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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이다. 이후로 이 요한복음은 거의 ‘예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17장에 나오는 기도문을 예로 든다면, 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소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던 거리는 돌 던질만한 거리라고 되어 있고, 그나마 졸고 있었는데 그 긴 기도문을 요한사도가 다 외웠다고 보기에는 힘든데 예수님의 기도 전체가 기록되어 있다.


이 요한복음 10장 이후의 말씀들은 정말로 소름끼치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소름이 돋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이 육신을 가리려 했고, 유대인들은 이 육신이 부정하니 율법을 지켜내어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지주의자들은 가능성이 없으니 포기해 버린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 말씀들은 어쩌면 요한 사도가 외워서 적은 것이라기보다, 성령의 감동이 요한 사도 안에 넘쳐남으로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다 기억이 나서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짜릿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요한 사도에게 임한 성령의 감동, 그 감동으로 인하여 거듭난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자기 생명이 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요한 사도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이 요한복음을 읽는 이들 역시 모두 자신과 같이, 아니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살게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렇게 되어야 하고, 될 수 있고, 그러려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 요한복음 10장 이후의 말씀이 주는 감동을 앞으로 하나씩 이야기 해 보기로 하고, 먼저 그 시작인 양의 문으로 들어가 보자. 중요한 관점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의 시작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첫 말씀이 <문>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나름 재밌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 그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했다. 듣는다는 것은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들린다는 것은 의도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고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것은 <소리>라고 한 것도 그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있는 의미가 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때 말씀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또 듣는다 해도 그 의도를 모르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죄인들 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구분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과 일치된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에게 맞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다. 같은 언어권이라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알아들었다고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만족하지 못하는, 아니 사람이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하심대로 그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잉태되어 그 생명이 삶을 주관하는 것이 되지 않고, 단순하게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는 사람에 그치는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 두 가지 이유 밖에 없다.


하나는 듣는 사람의 마음 밭이 자갈밭이나 가시밭과 같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목자가 진정한 목자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의 설교는 ‘사회적으로 어떤 유명세, 교단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설교냐?’ 하는 것은 의미 없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타락의 완성이다. 양들이 알아듣는 음성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신앙, 사람 안에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회복되어 그 생명이 그 삶을 주관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음성은 사람이 알아듣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맞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아니 더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들이 알아듣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갔더니 목사는 할 수 있어도 나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설교나, 시간 많은 사람은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설교나, 나는 할 수 없는데 사회적으로 성공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설교는 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설교요 말씀이요 음성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다 목자의 음성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설교는 전부 이른바 삯꾼 목자의 설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알아듣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앞서 가셨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알아듣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에 맞는 말씀이라는 것인데, 나와 동일한 육신으로 나를 만드신 이의 말씀이 오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를 먼저 십자가로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내가 지금 할 수 없지만 노력해야 하는 말씀으로 들린다면 아직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다. 교회에 가서 아무리 설교 들어도 그렇다면 그 설교는 다 삯꾼 목자의 설교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모습 그것을 보았을 뿐인데, ‘저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도 “내 짐은 쉽고 가볍다.”고 하셨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이 아닌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부르시고, 양들이 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고 계시고, 사람에게 ‘너의 정체성이 이것이다.’라고 부르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가 하늘에 나는 백조를 보았을 때 하늘로 날아 오른 것, 그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양들이 알아듣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리고 십자가로 그 정체성의 길을 몸소 보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생명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앞서가신 예수님과 같이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의 모습이고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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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일부러 안식일에 집중하셨는지, 아니면 수많은 이적 중에서 안식에 행하신 것이 성경을 기록한 제자들에게 더 각인이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면서부터 소경을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일은 어떻게 보면 약 올리는 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엇인 안식인지에 대한 개념이 없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일은 어떤 형태로든 맘에 안들 것은 분명하다. 모든 가치관이 형식을 바꾸면 의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옛날이야기만도 아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주일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답도 없고, 스스로도 지킬 수 없는 규례는 제쳐두더라도, 하나님 앞에 어떤 수고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그 가치관은 어느 날이 안식일이냐를 떠나서 안식이라는 것이 그 삶에 없는 것이기에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치셨으니 바리새인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을 들으시지 않는데 예수님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소경이 눈을 뜨게 되겠는가?’ 하는 것에 답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소경이 눈 뜬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아주 당연한 것인데, 문제는 자신들이 육신의 눈이 보이고, 육신으로 안식일을 지켜낸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착각이다.


