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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은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었다. 내면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백성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요 8:41)

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도,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뭐 그런 것으로 사람을 죽이려 하나?’싶은 것이겠지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부정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에게 ‘너 북한 사람이지?’라고 묻는 것 이상의 의미일 수 있다. 특히나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 살아가는 모든 것에 있어 종교를 떼어 놓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절에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 종교가 다르면 물건을 팔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의 핵심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온전히 육신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진리라는 것이다. 이는 2,000년 전의 예수님이라는 그 한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자유롭게 된 사람,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삶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리인 것이다. 바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리요,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생명의 유전자를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타난 것을 보고 그 생명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생명이 속에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알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의 본체이고, 그 생명의 말씀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분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변함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인정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당연히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자기 고향 즉 자기 생각과 철학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아는 자리로 옮긴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지금, 그 모든 신앙이 다 온전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고치고,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보이신 것은 맞지만, 그 기적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신 본질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도 아닌 것이다.


만약에 그럴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살면서 단 한명이라도 죽은 사람 살린 적이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물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럴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러셨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으면 뭐 하겠는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수의 아들 주제에 조용히 살고 있어도 인정해줄까 말까 한데, 매일 창녀와 세리와 같은 이들과 먹으면서 성전에 와서는 육신의 행실을 경건하게 하고자 삶의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신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의 어디를 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초라한 모습, 그저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이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존재 이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의 눈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생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럴 수 있어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뭣 하러 본 적도 없는 다른 나라의 종교를 지금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열심히 살면서 돈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육신을 가진 삶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에 비출 때 그렇게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즉 이 육신을 가진 삶이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바다 위를 걷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는 너무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된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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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신앙 안에 있는 근심과 갈등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2. 16. 11:20 Writer : 김홍덕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이라는 것이 있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세상의 근심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분명한데, 많은 교회들이 건방지게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은 무조건 틀린 말은 아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면 정말로 교회의 방향이 바로 교인들에게 근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일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하셨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께 들은 것, 또 본 것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의 삶을 보고서 그 마음에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그 사람의 본성과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바로 이때 근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볼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을 볼 때, 십자가의 삶을 볼 때, 그때 사람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근심과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인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삶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본질을 마주했을 때, 그때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는지 갈등하고 근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근심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로 보이신 사람의 본질,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발견하게 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미운 오리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서 깨닫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서 스스로 그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생명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스스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고 근심하게 되어 자신을 돌아보고서 자신이 본 삶이 바로 사람의 본질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사이클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 또 자칭 신앙이 있다고 말하고 계시가 밝다고 하는 이들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한 마디로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 자기 본분이라 생각하고서 삶은 없이 말만 할 때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갈등과 근심을 하게 된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니 당연히 신앙을 추구하는데 누군가에게 ‘너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되겠느냐?’는 말이나 암시를 받는다면 그 근심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을 사랑이라 채색하고, 그렇게 하는 이를 영광스럽다 하고, 그렇게 남에게 싫은 말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총대 메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것인 사랑도 영광도 십자가의 삶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을 모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의 모든 것은 다 수동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은 그 뜻을 수용하고 나타내는 것이 자기의 일이지, 자신이 능동적으로 어떤 것을 하여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능동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듭난 생명이 표현되는 것에 동의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즉 자기 삶이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에 허락하는 능동, 그것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동이라면 능동이다.


교회가 사람에게 주는 근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 그것 하나뿐이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라면. 그렇다는 것은 교회에서 사람이 근심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교회에 있는 먼저 된 사람들의 삶을 볼 때 자기 마음에 그렇게 살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그 근심과 갈등만이 교회에 있는 유일한 갈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세습에 관해서 갈등하고, 돈 문제로 갈등하고, 설교를 잘 하느니 못하느니 다투는 것은 다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계모임에 불과한 조직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설교의 경우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논쟁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검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싶겠지만, 이미 목사를 뽑을 때(청빙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을 보고 청빙한 것이 아니라 이력서를 보고 뽑은 주제에 설교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인 것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문제는 바로 앞에서 말한 그런 세속적이다 못해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교회의 갈등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교회 안에서 신앙이 어긋난 사람은 장로와 함께 찾아가서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떠나라 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집에서 나와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도, 신앙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집요하게 지적하고 훈계하다 못해 예배시간에 재판하듯이 하는 것에 이른다면 그것은 정말로 심각한 것이다.


신앙이 없고, 교회의 노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두면 된다. 심지어 그런 사람도 교회에 예배시간만은 편안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설사 자기도취에 빠진 것이라 해도. 그런 사람들을 끊임없이 뒤에서 소곤거리고 괴롭히고 심지어 신앙 없다고 욕을 해대는 것을 사랑이라 회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앙도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사람이 스스로 갈등하게 하는 곳이다. 그 갈등은 교회에 가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사람들의 삶을 보니 세상의 사람들과 다름을 봄으로 생기는 갈등과 근심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 있어 약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법인데,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방법, 바보 같은 방법인 십자가의 도가 주관하는 곳이기에, 사람들이 약한 자, 신앙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죄인과 같이 섬기는 일에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고서 ‘이건 무슨 세계인가?’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근심의 결과 사람이 변하는 일이 있다는 그것이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거듭난 세계로 인도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피라미드와 같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법으로 살고,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것에 있어 오히려 약하고 무능한 자를 위하여, 그 무능하고 어두운 자가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감동을 주는 삶에 육신을 사용하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도 예외가 없다. 신앙에 있어서도 더 밝고 더 좋은 신앙을 가진 이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살아 내는 것, 말이 아닌 삶이 감동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수고와 삶이 교회에 있어, 이때껏 그렇게 살지 않았던 사람, 그런 삶에 어두웠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스스로 옷을 찢고(신분을 버리고) 회개하게 하는 곳, 그곳이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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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소망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2. 15. 16:18 Writer : 김홍덕

3,40대 20여년을 만사를 제쳐놓고 다닌 교회가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십자가의 도는 “의인이 죄인을 위항 죄인이 되는 세계”라는 것을 바로 알려준 교회였기에 20년 가까운 세월을 세상의 최고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나라는 인간이 가진 최선으로 섬겼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를 나가지 않은지 만 2년이 되었다.


