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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내 몸의 일부가 되고, 그 먹은 것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로 삶을 살아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고, 어떤 것을 먹는다는 것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이다.


오병이어는 그 맥락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주신 음식, 그것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그 남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일으키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야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경험이지만, 2,000년이 훨씬 넘은 지금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대할 때 남은 것은 단 하나, ‘내가 믿는 예수님이 그런 능력이 있다.’는 그 객관적인 사실 그것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능력이 있으시니 내가 먹고 살기 힘들 때 기도하면 내게도 그런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믿는 것, 그 의미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나, 그때를 기념하면서 빵이나 떡으로 성찬식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삶의 본질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먹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보리떡 다섯 개, 보리떡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의미일까?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행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조건이 있었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만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면 오징어 같은 것은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고기 어종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독이 든 복어와 같은 물고기도 먹는데 어종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늘과 지느러미를 조건으로 하신 것은 큰 물, 고기가 사는 큰  물은 늘 세상을 의미하기에, 그 세상 속에 있지만 비늘이 있어 세상과 자신이 구분이 되고, 또한 지느러미가 있어 인생의 방향이 분명한 생명을 먹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주어 먹게 하신 것은 보리떡과 같은 사람, 또한 세상에서 방향성과 구분(거룩)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되고 방향성이 있는,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것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나누어 주시고 먹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사람들이 굶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의미나,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거나,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는 환경 운동가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병이어는 결국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기적을 일으키실 이유가 없다. 선지자들의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바로 기적을 행하시면 되었는데, 뭐하러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수고를 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먹는 것은 먹은 것과 먹는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의미라는 것을 상고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다.


많은 종교나 심지어 성경의 말씀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안위를 믿는 사람들까지, 그 모든 이들의 신앙은 자아 밖에 있다. 그들이 신께 또 정체성을 잘못 알고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며 믿는 것 모든 것이 다 자아 밖에 있다.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일, 자기가 결혼할 상대, 자기가 속한 조직과 사회의 일, 그리고 그 육신의 안위와 같은 것들이 전부이다.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자아 정체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신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자아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면 자기가 살고 있는 모양과 눈에 보이는 자아 밖의 일을 만물의 본질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백조임을 몰랐던 미운 오리새끼의 어린 시절과 같이.


오병이어가 되었던,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내가 먹을 수 없으면 성경이 아니거나,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오직 우리 인생들이 먹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삶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먹을 수 없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값이면 단언컨대 이 신앙을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낫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닌데 매달릴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일도 그렇고 성찬도 그렇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인생이 그 모습을 보게 하신 일도 다 같은 목적과 이유이다. 우리 인생들, 육신을 가진 우리 모든 인생들, 그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 그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에 의미가 있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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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는 요한복음 외에도 모든 공관복음에 다 나온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세례요한의 죽음에 이어서 오병이어 사건이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빈들에 모였다고 했다. 들, 곧 광야는 세례요한이 있던 곳이다. 세례요한이 죽고 없는 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측은(불쌍히)하게 여기셨다고 했다.(마 14장)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14:13-21 오병이어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병이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 그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에서 이 오병이어는 세례요한이 죽고 난 후의 일이다. 이 의미는 한 사람의 마음, 심령 안에 있는 신앙의 여정에서 세례 요한의 신앙을 지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자기 의를 표현해내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즉 먹은 것이 삶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먹으라고 하신 것은 식인적인이 표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의 정체성이 너의 정체성이 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떡을 떼어 축사하셨다는 말씀이 있는데, 축사는 접촉 신앙의 표현이다. 즉 떡과 축사하시는 예수님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사를 지낼 때에 제물의 머리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손을 대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요한사도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결국은 예수님을 먹어야 하는 사건으로 확신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마치 먹은 음식이 몸의 일부가 되듯,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확신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지고 인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이 그러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병이어는 기적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대단한 것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 그것도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니 적어도 만 명을 먹인다는 것은 봐도 믿기 어려운데 2,000년 전에 그랬다는 것을 기록해 놓고서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따라하시기를 바라신 일이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성경은 넘사벽이 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빈들에 모인 사람, 즉 인간으로서 그 존재의 정체성이 빈들처럼 비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먹고 남음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라는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2는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창세기에서 상세하게 다루도록 한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신 떡은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이고, 보리떡이다. 보리떡에 축사를 하셨으니 예수님과 보리떡이 같다는 것이다. 아이가 가져왔다는 것, 보리로 만든 떡이라는 것은 모두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아이는 말 그대로 아이이고, 보리떡은 그야말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서민의 음식이다. 부자에게 보리떡은 먹기에는 자기 자존심이 상해서 안 먹기는 해도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리떡을 먹는 사람들은 부자가 먹는 것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것이다.


