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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설명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아주 어려운 말씀이었다. 사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그러면서 성찬식을 하는 것이 의아스럽긴 하지만. 하지만 ‘곤경에 빠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다. 확실하게 믿노라 하면서 늘 어렵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말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영생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먹는 떡의 이야기가 아니라, 떡을 먹어서 사람의 몸의 일부가 되듯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보고 믿는 이의 정체성과 삶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지심을 떡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아주 핵심적인 체계(메커니즘)이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의 것으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자기가 생각할 때 이것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몰랐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다. 그래서 성경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고, 또한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사람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이 사람에게 어렵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성경이 어렵다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기 맘대로 보기 때문인 이유 밖에 없다. 세상 살기 힘든 것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서이듯, 성경이 어려운 것 역시 자기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읽고 보기 때문인 것 밖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는(정확히는 걸림이 된) 제자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육에 관한 것으로 보면 걸림이 되고, 그 뜻을 아는 것에 무익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간을 읽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제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시고, 또한 자신을 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믿지 않는 자들이란, 12제자라고 보기 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떠나가 버린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 사람이 유다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떠나게 된 이유가 된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고 하신 것을 인함이다. 이것은 언뜻 구원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예정론이라는 것이 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에 있어 어떤 사람은 될 사람, 어떤 사람은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이라는 개체를 기준으로 정하지는 않으신다. 홍길동은 되고, 일지매는 안 된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홍길동은 어떤 행동을 했으니 되고, 일지매는 무엇을 하지 않았으니 안 된다는 것, 또한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오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 마음을 뉘우치는 사람,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인간의 정체성을 보고서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낸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생인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인도된 사람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닌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의문을 가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면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하시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에 좋은 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남자가 여자를 얻음에 있어 그 힘을 사용해서 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적인 폭력을 행사할 경우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그것을 범죄로 여긴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통하여 자신의 혈통을 이을 자녀를 얻음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결정권이 여자에게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가 아무리 그 혈통을 이을 여자를 원하여도 여자가 원치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순리인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 앞의 여자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여자와 같아서, 자신이 어떤 남자의 아이를 낳을 것인지를 선택함과 같이, 자기 안에 어떤 의를 받아 들여서 그 의가 자기의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사람이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가지셨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런 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기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런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가 어떤 것을 자신의 의로 삼을 것인지에 대하여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보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만들어졌는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좇고, 세상의 돈과 명예가 자기 삶의 목적인 줄로 알고 자리를 떠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지 상태에서 하나님과 돈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사람이 자기 맘대로 그 자리를 이탈하여 죄에 이르렀는데, 그렇게 되느냐? 아니면 자기 자리를 회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고서, ‘아 저 모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나란 존재의 존재 이유구나!’라고 깨달으면 예수님께로 온 자가 되고, 그것을 모르고,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이 육신을 먹이시는 예수님으로 인식하면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자는 어떤 개체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사람 앞에 보이시는 그 상황,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볼 수 있게 십자가에 높이 다신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지를 정하시는 사건이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았을 때,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된 자 중에서 놋뱀을 보고서, 그 거울에 비친 뱀 같은 자기 모습을 확인한 사람은 살았듯이, 예수님을 보고 자기 정체성을 깨다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인 것이다. 그 깨닫는 정체성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을 보기 전에 그 정체성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육신의 모양과 개체를 세상의 본질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는 문제를 사람의 개별 개체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 숫자에 집착한다는 것은 세상의 본질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탄로 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그러니까 the Man이라는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존재로 만드셨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a mana이라는 개체들은 그 the Man의 정체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a man은 the Man이 표현된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the Man이라는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셨고, 그 the Man의 하나인 각 사람이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것인지의 문제만 남겨 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께로 보내시는 자들은 the Man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은 자들이지, a man 중에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한 개체로서의 사람이 사람(the Man)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기의 것으로 삼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는 구원 받는 사람의 정체성을 정한 것이지, 개체를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체는 결국 어느 것이든 그 정체성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법만 있으면 사람은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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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얻는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 26. 11:43 Writer : 김홍덕

야곱은 두 아내를 얻어서 아들들을 얻는다. 레아가 아들들을 낳자 이것을 시기한 동생 라헬이 자기 종을 남편 야곱에게 주어 아들을 얻고, 이것을 본 레아 역시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또 아들을 얻고,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시므로 라헬이 요셉과 베냐민을 얻어서 12명의 아들과 디나라는 딸을 얻는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된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만 하나님의 민족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아직 그 착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선민의식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성경의 본질,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를 그들의 성전과 율법과 관습을 통해서 보이셨다. 즉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삶이라는 어떤 삶인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이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아닌데, 이것을 모른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바울 사도가 그렇게 노력했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할례나 율법과 같은 이스라엘의 모든 관습과 규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인 사람이 사는 삶을 표현한 것이다. 마치 심청이가 바다에 뛰어 들어 그 효를 표현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습이라는 모양이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그 외형과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에 이 땅위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신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의(헌법)의 다스림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자신의 국가관과 삶의 방식과 의로 삼는 사람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의가 된 사람들이 모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의가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어딘가? 그곳이 바로 교회다.


