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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경우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물었다. 이 상황은 성경을 조금만 대했어도 알 수 있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특히나 예수님의 말씀인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는 말씀은 아주 우명하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아주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분명히 여자는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혔는데 왜 여자만 잡혀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간음하는 현장이라면 남자가 있었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간음이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돌에 맞아야 하는 율법 조항에 걸렸다면 남자도 동일한 상황일 것인데, 남자는 어디가고 여자만 혼자 잡혀 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쳐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심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짝이 아닌데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한정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남녀 간의 간음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설명하시는 것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짝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을 간음이라 하듯이, 빈 그릇과 같은 사람도 자기 안에 채워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채우면 하나님 앞에서 간음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계명이다.


이러한 간음은 만물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창조와 존재의 목적이 아닌 것을 수용하면 다 간음인 것이다. 망치로 사과를 깎겠다고 하면 그것은 망치에게 간음이 된다. 부엌칼이 음식 만드는데 사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데 사용되면 그것 역시 간음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삶을 드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육신의 일이 풍요로워지기를 하나님께 바라고 또 그것을 위하여 삶을 소진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 간음하는 것이다. 즉 간음이나 우상 숭배나 그것이 그것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의 짝이 아닌 것을 남편으로 삼듯이 삶의 목적 삼아 살아가지만 정작 자기가 좇고 있는 자기 삶의 남편과 같은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이는 수가성의 여인에게서도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너의 남편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남편이 여럿 있었지만 정작 자기의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지 몰랐듯이, 지금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의 경우에도, 그녀가 간음한 남편이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처절하듯 살아가지만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알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내듯, 견뎌내듯, 버티듯, 죽지 못해서, 살 수 밖에 없어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왜 그렇게 사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 사는 목적이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목적은 사람을 만드신 이에게 있는 것이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생명이 되는 씨를 심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가성 여인의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의 남편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람들의 그런 삶을 창세기의 시작에서 “흑암과 혼돈” 이라고 하셨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왜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그런 사람들은 다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자기 삶의 의미 곧 남편으로 여기면서 산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아무리 고상하고 위대해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생수와 같이 넘치지 않는다면 그가 사모하고 의미를 부여한 모든 것은 다 간음한 남편과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구와 간음하는지 조차 모르는 흑암과 혼돈 가운데 사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에 관해서 모세의 율법으로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고 예수님의 반응을 살핀다. 성경에서 율법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한 것은 율법이 돌에 새겨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율법으로 죽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율법은 돌에 새겨진 문자가 율법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문장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율법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마귀가 금식한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사람이신 예수님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었다. 즉 돌에 새겨진 율법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 아니라, 율법으로 또한 세상 만물로 표현하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의 본질이 되고 또 삶의 의미가 되어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그 의도는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라.”라고 하는 것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먹게 만드는, 즉 율법이 자기의 것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돌로도 표현되고, 세상으로도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사람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늘 “모세를 알았다면 예수님도 알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모세만 알았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던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한답시며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를 알았다면 진정 남편이 있는 삶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신랑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신 것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너의 삶에 진정한 남편이 있는 자,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는 의미이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듣지 않았다. 그들이 이 여자를 송사한 것은 여자의 행위, 눈에 보이는 행동 곧 형식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그 형식에 관해서 자신들도 결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이 그런 자들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하지 않으므로 이를 경건하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일을 경건하게 하고, 고행하고 수도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행위에 관해서 자신들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먼저 사람의 형식이란 깨끗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위에 자신이 있으면 돌로 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돌아 볼 때 자신들의 행위에도 결함이 있다는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돌로 친다면 자신들의 신앙의 근간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깨끗지 않으므로 그 행위를 경건하게 해야 한다는 자들이니 자신들이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하다면 그들이 율법을 지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단순하게 자기들도 행동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양심에 찔려서인지 다들 떠나갔다. 그러고 나니 남은 사람은 여자와 예수님뿐이었다.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없어지고 여자 혼자만 남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람, 그 자체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물었다.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라고.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은 다 떠났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사라졌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사람을 정죄하던 율법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사함 받는 상황이고 자리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모세니라(요 5:45)


