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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0-47) 모세의 고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16. 12:2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보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고발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믿음이 없는 이들을 고발하는 자가 있는데 바로 모세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고 하시고,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소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지 않는 듯하다. 신약시대(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에 예수님을 믿노라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자신이 세례 요한은 고사하고 모세보다 크냐고 물으면 움찔한다. 자신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과 모세를, 또 세례 요한을 같은 법이 적용을 받는 세계에 두고서 보기 때문이다. 즉 자신도 예수님을 행함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믿음의 척도를 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보니 행함에 있어서, 또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광야에서 복음을 외친 세례 요한과 자신을 비추어 보니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관점, 그 관점을 두고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를 고발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람이 가진 자기 신앙관이 자신을 심판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어디선가 본 아주 익숙한 모습이다.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아담은 자기가 가졌던 하나님과 같이 되려던 그 마음이 자신을 심판했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행함으로 섬기려 하니 자신의 행위가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지 않으므로 스스로를 늘 심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고발하는 것이다.


모세는 율법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율법이 우리를 고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기본적인 구조가 Do 아니면 Do not 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이 다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관, 무엇이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지에 대한 기준이 사람의 행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율법의 적용을 받을 것이기에 율법, 곧 모세의 고발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모세 곧 율법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가치관과 믿음으로 가진 사람은 율법의 고발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이 미국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과 지극히 작은 소자를 비교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이다. 즉 나라와 세계가 달라지면 율법의 가치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 곧 모세의 고발을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에게서 서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얻는 것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이니 그곳에서는 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영광이 되는 곳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적인 의사 결정이 영광과 존경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서로의 행위를 두고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를 영광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이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신앙인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신앙의 모습이라 설파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역설 같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율법을 알면 복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너희가 모세를 믿으니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바로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모순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율법도 복음도 모세도 예수님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것 같은 말씀에 대한 모든 해결책은 존재의 목적에 대한 안목이 있으면 어렵지 않다. 즉 모세도 예수님도 또 율법도 복음도 왜 우리에게 주셨는가 하는 것,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영혼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있어 그 생명으로 살아내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우리에게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세와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안내하는 안내자이다. 목적지는 아니다. 그리고 또 그 누구도 그 여정을 생략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바로 믿었다면, 모세의 모든 글(행간)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 모든 모세의 글이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모세가 기록한 성전이나 율법의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을 설명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속 심령과 삶의 모양이 어떠한지를 설명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지구상의 누구보다 모세의 율법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인데, 왜 그들이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같다. 사람들이 성경을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성경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 말씀은 오늘도 동일한 말씀이시다.(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오늘날 신앙을 가졌다면서 본질이 아닌 형식을 믿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을 문자 그대로 본 것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나 완전히 같은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심이다. 그 율법들을 정말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진정한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똥개 훈련시키듯이 율법을 주시면서 지켜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니, 그러면 사람이 가진 유일한 재산인 자기 삶을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율법을 딱 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고백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연단하고, 절제하고, 훈련하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그 말씀을 지켜내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이것이 교묘하게도 요즈음은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으니 그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신앙은 그것이 아니다. 말씀을 주신 목적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사람은 절대로 이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 ‘육신으로’ 라는 것은 육신의 행위나 노력, 그리고 고 노력의 공로와 결과인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아무리 해 봤자 원래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주인의 곳간에서 양식을 훔쳐서 주인께 바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게 도둑이지 뭐겠는가?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어떤 육신의 능력이나 또 신비한 능력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난 것이다. 아들이 뭐겠는가? 아버지가 가진 의의 본체가 아들이 아닌가? 그것 이상으로 의로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육신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은 늘 모세와 율법이 하나님께 그들을 고발하고 상소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그 어느 순간에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심판거리가 있고, 하나님께 고발할 것이 넘쳐나는 세계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모세가 너희를 고발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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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0-47) 영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15. 13:54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상고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지금도 사람들은 영생을 얻으려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묵상한다. 그러다보니 그게 족쇄가 되어 때로는 교회가 시키는 일에 의미를 모르면서, 또 때론 내키지 않으면서도 하게 된다. 영생과 천국이 삶을 볼모로 삶는 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떤 설교자(지금은 대구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교회의 목사)는 영생을 설명하면서 영원이란 태평양의 동서에 있는 모래를 비둘기 한 마리가 혼자서 다 바꾸어 옮기는 세월이 영원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친 소리다. 영원이라는 개념이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생이라는 것을 달력이 가는 것과 같은 시간의 영원함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이라는 것을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으로 표현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원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다.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가진 본질이 있고, 그것을 형식으로 나타내면 크로노스적인 시간, 달력을 넘기는 시간 개념으로 볼 때 끝나지 않는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 영원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다.