성경에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도 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도하면 중병을 낫게 하는 것과 같이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보리떡은 아니다. 어린 아이의 일은 더더욱 아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은 부자가 보리떡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것을 극복함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이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녀와 세리와 같이 먹고 마실 수 없었다. 세리와 창녀의 모습은 그렇게 자기가 율법으로 감추고자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 벽,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보리떡이고, 그것이 믿는 자가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떡은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 사는 것, 그것이다. 인간으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창조목적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체결하는 것으로 사는 것은 모든 나사가 할 수 있는 보리떡이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보리떡은 민중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모습의 하나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야만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오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보리떡, 예수님의 십자가,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청렴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 그 목적대로 사람으로 사는 것 그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떤 이는 가난한 자를 돌보고, 어떤 이는 부자가 될 수 있음에도 청렴하게 살기도 하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야만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핵심과 내용이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 있어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도 의미가 있고, 청렴하게 사는 것도 의미가 있으며, 도덕적인 것도 의미가 있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먹으라고 나누어 주신 생명의 떡,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그 생명의 떡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람의 정체성이니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축사하신 떡을 먹어 떡이 사람의 몸이 되듯,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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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아서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 16. 22:34 Writer : 김홍덕

야곱은 두 명의 아내를 얻었다. 레아와 라헬이고, 그들은 그의 외삼촌의 딸들이다. 그런데 야곱이 동생인 라헬을 사모해서 외삼촌 라반과 약속하고 7년을 봉사한 이후에 신혼 첫날밤을 맞이했는데 외삼촌은 약속한 라헬이 아니라 그 언니 레아를 잠자리에 보내었고, 야곱이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사실 이건 상식적으로 그렇게 이해가 되는 부분은 아니다. 관습적으로 신부가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7년 이란 세월을 보면서 살았다면 목소리라도 구분했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은 아님을 이 블로그를 통해서 누누이 이야기 해 왔다. 성경은 어떤 사실의 진실성을 증명 받으려고 우리 앞에 주어진 책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 그럼 우리도 아내를 두 명, 아니 네 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보는 것은 더 웃긴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의 진실성을 증명하여 믿음을 확신하는 것이나,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나 둘 다 책으로 치면 행간을 읽지 못하는 것이고, 성경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아와 라헬에 대하여 말하기를 ‘레아는 안력이 약하고, 라헬은 아리땁다.’고 했다. 안력이 약하다는 것은 안목이 약하다는 말이다. 안목이 밝지 못하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을 육신의 눈이 약하다는 육신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을 얻어서 나라의 기초가 되기 위하여 얻은 처음 안내는 안목이 어두운 여자(형식)이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개인의 신앙이 나라의 신앙으로 전환을 맞이하는 시점의 여정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이라면, 그런 안목과 빛이 비췬 세계가 열린 이들이 만나고, 또한 그 만남의 세계 안으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여정이 바로 야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시대가 야곱으로부터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공동체의 시대를 맞이하는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양(아내, 곧 라헬)을 얻는다고 했지만 속아서 자신이 원하는 않는 안목이 어두운 삶의 모양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여정을 거쳐서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자, 아내는 남자가 가진 혈통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의를 아들로 표현하는 존재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는 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삶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라고 하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아들들이 모여서 교회인 것이다. 즉 아들과 같이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아내, 여자는 사람의 삶의 형식인 것이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건물을 지어 놓고, 세상의 법칙대로 서로 경쟁하면서 시험을 쳐서 설교 먼허를 받은 사람을 이력서 보고 뽑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갖추는 것이지, 생명이 그 생명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닌가?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야곱이 원치 않았던 레아를 얻는 것과 같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형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벗어 던지고서는 되지 않는 것이 생명 공동체라는 것을 야곱이 레아를 속아서 얻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정체성은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그 가진 모든 성품과 모양까지 자신의 원하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이력서를 보고 직원을 채용하듯이 목사를 뽑고, 자기 목회의 철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내 보내고 자기 철학에 맞는 사람만 교회의 구성원으로 취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하여 공동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라도 참 교회의 삶을 누리려 한다면 야곱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레아가 자신의 아내, 곧 자기의 의를 표현해 낼 형식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벗어버리지 않고, 수용하고 오히려 다시 자신이 원하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또 7년을 수고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과 같은 여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비약이 심한 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비약으로 보이는 것은 마치 운동하러 다니지 않는 사람이 새벽 운동이 좋은지 저녁 운동이 좋은지를 판단하고 논쟁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이 말씀이 과연 원치 않는 삶의 형식을 수용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여정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을 거쳐내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다. 그런 여정을 거친다는 것은 천지창조가 그 사람의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빛이 비취어서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으로 인식되는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 적이 있는 사람, 그 뿌리에서 시작된 생명이 있는 사람이어야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정을 거친 사람이고, 그런 여정이 자기 안에 간증과 같이 있는 사람은 야곱이 레아를 얻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자기가 원치 않는 삶의 형식을 순종하는 여정을 거쳐 간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게 된다. 그 생명이 그 여정을 거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에서 남자로 나면 군대에 가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레아가 안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안목이 부족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신앙적인 안목, 곧 하나님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그런 아내를 맞이해서 아들을 얻고 그 아들들이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잘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는다고 사람이 죽기 위하여 태어난다고 하지 않듯,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안목이 부족한 형식도 모여야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부족한 짐승이 탔다는 것이나, 고넬료를 받아들이라고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시작이다. 즉 야곱의 여정은 교회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고, 한 사람이 교회를 누리기 위하여 어떤 여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교회는 야곱이 원치 않은 레아를 아내 곧 삶의 형식으로 수용함과 같이 자기의 의와 다른 이를 수용해야 교회가 되고, 자기 기준으로 볼 대 부정하게 여길 만한 것이 있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교회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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