영화 빅쇼트의 처음에 나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또 인용하고 싶은데, “난관에 부딪히는 것은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그 말이 이 상황에 너무 적합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육신의 신분이 목사나 장로 혹은 세상에서 나름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 모습으로 인하여 자신이 삶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알았다면 예수님도 알 것이라고 하셨다.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그들이 본 모세, 그들이 알고 있는 모세, 그들이 제자가 되려한 모세는 모세의 겉모습이다. 그들은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한다며 바다에 뛰어든 것과 같이 모세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를 가지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규정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목적이 회복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하게 되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블로그의 글은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식상하게 여겨지거나, 맨날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하나의 생각이 성경과 세상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라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생각을 깨달았다면 분명 안목과 삶이 바뀌기 시작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그 여자를 모세의 법으로 고소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둘씩 떠났던 것은 자신들의 신앙 근간이 바로 사람이 죄가 있으므로 율법을 지켜서 죄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죄 없다며 돌을 던진다면 자신들이 가진 신앙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없었듯이, 지금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도 그렇게 자기들에게 찔림이 되고 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하는 말의 방향성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니 창세후로 들어 본 일이 없는 일, 곧 나면서부터 소경이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생긴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즉 먼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이 잉태되면 그 생명으로 인하여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과 같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방향은 반대다. 사람이 행동으로 안식일을 지켜내면, 또 모세의 율법을 지켜내면 모세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모세가 그렇게 말하고 전한 이유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왜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전했는지,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지는 모르겠고, 단지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지금도 거의 모든 교회에 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면 결국 듣는 통일된 모범 답안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거의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스스로 죄를 자백하면 죄가 없을 것인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또 성경을 믿는다면 자신이 가진 육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복 주시려고 주신 말씀이 신학(누가 성경을 학문으로 만들었는가? 건방지게.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인데.)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형태로 주셨을 리도 만무하고, 또 사람을 만드신 분이 사람의 능력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해서 타협해야만 하는 말씀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알고자 해야 한다.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 말씀을 주신 의를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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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신앙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2. 20. 08:10 Writer : 김홍덕

‘너희는 돈 있냐? 나는 예수 있다!’ 세상일이 맘대로 되지 않았던 한 시절 세상을 향해서 가졌던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한 단면이다. 나도 그렇게 배웠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라고 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생활 전반에 있어 돈과 같은 세상의 것 대신에 신앙을 선택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 의무로, 어떻게 보면 자랑으로 여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큰 요소이다. 문제는 그 복이 예수님을, 신앙을 선택하느라 선택하지 않았던 세상에서의 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안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더 치명적인 오류는 그것이 아니다. 더 어두운 부분,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세상의 부귀영화 대신에 선택했다고 하는 그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vs. 혹은 대(對)를 중간에 넣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 vs. 예수”와 같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돈 있냐? 나는 예수 믿는다.’라든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멀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돈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예수님과 동급의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관계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과 신앙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어떤 신앙을 가지면 그에 맞는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고착화시켜놓고, 그것을 예수님과 한 링에서 대결하는 구도라든가, 아니면 돌잔치 때 아이에게 선택하라고 놓아둔 돌잡이처럼 선택하는 동급의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식의 아주 독립되고 개성을 가진 각자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맞지 않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물질세계, 형이하학적인 옷이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그렇게 표현된 근원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믿으면서, 행동과 생각은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으니 세상에서 잘 살게 해 주십시오’ 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을 자신이 세상에서의 삶 대신에 선택했다는 것은 아주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그 선택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믿는데도 세상에서 일일 잘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욕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모순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사는 모양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람이야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표현된 것으로 그 사람을 가늠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에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세상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계인데 그것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겠는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으셨는데 선택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가하겠다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 세상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개념은 근본을 알지 못하는 개념이다. 세상에서의 사는 모습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자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짚고 갈 것은 세상에서 사는 모습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럼 막 살아도 되는거야?’라고 반문하는데, 여기까지 읽고도 그렇게 말한다면 한 마디로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건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고, 세상사는 모습, 즉 삶의 모습은 그 사람 안에 어떤 의가 있느냐에 따라오는 것이지, 막 사는 것과, 경건하게 사는 것을 선택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심만 잊지 않아도 그런 반문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출근해서 돈을 더 버는 것 보다 손해 보고 교회에 가는 선택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를 좇아 살면서 겪게 되는 세상에서의 상황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순종적인 것이고, 진정한 신앙은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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