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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냉대했다. 기적 때문이 아니라 배가 불러서 온 것이라고. 밥 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또 기적으로 먹이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을 냉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적어도 이런 의심을 가지고 봐야 한다.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오병이어에서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이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므로 그것이 음식을 먹음과 같이 먹어서 자신의 정체성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먹지 않아 자기 안에 예수님이 없는 상태로 배를 타고 세상으로 나갔다.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오병이어 사건 전후의 모습만이 아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를 일으키는 예수님이 육신의 배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임금 삼으려 한 것이나, 예수님을 믿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세상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 경쟁 종목은 세상의 부와 명예는 물론이고, 도덕적 우월감과 신앙적 우위에 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다. 


이는 종목이 문제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다. 방식이라는 것이 결국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도 남보다 나은 신앙이라는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와 혼음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 이런 신앙관을 사마리아라고 미가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생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얼마나 표현하는지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는 것 역시, 육신의 문제를 본질로 알고 신앙의 초점을 그것에 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이 썩을 양식이기 때문이다. 육신이나 세상의 것이 다 썩어 없어질 형식에 관한 것인데 본질이 아니라 형식을 신앙하는 것, 예수님의 본질은 보지 않고 표현된 형식을 가치로 보고 임금을 삼는 것, 교회에 다시는 이유가 육신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썩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것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어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그 썩을 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일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며, 한 마디로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바로 그것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배가 불러지는 것과 육신의 배를 불려주는 이를 자신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모세가 준 떡,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울러 말씀하신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 늘 오해한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오천 명의 육신을 먹인 것 때문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일도 육신의 노동과 수고와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오해한다. 그래서 교회가 늘 일을 만드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이란 뭔가 몸으로 수고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으니, 그렇게 할 일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늪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 즉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심을 믿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여주신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과 본질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이것을 두고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단언컨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안에 있으면 자신이 살아 있고, 그 생명을 표현하는 행동과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데, ‘아무 것도 안 해도 돼?’라고 묻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이것은 땅에 씨를 심으면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씨는 보기에 살아 있다고 여길 것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다른 책과 다를 바 없는 문자로 된 성경책 그것일 뿐이고, 또 어떻게 보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어 버린 예수님은 겉보기에 생명이 없어 보이는 씨앗과 같다.


하지만 그 씨가 땅에 심겨서 생명이 되듯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그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의 심령 안에 심겨져서 그것이 씨앗이 심겨진 곳의 흙을 생명으로 바꾸어 내어 그 씨의 이름을 가진 열매는 맺게 되듯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그 잉태함이 성령의 잉태함이고, 성경이 말하는 행함이 그 생명의 역동성과 본성과 모습과 행동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단순하고 확실한 말씀이다. 사람이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배가 불러서 예수님을 배불려 주는 임금으로 삼으려는 그 안목, 육신의 일을 삶의 본질로 알아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어두운 눈 때문에 그런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두움만 벗으면 너무 쉽고, 밝은 것이며, 사람이기만 하면 아무 어려움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 하나도 없는 복음이고 쉬운 짐이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으로 나기만 하면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말(의사전달)도 하고, 움직이고 일한다. 그리고 역사를 만들어 왔고, 또 만들어 간다. 하나님의 생명도 동일하다. 모든 것, 이때까지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며 수고한 모든 육신의 일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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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22-40) 생명의 떡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1. 11:31 Writer : 김홍덕