영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태에 관한 것이다. 한 사람이 수영을 배워서 수영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을 죽여서 수영할 수 없게 만들 수는 있어도 수영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수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생명 세계에 충만한 것이다. 오늘 내가 먹는 사과 한 알은 내가 먹어 버리면 없어지지만, 사과라는 세계에서 사과로서의 정체성은 영원한 것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으로 육신이 다 하는 날까지 살아낸 것은 사과 한 알이 먹어 없어진 것과 같이 없어지나 사과로 영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영원한 것이다.


더욱이 사과가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 그 존재의 목적이듯, 사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이 땅에서 살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았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은 육신 안에 있는 인간의 정체성 그 본질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살았기 때문에, 육신의 장막을 벗고 나면 그 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만 남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과 본성이 같기에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 육신으로 살 동안 그 사람의 정체성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이 않았다면 제 아무리 세상에서 나라를 구한 영원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영웅적인 삶은 다 육신의 영역,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면 그것도 함께 벗어 버리는 것이니 아무 것도 남을 게 없으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그 무엇도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그 영원한 정체성과 같은 정체성을 가졌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영생의 답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며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께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그 육신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모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정체성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영광이다. 병자를 고치고, 예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광은 십자가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즉 그러한 것은 사람의 본분이 아니며,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하는 영광, 곧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과 이미지는 하늘을 날고, 바다를 헤엄치며, 바다 위를 걷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내시고자 했던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 그 정도는 하나님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연약하게 만드셨다. 오죽했으면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볼 때 너무 형편없어서 ‘이런 꼴로 어떻게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는가?’ 여길 정도로 부족한 존재로 여기겠는가? 하지만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신 뜻이시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형편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영광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법으로 경쟁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세상의 경쟁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임했더니 더 잘하게 되어 판사가 되고, 사장이 되어 사람들이 우러러보니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그것을 신앙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라고 하신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요 17:3)>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는 것이나,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말씀이 속에 있는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 되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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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존재와 행하신 일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 학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자기 삶이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클러치를 살짝 떼면서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된다는 것은 수동기어 차량에 대하여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만 실제로 수동차량을 운전해 본 사람이라면 그게 머리로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님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심이 그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 5:37-38)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 이 속은 머리가 아니다. 사람의 속은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즉 본성이다. 그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본성(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표현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그냥 예수님을 머리로 믿고, 객관적인 입증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다고 하셨다. 그 증거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사랑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말씀도 있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았다면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이는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을 가진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육신을 떠나야 영을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다를 가르고, 바위를 쪼개는 바람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육신이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 상태 자체가 죽은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영이신 하나님을 보고 듣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거듭남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듣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시고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서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하나가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속에 거한다는 것이 또한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말씀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그렇게 자기 안에 있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삶과 예수님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니 당연히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자기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할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영접치 않는다.’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은 법과 생명이 자기 안에 없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의 모습이 오늘날도 만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믿노라 하지만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분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하고, 또 말씀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아니라, 육신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믿음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보다 못한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행실은 지금의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존재의 이유와 정체성이 되고, 또한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모양을 표현해내는 본성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살 동안에 다른 사람이 당하는 화를 당하지 않고, 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헌금 했더니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그 헌금이 천국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죽고 나서 천국에서 부요하게 산다는 식의 믿음을 가졌다면 그런 모든 믿음은 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의 아들의 기준을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삼는 이들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영광이라는 것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므로,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예수님의 성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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