮은 줄로 알지만 그것이 바로 착각이다. 하나님의 의를 전하러 오신 예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의가 자신을 주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끌려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는 양들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위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이 있는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도 양을 안다고 하신 것은 말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같아야 양의 문을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체성은 그 정체성으로 인한 형식과 행동과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을 양들이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음성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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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7-21) 양의 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2. 24. 15:23 Writer : 김홍덕

문(door)은 어떤 세계의 경계를 넘는 곳이다. 문이 있다는 것은 두 세계가 있다는 말이라는 의미다. 세계가 두 개이고, 그 하나에서 건너편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문을 지나는 것이다. 그것이 문이다. 출애굽 당시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을 때, 장자가 죽는 세계와 다른 세계가 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양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 사이를 넘어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양이란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예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세계가 아닌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길과 빛도 마찬가지다. 길이란 것 역시 어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과정이 길이다. 부산이라는 세계에서 서울이라는 세계로 가는 것이 바로 길이고, 어두움의 세계, 어떤 것도 그 목적대로 활용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는 세계에서 모든 것을 알고 인식하며 그 존재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세계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 빛이기에 길과 빛도 양의 문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양의 문, 그것은 양의 세계로 가는 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양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품성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가진 이들이 바로 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양의 세계, 하나님 백성의 세계의 기준이고 표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표준이 아닌 다른 것이 와서 양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는 것은 다 도적이고 강도다. 이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서 양을 헤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양을 해하기 이전에 양의 세계와 표준이신 예수님과 정체성이 다른 존재가 양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다 도적이고 강도라는 것이다.


한 나라에 적국의 간첩이 들어와서 아무도 해치지 않고, 심지어 정보를 빼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간첩인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모든 법은 마음을 먹은 것, 실행에 옮기지 않은 동기를 가졌다는 것으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단 하나, 국가를 전복할 의도, 간첩 행위에 대한 것은 실행 이전에 의도만으로 죄가 된다. 그것은 나라를 해하려고 하는 의도는 나라의 일반 국민과 정체성이 다른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인 양의 문으로 들어간 양의 우리와 하나님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는 마음을 먹는 그 자체가 이미 강도고 도적인 것이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생명과 본성이 자기 삶의 목적과 본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양의 우리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의 문제 이전의 것이다. 양의 문을 지난다는 것은, 양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양의 우리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이냐는 논제도 아니다. 양이 하는 짓이 다 양의 짓이듯,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모인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사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도 없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언급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과 같이 행동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의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를 기준으로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이냐 아니냐 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이기만 하면 양의 우리에서 양의 짓을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고, 그 양의 문을 지난다는 것은 양의 문을 지나가기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신분(정체성)을 가졌느냐의 문제뿐 다른 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 특별히 십자가를 통해서 보이신 인간의 정체성,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자신의 삶과 운명이 순종되는 사람이 바로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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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서울 모임 안내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2. 23. 15:19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운영자 김홍덕입니다.


저의 블로그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모든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다음이 아니라, 3월에 서울에서 모임을 한번 가지려고 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많이 참석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일일시 : 2016년 3월 6일 (일) 오후 4:00


모임장소 : 서울 홍제동 비콘드림힐 아파트


부가사항

1) 개인 가정집이라 동 호수는 저에게 연락 주시면 개별적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2) 아이들이 있으신 분들은 아이들과 함께 오셔도 됩니다.


연락처

김홍덕 (010-3396-5555) / the.elphi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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