비유컨대 이것은 영토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에 가 있어도 대한민국의 법 그 아래 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도 그 삶의 의가 하나님의 의에 있다면 그 사람은 육신이 이 땅에 산다고 해도 이미 천국의 사람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살지 않았던 사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은 천 번을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야곱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씀하시고자 한다. 그 시간의 역사는 수천 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봐도 그것은 하나님께 긴 시간은 아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이 야곱의 이야기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그것을 보고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을 얻음으로 그 아들들이 지파가 되고, 그 지파들이 번성하여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이삭과 또 그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 곧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작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야곱이 아들을 얻었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여러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모양은 달라도 하나님의 의는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가 일률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 딱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도 여러 가지고 귤도 여러 가지며 소도 양도 딱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규격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신앙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상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금이나 은을 쳐서 모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쳐서 모양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을 자기 의지대로 규격화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즉 ‘교회에 다니려면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도 틀린 것이고, 봉사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법이 아니라 우상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아비조차 의도한 것을 반영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인데, 하물며 자기 나라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구성원을 어떻게 몇몇 사람이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도 그 성격과 행실이 다양했다. 아버지가 같지만 다 달랐다. 또한 네 명의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즉 하나님의 의가 여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4”라는 숫자가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네 명의 아내요 어머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 가진 그 다양한 성품과 모양과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며, 그렇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모든 의가 다 한 나라로 있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요, 이 땅위의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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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 대하여 많은 신앙인들이 비판적인 소리를 내지만 사실 지금도 그 때 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같은 이들은 적어도 범죄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들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데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 그것이 어이없고, 또 자기 몸이 영생을 위하여 사람들이 먹어야할 떡이라고 하니 그 또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준다는 말이며, 백번 물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또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황당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왔다는 그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신성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강도는 다르지만 지금으로 치면 ‘무슨 이단 같은 소리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육신과 행동 그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형식을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오해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다. 사실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육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산상수훈에서부터 너무 많이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러시거나 말거나 자기 생각과 기준과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은 같은 상황이다. 어쩌면 교회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6-57)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소고기를 먹었다면 소고기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가 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그 정도의 상식만 있어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색다르고 눈에 띄며 그 말씀을 상고할 텐데 자기가 육신의 일을 본질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매주일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을 드린다. 그 시작이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닌가? 그렇게 입만 떼면 하늘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온 떡이라는 것이, 음식이 소화되어 육신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거의 난센스에 가까운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심과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도 예수님을 인하여 산다는 것, 이것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삶이 되는데, 이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께서 하신 말과 행동만 따라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배가 불러서 예수님을 찾고 임금 삼으려 하는 것이며 예수님 없이 항해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성경,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에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이기에 예수님께서 숨만 쉬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듯,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심이 그러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모든 삶이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지를 늘 의심한다. 아무 것도 안하고 믿는 마음만으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헌신 하는가 의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셨으면 그런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랬으니 나는 안 되지만 그럴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그 믿음이 있으면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예수님을 먹지 않은) 것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본성인 행동이 있고, 의무나 다른 목적이 있는 행동이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하여 교회 청소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전이라는 감사함에 청소하게 되는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천국에 가기 위하여 청소한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게 되고, 본성인 사람은 원래 자기 일처럼 하니 생색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자기 몸과 본성이 되어서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 그런 행동을 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분명한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인데, 그렇게 된 연고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 그것 때문이다. 그것을 본질로 보면 어떤 것이든 자기의 유익이 되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니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유익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유익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적반하장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

이는 분명히 방향성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보려고만 하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의 의가 되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 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믿음은 방향성을 반대로 해서, 육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믿고서 수도한다면서 심지어 자기 육신을 학대하면서 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향이 하나님에서 시작되어 사람으로 표현되면 너무 쉬운 일인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유전자대로 살고, 돌고래는 돌고래의 유전자에 따라 사는 것이듯,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정체성으로 수용한(믿는) 사람은 그 생명이 본성이 되어 그것대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삶인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삶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것이 되면 그 생명대로 사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 힘든 십자가도 그냥 지신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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