밤(날이 저물어)에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사람이 왜 존재하고 왜 사는지를 모르는 빈 배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오병이어와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전하신 그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가 볼 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다. 빈 배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지 않아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인생, 그렇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배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 세상은 늘 광풍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배 안에 계신 것과 같이, 또 예수님을 먹어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의 생명과 본성이 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신 것과 같이 바다 같은 세상이 잠잠해진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다는 것이 그 떡과 예수님이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 들에 있던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이 되라고 보이신 것임에도, 사람들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의 문제인 소유와 공로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고, 그 정체성에 맞지 않는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산으로 떠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예수님 없이 바다를 건너려 한 것이다. 즉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모든 인생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살아야 함을 보이신 예수님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을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하고, 오천 명이 넘는 이들에게 빵을 먹이려면 돈이 얼마가 들 것이라는 식의 가치관을 가진 제자들의 마음과 안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면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을 덮치고 죽이려 드는 것과 같이 다가옴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의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위협과 두려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위협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이 삶을 위협하고 신앙의 적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으로 삼고 싶은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떡을 먹어 그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은 아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예수님의 정체성도 결코 볼 수 없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한 아버지 하나님에서 나온 하나님의 표현인데, 그것이 어떻게 적이겠는가? 한 몸 안에서 서로 장기들이 거부반응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예수님의 표적을 본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적을 바로 보지 못했기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으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만 육신의 배가 부름과 같이 예수님의 능력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이렇게 블로그에 하나님의 존재의 신이심을 전함에 있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느끼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새벽 운동을 가는 길에 만나는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는 사람들의 열정이나, 인터넷 유듀브에서 만나는 절고 아리따운 청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는 신앙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말로 간절하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자신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먹으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먹은 음식이 우리 몸과 삶의 에너지가 되듯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우리 삶의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이다.


이것이 생명인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삶의 생명이 또 본성이 된 사람만이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생명이 있고 산 것이라는 것이다. 시간을 보려고 산 시계가 시각을 알려주지 않으면 죽었다고 하듯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한 인간은 육신으로 숨 쉬고 살아 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과 성품과 존재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지 않으면 제 아무리 튼튼하고 활기찬 몸을 가졌다고 해도 죽은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다면 그 육신의 삶이 심지어 처참하고 살았다 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육신을 가진 인생의 의미와 십자가의 의미가 자신의 삶의 정체성이요, 삶의 모든 것의 근원과 뿌리요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하늘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임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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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1-21) 바다를 잔잔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0. 17:1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 해서 예수님께서 혼자서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보여주신 것을 육신의 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왕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산이라는 것이 여러 의미가 있지만 대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가 짙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이나 임금으로 영접하고 믿으려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산으로 가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육신의 문제, 즉 소유와 공로의 신이 아닌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아들이요, 그 세계의 왕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에 이어서 16절이 “저물매”라고 시작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시각이 해가 저문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성경을 기록한 요한 사도의 안목에는 그것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육신의 먹거리를 해결하는 신으로 여기면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즉 빛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요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의미고, 사람들도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즉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육신의 먹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으면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그 안목과 삶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이 캄캄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늘 어둡고 불확실하다면서 하소연한다. 사람이 자기 삶을 해가 저문 세상과 같이 어둡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나 해결하는 주님으로 믿는 것도 포함된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인생의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정체성,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니 예수님을 모르면 자기 삶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연 듯 자신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사색이 들면 소주를 마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 정체성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알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딱히 소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어도, 인생이 힘들고 어두운니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러 간다면, 육신에게 일어날 일이 어떠할지 모르는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왜 존재하는지, 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이 존재의 의미를 예수님을 통해서 알고자 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이냐를 주님께 묻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의 눈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으로 삼고자하나 예수님이 산으로 가신 것은 단순히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이 바다로 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없이 바다로 갔다는 것이다. 어두워진 것이나 예수님이 없이 바다 같은 세상을 사는 것이나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 사도는 보았다는 것이다. 큰 풍랑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은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삶의 풍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풍파는 알고 보면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일을 뜻하는 것이지, 세상이 사람을 괴롭히라고 창조된 것은 아니다. 즉 바다를 건너는 배와 같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바다 같은 세상에 풍랑이 이는 것이지, 세상이 자기 맘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풍랑 이는 바다가 아니라 여행 온 바다와 같이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 맘대로 세상이 되지 않고, 그런데 그것을 세상이 험하다고 푸념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배와 같은 자기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주인으로 있으니 세상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고, 그러니 세상을 풍랑 이는 바다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배에 계시지 않다는 것은 결국 자기 정체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빈 그릇과 빈 배와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뜻을 담아야할 그릇,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자기 안에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라는 것임을 요한 사도가 봤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알면 세상이 풍랑이 아니라 순풍이 되는 것이다. 그 뜻이 사람 안에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배에 예수님께서 타시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되려 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 인생이 엮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가 하나님과 같이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만든 것도 아닌 주제에.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로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계시면 세상이 풍랑이 아니라 순풍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만든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니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과 마찰될 것이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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