과거가 되었다는 것, 이제는 다니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함께 할 수 있는 이유가 이제는 없어졌다는 것일 것이다. 당연히 그 교회에서 본다면 나는 변절자일 뿐이겠지만, 반대로 내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섬겼던 곳을 떠날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에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객관적으로 심판하긴 어렵다. 기본적으로 신앙의 문제는 객관성이 논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냥 사람들이 볼 때, 내 눈에 비친 성경,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많이 참조한다. 그리고 그 결과와 반응으로만 본다면 나의 결정, 그 교회를 떠났던 결정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물론 그런 반응 이전에 내 안에 있는 확신하는 것이 결정적이지만.


“교회란 어떤 곳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전에도 그렇게 답했고, 또 그럴 것이다.

“교회는 적어도 사람이 교회에 있는 순간만큼은 평안한 곳”이라고, 그래야 교회고, 교회란 그렇게 되기 위한 곳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왜 평안하지 않은가? 평안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히 부담이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상적인 교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들은 이런 논제의 밑바닥에 있다. 돈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혹은 그 교회에 봉사한 공로가 클수록 장로나 장립집사가 먼저 된다면 다 그런 교회다. 그런 교회의 부담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사람,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 교회에 수고하고 봉사하기엔 자기 먹고 사는 형편이 아직은 편치 않은 사람, 그리고 만사 제쳐놓고 그럴 용기가 아직 없는 사람에게는 부담스런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예배시간에 돌아오는 헌금 주머니만 해도 얼마나 부담인지 모른다.


이에 더 나아가서 더 큰 부담, 사실 복음이라는 것에 더 가까이 근접한 상황에서 부담은 신앙에 관한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평안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섬긴 교회를 떠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 믿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 교회 안에서 부담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면, 신앙이라는 것이 부담이 되는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와는 다르다. 분명히 깊이가 더 있고,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라고 할 만한 교훈이 교회 안에 있는 곳이다. 그것이 없는데, 신앙이라는 것이 교회 생활의 부담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마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말 때문에 예외 없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바로 교회가 바로 가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무리한 논리가 될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신앙이 깊어지면 많은 경우 신앙에 매몰된다. 더 좋은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신앙 아닌 것을 멀리하려 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가족이든 누구든 멀리 하려 하고, 신앙에 저해가 된다면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좋은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매몰되는 현상이다,


필자가 20년간 다녔던 교회도 그렇게 흘러갔다. 시작은 좋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시작 때의 모습, 그 시작 때의 말씀을 간직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그 흐름은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다 교회에 모여서 목사가 되려하고(그것도 손쉬운 방법으로),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하나씩 등지기 시작하고, 직장일은 교회 생활을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점점 깊어졌다.


그렇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그 교회 교인을 보고, 그 교회의 교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며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그리고 ‘저런 교회는 다니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의 자랑은 사람이 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건물 사고, 건물 가꾸고, 누가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세속화된 교회로 점점 변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결국 세상을 매개체로 삼아야 한다. 교회라는 것의 가치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을 얻겠다는 의도였듯, 교회도 결국은 세상에서 교회에 속할 사람을 찾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교회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등지고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짐승 취급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단호하나 것이 신앙에 결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죽어 나가는 그런 모습이 될 때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또 교인들이 사모하는 신앙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가진 의의 기준과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것은 때로 세상의 법으로 인하여 교회가 파괴되는 것과 같은 일들 앞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를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 바로 믿음의 선진들이 그런 신앙을 지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음이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고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님을 믿는 신앙, 그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 그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과 등지고, 세상을 멸시하고, 심판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버리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또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욕하고 비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용의 문제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이 받은 비난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 와 보라!”라는 그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하면 바보 같아지고, 망하는 데 왜 그런 방법을 선택하느냐?’하는 비난과 조롱이다. 그것 외에는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거나 조롱을 받아서는 안 된다.


십자가의 도가 뭔가? 바보 같은 짓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죽이려는 것을 순종한 것이 아닌가? 교회가 그 도를 따른다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하지 않을 바보 같은 짓, 즉 자신이 의인이면서 죄인이 되어 죽어 가는 삶을 살기에 조롱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자극하고, 도전하고, 심판하고, 멸시하며 등지기에 받는 비난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앙이 없다고 세상을 멸시하는 것, ‘우리는 신앙이 있으니 이래도 된다.’는 식의 행태로 인하여 받는 비난을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처참한 판단이다. 그것이야 말로 제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이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는 교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인정되는 사람이라면 신앙이 없어도 또 신학을 하지 않아도 또 헌금하지 않아도 또 건물이나 공간적인 동일함이 다소 결여되었더라도 자기가 속한 삶에 순종하고, 자기가 속한 세상이 자신에게 주장하는 것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보는 이들이, 또 그렇게 나타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의 심령에 성경의 감동과 잉태함을 낳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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