여자를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여자를 고소했다.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떠났다. 즉 모세가 떠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 우리 사람을 송사하던 그 율법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법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어야만 예수님만 보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는 변화산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보니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여자를 고소하던 자들이 떠난 때, 모세의 율법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끝났을 때, 즉 사람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나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가 용서되는 법과 상황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모세가 정죄하는 죄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이때껏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람의 육신의 행위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다시 여자에게 가서 행위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가서 모세가 송사할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남편을 찾는 자가 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그 죄를 다시 짓지 말라는 것, 즉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남편이 없는 삶, 간음하는 삶, 삶의 목적과 의미가 없는 흑암과 혼돈의 삶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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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문제와 같다. 예수님을 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그렇게 물고 늘어졌다. 천한 동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오겠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출신은 어디까지나 나사렛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끊임없는 말씀은 그리스도(the Christ)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전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도 죽이고 싶을 지경인데, 더욱이 그것이 예수님 스스로 말씀을 하시니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하는 것도 죽을 죄지만, 그것을 스스로 말하고 증거하는 것은 가관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증거하니 그 증거는 효력이 없다.”라는 다툼에 이어서 갑자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가 넘쳐 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난데없기 짝이 없는 말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성경은 어쩌면 이런 것이 궁금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난다는 것은 앞에서 포스팅 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표현되면 자신이 그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 생명과 삶은 자기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것이 늘 안에서 넘쳐나며, 그 생명이 자기 것이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는 자신도 날아가는 그 순간 백조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넘쳐 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그 안에서 넘쳐 난다는 것은 생수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정체성을 말씀하심이고, 믿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그 정체성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임을 성령의 능력을 알게 되어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사람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말씀이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생수와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본성이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 그것이 생명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창조의 목적 안에서 살아 있다고 하실 수 있는 생명에 순종된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이 넘쳐나야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말씀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증거가 거짓이겠는가? 그것은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어디 가서 사람의 자리와 동물의 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사람의 자리에 앉는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탕에 가고, 자신의 근육을 드러내기를 즐기며, 여자는 그 몸매를 과시하고 아름다움을 늘 표현한다. 스스로 남자이고 여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참되지 않는 세계는 생명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세상의 법정에서 자신의 변론이 아니라 증거나 증인이 있어야 하는 것은 그 세계가 생명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듯,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 생명을 증거하고,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안목이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표현한다. 오히려 생명이 자기 생명을 증거함은 다른 이의 증거가 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조차 되지도 않는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 적어도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다 생명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생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고 넘쳐나게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될게 아니라면 뭐한다고 예수 믿느라 남들 하는 것 하지 못하며 사는가? 그건 바보일 뿐이다.


이것은 사람이 “내가 예수(a christ)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럴 수 없다면 왜 예수 믿는가? 그게 아니면 그냥 오늘 성경을 덮어야 한다. “내가 예수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내가 가졌다는 의미다. 우리가 먹는 사과 한 알은 the Apple이라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고, 그 중의 하나며, 사과의 DNA를 가졌기에 사과이듯, 예수님 the Christ께서 보이신 그리스도(the Christ)의 생명이 내 삶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생명이 되었다면 당연히 나도 예수(a christ)인 것인데, 이것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면 성경 덮어야 한다. (여기서 the와 a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단이 되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된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근원(어디서 왔는지)과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명이 생명을 표현하는 세계를 자연이라 말하기에 뭔가 당연하고 걸림이 없는 것을 자연스럽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표현하시고 드러내심이 참되지 않다고 하는 것이나, 오늘날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다 생명을 모르는 세계, 곧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안목일 뿐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생명이시기에 그 생명을 스스로 증거하심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가 우리 안에서 넘치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고 느끼기에,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론과 방법으로 그것을 흠집 내려 해도 안 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려 해도 도무지 부인할 방법이 없는 정도는 되어야 예수 믿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수가 속에서 넘쳐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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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또 유대인들과 변론하신 초막적이라는 명절 끝 날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아주 분명한 기준일 수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가?’에 확신을 가지고 답을 할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에 토를 단다. 자기의 형편,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타협을 한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되어 간다.’는 식이나, 아니면 ‘그러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말은 주로 목사들이 한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 사람들에게 되지도 않는 일을 설교하느냐?’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심령 안에서 생수 곧 자신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 어디 조건이 있는가? 조건은 단 하나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뿐이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듯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서 자신이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인정이라도 빨라야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말씀들은 그렇게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악을 쓰면서 본질을 망각하고 지키려 하면서, 이런 말씀은 거꾸로 왜 의역을 하고 말씀 그대로 보지 않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말씀도 성경 그대로 사람이 뱃속에서 어떤 물을 토하여 내듯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 한다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말씀은 생수, 곧 생명을 살리는 물, 곧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다. 누군가의 말씀을 들으면 생수를 마신 것 같아 지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서 그런 말씀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 밖의 어떤 사람의 말씀이 생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나의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이 살 수 있는 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삶을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도 비슷하나 말씀을 하셨다. 그곳에서는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군지 아는 것,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심령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이 마실 수 있는 것이 나온다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자기 삶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신도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것이다.


신앙은 분명히 간절한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 간절한 것이 아니다. 간절함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간절한 것이고, 있어야 할 것이 있으면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지 않은 시절에는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기를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간절함으로 구하여야 하나, 그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는데도 아직도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매달리고 있다면, 어쩌면 안타까운 일일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의 분량이 그럴 수 있기에 그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교회에 다녔는데, 한 번도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그것을 바라는 간절함으로만 다녔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 암울하다.


신앙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종점이 아니라 그것이 시작인 것이다. 구원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구원은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 역시 신앙의 시작이다. 이것이 끝이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수는 생명이 마시는 물이니 당연히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도 없는데 생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냥 공업용수나 있으면 되지.


사람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생수가 넘쳐나는 것이다. 그 넘쳐남의 분량은 믿음의 분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저 울고 자기만 한다고 짐승이라 하는 이가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 역시 같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생명은 언제나 생명이니 것이다. 그 생명이 자라면서 그 자람에 따라 그 생명의 본연의 능력과 삶을 보이듯, 신앙도 그런 것이다.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 그 구원이 바로 신앙적인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 시작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서 생수를 마실 생명이 없거나, 스스로 생명이라 여기긴 하나 밖에서 생수를 듣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스스로 생명이라 여기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도 자신도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생수가 넘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다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아직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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